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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잠 못 이루는 밤 (9/118)

9. 잠 못 이루는 밤2022.03.01.

16551837854303.jpg“방으로 들어와요.”

딩.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이 남자는 날 어떻게 봤길래 방으로 들어오라는 거지?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넙죽 들어갈 것으로 보이나? 내가? 오수희가, 그렇게 쉽게? 추위에 달달거리는 도톰한 입술을 꽉 문 수희가 한마디 뱉었다.

16551837854308.jpg“날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세요?”

16551837854303.jpg“오수희 씨를 어떻게 보다뇨.”

전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승조가 되물었다.

16551837854308.jpg“휴대폰을 빌미로 방에 끌어들이려는 거잖아요.”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은,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어서였다. 캐스팅에 힘 좀 쓴다는 배우들, 돈을 깔고 누워도 남아도는 재벌가의 자제들. 많은 남자들이 TV 속에서 상냥하게 웃는 모습만 보고 수희를 판단했다. 그들에게도 쉽게 웃음을 나눠 줄 거라 여겼던 것이다.

16551837854303.jpg“하.”

그런데 한껏 눈매를 가늘게 뜬 수희를 보고 승조가 웃어 보였다. 즐거워서 터진 웃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손을 뻗은 승조가 젖어 있는 수희의 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16551837854303.jpg“오수희 씨는 모르겠지만, 지금 물에 빠진 생쥐 꼴입니다. 매니저 올 때까지 방에서 몸 좀 녹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에요.”

완전 착각하고 말았다. 아까까지 차가웠던 뺨에 열감이 서서히 퍼지는 것 같았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지만, 제 몸이 들어갈 만한 구멍은 없었다.

16551837854303.jpg“원한다면 밖에서 전화해도 난 상관없습니다.”

방으로 들어간 승조가 충전을 마친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16551837854308.jpg“휴대폰 잘 쓸게요.”

민망해진 수희가 얼른 승조의 휴대폰을 빌려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철용이 얼른 전화를 받길 기다렸다. 뚜루루루. 긴 신호음이 이어지고 수희는 귓전이 뜨거울 만큼 휴대폰을 귀에 바짝 가져다 댔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은 전화가 끊기자 수희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신호음만 가득히 넘어오자 속에서 불안감이 넘실댔다. 이대로 전화를 안 받으면 어쩌지. 휴대폰도 없고 지갑도 없으니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신호음이 뚝 끊기자 수희는 승조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16551837854308.jpg“전화를 안 받네요.”

업무 때문에 하루 대부분을 휴대폰을 쥐고 사는 철용이었다. 후에 부재중 목록을 보고 전화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승조에게 돈을 빌려 숙소를 잡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불편한 상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16551837854308.jpg“밖에 있을 테니까 혹시 다시 전화 오면 말해 주실 수 있나요?”

늦은 시간인데 밖에서 기다린다니. 게다가 젖은 옷을 입고. 승조의 눈길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흰 블라우스가 하얀 살결에 달라붙어 속옷이 언뜻 비쳤다. 스치듯 닿았던 시선을 끌어 올린 승조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16551837854303.jpg“그렇게 하죠.”

승조는 신경 쓰였지만 구태여 티 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수희는 또 의문을 달 게 분명했다. 대가 없이 내비치는 호의일지라도, 수희에게는 순수하게만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16551837854303.jpg“잠깐 기다려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승조가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희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16551837854308.jpg“한 시간 안에는 연락 오겠지.”

손목에 있는 시계를 바라본 수희가 어깨를 움츠렸다.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이 떨어지는 건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내일 촬영이 있는데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방문이 열렸고, 승조가 수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선을 끌어올리기도 전에 수희의 머리 위로 흰 수건이 떨어졌다.

16551837854303.jpg“머리라도 말려요. 이렇게 있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으니까.”

수희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아내기도 전에, 그가 먼저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 털어냈다. 덮어진 수건 사이로 승조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과는 상반된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조심스레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고 있었다. 승조의 손은 움직일 때마다 수희의 귓가와 뺨에 스쳐 지나갔다. 살결이 그의 손에 닿을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던 감정이 큰바람을 만난 듯 출렁였다. 피하지 않고 가만히 승조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수희가 승조의 손목을 붙잡았다.

16551837854308.jpg“제가, 제가 할게요.”

승조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수희가 투박하게 머리카락 이곳저곳을 닦아냈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자신의 머리를 직접 닦아주던 승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건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빨리 머리카락을 닦아내던 수희의 손이 점차 느려졌다.

16551837854308.jpg“대표님, 혹시 여동생 있으세요?”

16551837854303.jpg“아뇨, 없습니다.”

16551837854308.jpg“……아, 그래요?”

16551837854303.jpg“그건 왜 물어요.”

별거 아니라는 듯 수희가 다시금 머리카락을 닦아냈다.

16551837854308.jpg“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직접 머리를 닦아 주길래, 여동생이라도 생각났나 했어요.”

오수희, 널 처음 본 게 16년 전이었다. 그때의 네가 내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여동생, 어쩌면 네가 내게 그런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때와 변함없는 네가 떠올라 손을 대고 말았다. 아니, 널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참고 있었다. 잘 컸다 칭찬해 주고 싶었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은걸. 그리고 안아 주고 싶었다. 네 덕분에 이렇게 살아 있다고.

16551837910382.jpg“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알고? 오빠는 내가 애 같아 보여?”

흘러 버린 시간이 가져간 건 너의 겉모습뿐일 것 같았다. 올라서 있던 입술 끝을 내린 승조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삼켜 냈다.

16551837854303.jpg“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많이 친한 사이려나. 그래서 거부감 없이 내 머리를 만진 건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궁금증은 떠올릴수록 점점 더 커지는 법이니까.

16551837854308.jpg“아니에요. 이제부터라도 조심해 주시면 되니까요.”

승조는 수희가 내민 수건을 가지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호텔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던 수희는 승조의 손이 닿았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벌써 감기에 걸린 건 아닐 텐데 볼이 뜨거웠다. *** 수희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승조의 호텔 방 밖에서 기다린 지 1시간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16551837854308.jpg“오빠는 도대체 뭘 하길래 휴대폰을 안 보는 거야.”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을 확인했다면 분명 다시 전화를 걸어 왔을 것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운이 빠져 주저앉고만 싶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흑인 남자 한 명이 복도로 나왔다. 거구의 남자가 주머니에 있던 호텔 키를 꺼내며 복도에 서 있는 수희를 바라봤다. 승조의 옆방인 건지 남자는 수희가 서 있는 곳으로 거리를 좁혀 왔다. 괜히 자리를 비켜 줘야 할 것 같아 수희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 냈다. 남자는 방문을 여는가 싶더니 수희에게 말을 건넸다.

16551837910382.jpg「러블리, 혹시 갈 곳이 없어?」

언제 봤다고 진득한 애칭인가. 수작을 걸어오는 남자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고 싶지 않았다.

16551837910382.jpg「너처럼 예쁜 애를 누가 바람이라도 맞힌 거야?」

그런데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수희에게 남자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구애해 왔다.

16551837910382.jpg「잘 곳 없으면 내 방은 어때?」

16551837854308.jpg“오늘 진짜 별 거지 같은 일들을 다 겪네.”

잇새로 짓이겨지며 나오는 한국말에 남자가 들떠서 떠들어 댔다.

16551837910382.jpg“한국 사람? 한국 좋아. 김치, 불고기, 비빔밥.”

그 정도면 한국이 좋은 게 아니라 음식이 좋은 것 아닌가. 어설픈 한국어에 수희가 예의상 한쪽 입꼬리만 끄집어 올렸다.

16551837854308.jpg「나 남자친구 있어.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 좀 꺼 줘.」

없는 남자친구까지 만들어 봤지만, 남자에게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16551837910382.jpg「러블리, 튕기는 거야?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런 건가?」

까칠한 수희의 반응이 오히려 남자의 흥미를 불러왔다.

16551837854308.jpg「남자친구 있다는 말 못 들었어?」

16551837910382.jpg「그럼 불러 봐, 남자친구.」

없는 남자친구가 지금 당장 튀어나올 리도 없었다. 남자가 현관문을 연 채로 수희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려던 순간이었다.

16551837854303.jpg「뭐 해, 안 들어오고.」

몸이 울릴 정도로 깊게 가라앉은 나직한 음성에 수희가 뒤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승조가 호텔 방 입구에 팔을 기댄 채 흑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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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희는 자신에게 한 말인가 싶어 눈을 키웠다. 그러자 승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흑인 남자에게 들으라는 듯 다시 한번 말했다.

16551837854303.jpg「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수희는 그제야 갑자기 방으로 들어오라는 승조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승조는 자신을 끌고 가려는 남자 때문에 애인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한데 막상 승조의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는 수희를 보며 남자는 의심을 숨기지 못했다.

16551837910382.jpg「뭐야, 러블리. 나한테 말해 봐. 저 사람이 네 애인이야?」

끈질기게 의구심을 다는 남자에게 승조가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16551837854303.jpg「우리 싸움에 다른 남자까지 끌어들일 거야?」

살짝 찌푸려진 미간까지 더해지니 나 몰래 나랑 사귀기라도 한 건지 묻고 싶어졌다.

16551837854308.jpg‘연기를 저렇게 잘해?’

즉흥적인 연기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정말 남들이 보면 연인 사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그건 수희에게 관심을 표현하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승조의 연기에 주춤하는 듯하더니 수희가 어떤 답을 보일지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붙어 있던 입술을 떨어트린 수희가 승조의 옆에 붙어 섰다.

16551837854308.jpg「내가 말했잖아, 남자친구 있다고.」

승조는 흠칫 놀라며 고요히 눈을 키웠다. 자신의 팔에 수희의 팔이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승조가 연기를 잘한다지만 수희와는 비교할 게 못 됐다. 싱긋, 화사한 미소를 장착한 수희가 승조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삐죽 나온 입술로 볼멘소리를 냈다.

16551837854308.jpg「다음에 또 다른 여자 쳐다보면 종일 같이 말 안 할 거야.」

비염이 온 것 같은 콧소리도 잊지 않고 넣어 주며 수희가 아양을 떨었다. 승조의 연기와 수희의 연기가 잘 버무려지니 남자는 껌뻑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16551837910382.jpg「둘이…… 잘 어울리네.」

16551837854308.jpg「알았으면 방해하지 말아 줘.」

입가에 있던 미소를 싹 지운 수희가 무표정하게 대꾸하고는 호텔 방 문을 닫아 버렸다. 쾅. 문이 닫히자 주변이 일순 적막에 잠겼다. 잠시 뒤, 남자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16551837854308.jpg“방에 들어간 것 같죠?”

수희의 물음에도 승조의 눈은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왜 사람이 묻는데 바닥만 보고 있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리니 승조의 팔에 애틋하게 감겨 있는 자신의 팔이 보였다.

16551837854308.jpg“아. 내 손이 왜 여기 있지.”

화들짝 놀라 손을 떨어트린 수희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풀어놓았다.

16551837854308.jpg“알잖아요, 나 연기자인 거. 너무 몰입했나 보네요.”

16551837854303.jpg“난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머쓱해진 수희가 말을 돌렸다.

16551837854308.jpg“매니저 오빠한테 전화는 왔어요?”

16551837854303.jpg“전화 안 왔어요.”

수희가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승조 또한 휴대폰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1시간이 훌쩍 지났기에 당연히 철용이 찾아왔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별안간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혹시나 해서 나와 본 것이다.

16551837854308.jpg“아, 그래요?”

16551837854303.jpg“…….”

16551837854308.jpg“밖에 있을게요. 아까는 도와줘서 고마워요.”

수희는 눈에 띄게 아쉬움을 표하며 발길을 돌렸다. 문고리를 손으로 붙잡아 내리려는데 승조가 수희를 불러 세웠다.

16551837854303.jpg“오수희 씨.”

긴 그림자가 수희의 몸을 덮었다. 오른쪽 시야 옆으로 승조의 팔이 자리 잡았다. 승조의 오른손은 수희가 열려는 문을 짚고 있었다. 등 뒤에 서 있는 승조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넓은 줄 알았던 현관이 그와 함께 서 있으니 좁게만 느껴졌다.

16551837854303.jpg“방에 들어와서 기다려요.”

16551837854308.jpg“…….”

16551837854303.jpg“오수희 씨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 못 잘 것 같으니까.”

벌어진 문틈이 다시 덜컥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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