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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당신이 잠든 사이 (10/118)

10. 당신이 잠든 사이2022.03.05.

165518380709.jpg“방에 들어와서 기다려요.”

16551838070906.jpg“…….”

165518380709.jpg“오수희 씨 때문에 신경 쓰여서 잠 못 잘 것 같으니까.”

지금 오해하게 말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괜히 오해해서 듣는 거야. 전부터 느낀 거지만 말을 참 사람 헷갈리게 잘한다 싶었다. 괜히 사람 심장 떨리게 말이다.

16551838070906.jpg“제가 소란을 떠는 것도 아닌데 왜 신경이 쓰이는데요?”

165518380709.jpg“비 맞은 임산부를 언제까지 밖에 세워 둘 수는 없잖습니까.”

전화가 오지 않는다면 수희는 복도에서 밤을 새우기라도 할 듯했다. 그렇게 뒀다가는 승조도 오늘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수희가 임신했다고 오해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대로 두고 들어갈 수 없었다.

16551838070906.jpg“아니.”

임신 아니라니까!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니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임신했다고 알고 있으니 적어도 야만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16551838070906.jpg“됐어요. 사양 안 하고 신세 좀 질게요.”

그 신세가 아주 잠깐이기를 바라며 수희가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따뜻한 온기에 얼어 있던 몸이 서서히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괜스레 거실을 둘러본 수희가 서 있기 멋쩍어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165518380709.jpg“일단 씻는 게 어떻습니까.”

씻어? 수희는 방금까지만 해도 눕히고 있던 가시를 도로 바짝 세울 준비를 했다. 단번에 수희의 생각을 알아차린 승조가 오해하지 말라는 듯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165518380709.jpg“일 때문에 파리 왔을 텐데, 그렇게 있다간 감기 걸립니다.”

승조 말대로 젖은 머리는 푸석거렸고, 반쯤 마른 블라우스 안은 습하기 그지없었다. 찬 기운이 가시자 기다렸다는 듯 미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16551838070906.jpg“괜찮아요. 갈아입을 옷도 없고.”

젖은 채로 있는 것도 불편했지만, 씻고 다시 덜 마른 옷을 입기도 싫었다. 그 말에 승조가 방으로 걸어가더니 손에 흰 와이셔츠 하나를 들고 왔다.

165518380709.jpg“바지는 많이 안 젖은 것 같으니까 셔츠만이라도 이걸로 갈아입어요.”

16551838070906.jpg“정말 괜찮은데. 엣취!”

165518380709.jpg“전혀 안 괜찮아 보입니다. 어서 씻어요.”

킁. 수희가 코를 훌쩍거리며 승조의 와이셔츠를 받아 들었다. 내일 촬영을 하기 위해서라도 옷을 갈아입는 게 낫겠다 싶었다. 욕실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간 수희는 그토록 바라던 뜨거운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16551838070906.jpg“따뜻하다.”

자신의 호텔 방이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게 어디인가. 하마터면 전화가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뻔했다.

16551838070906.jpg“좀 있으면 연락 오겠지.”

만약 연락이 안 오면 어쩌지. 최악의 상황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온기를 잃은 몸 먼저 챙기기로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희가 손가락 끝이 겨우 보이는 소매를 접어 올리며 욕실을 나왔다.

16551838070906.jpg“욕실 잘 썼어요.”

수희의 목소리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승조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수희가 입기에 큰 사이즈의 와이셔츠인데 제 옷처럼 잘 어울렸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목선과 소매 밖으로 나온 하얀 손목은 가늘고 연약해 보였다.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에 수희가 어색하게 제 뺨을 검지로 긁적였다.

16551838070906.jpg“뭐, 할 말 있으세요?”

165518380709.jpg“아닙니다.”

눈길을 떼어 낸 승조에게로 수희가 다가갔다. 승조의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앉자 그가 물었다.

165518380709.jpg“저녁은 먹었습니까?”

소파에 상체를 기댄 수희가 힘없이 답했다.

16551838070906.jpg“소매치기에 비까지 맞고 다녔는데 배가 고프겠어요?”

꼬르륵. 일순간 호텔 방 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침묵이 만들어진 건 수희의 배꼽시계 때문이었다.

16551838070906.jpg“고프네요. 눈치도 없이.”

힘이 없던 건 배가 고파서였나 보다.

165518380709.jpg“룸서비스 시키겠습니다.”

16551838070906.jpg“……감사합니다.”

165518380709.jpg“먹고 싶은 건 있습니까? 아니면, 가리는 건.”

16551838070906.jpg“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요.”

승조가 룸서비스를 주문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프런트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수희는 새빨개진 얼굴을 감싸 잡았다.

16551838070906.jpg“아, 내가 미쳐.”

거기서 왜 배가 울리냐고.

16551838070906.jpg“밥만 먹고 가는 거야.”

씻고, 밥도 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후 여기서 잠까지 자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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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명 가리는 게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음식을 시킬 줄은 몰랐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호텔 직원이 끝없이 음식을 올렸다. 거의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모두 시켰다고 봐도 무방했다.

16551838127111.jpg「즐거운 식사 되시길.」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빈 트롤리를 끌고 호텔 방을 나갔다. 승조는 사이드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165518380709.jpg“많이 먹어요. 아까 소리 들어 보니까 배가 많이 고픈 것 같던데.”

16551838070906.jpg“배가 아무리 고파도 이걸 다 먹지는 못하죠.”

165518380709.jpg“다 먹으라고 시킨 거 아닙니다. 오수희 씨가 뭘 먹고 싶은지 몰라서 전부 주문한 겁니다.”

사람 참 민망하게 해 놓고 이렇게 챙겨 주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승조의 맞은편에 앉은 수희가 숟가락을 들었다. 어찌 됐건 고픈 배를 먼저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뭐부터 먹어야 할지 훑어보던 수희가 녹색 리소토부터 맛을 봤다.

16551838070906.jpg“음.”

5성급 호텔답게 음식 또한 별 다섯 개짜리였다. 먹을 게 많다 보니 일단 한 젓가락씩 맛을 보고 있는데 승조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희는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는 승조에게 물었다.

16551838070906.jpg“왜 그렇게 보세요.”

165518380709.jpg“따로 입덧은 없나 봅니다.”

16551838070906.jpg“큽.”

들어갔던 음식이 목구멍을 ‘탁’ 치는 듯했다. 가슴을 퍽퍽 때리는 수희에게 승조가 물을 건넸다.

165518380709.jpg“그러게 왜 급하게 먹습니까.”

지금 누구 때문인데……! 물을 받아 든 수희가 눈으로 말했다. 승조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165518380709.jpg“대본은 다 읽어 봤습니까?”

가슴을 짓누르던 체증이 내려가자마자 승조가 달갑지 않은 주제를 꺼냈다. 아무리 급했어도 한승조 방에 들어오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가 밀려왔다. 입맛이 달아난 수희는 포크 끝으로 바닷가재를 쿡쿡 찔렀다.

16551838070906.jpg“읽어 봤어요.”

165518380709.jpg“어떤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까.”

수희는 나이프로 자른 바닷가재 살덩이를 입에 밀어 넣었다.

16551838070906.jpg“밥 먹는데 일 이야기예요?”

165518380709.jpg“그럼 다시 미팅 날짜 잡겠습니까?”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빠져나갈 구멍 하나 주지 않았다.

16551838070906.jpg“김시운 작가님 작품이 좋았어요.”

165518380709.jpg“어떤 부분이 좋았습니까? 캐릭터? 아니면 스토리?”

대충 에둘러 넘기려고 했지만 그걸 승조가 가만둘 리 없었다.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어깨 쪽으로 든 수희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16551838070906.jpg“스토리요. 매력적이던데요? 김시운 작가님 다웠던 작품이었어요.”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말을 꺼내자 승조가 한쪽 눈썹 끝을 끌어올렸다.

165518380709.jpg“전혀 예상 밖이네요. 이번 작품은 기존의 김시운 님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작품인데.”

순간 손바닥에 땀이 차는 느낌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수희가 지루하다는 어조로 투덜거렸다.

16551838070906.jpg“따분한 일 이야기는 그만하죠. 저 여기 대표님이랑 일 이야기 하러 온 것도 아닌데.”

165518380709.jpg“불편했으면 미안합니다.”

그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사과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알 게 뭔가. 어쨌거나 대본 이야기는 들어갔으니 됐다 싶었다.

16551838070906.jpg“한국 돌아가는 대로 오늘 나온 밥값 보내 드릴게요.”

165518380709.jpg“그럴 필요 없습니다. 오수희 씨가 사라고 이렇게 많이 주문한 것도 아니니까요.”

16551838070906.jpg“아뇨, 저 빚지는 거 싫어해서요.”

저녁을 얻어먹을 만큼 승조와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딱 잘라 거절을 표하는 수희에게 승조는 굳이 제 뜻을 강요하지 않았다.

165518380709.jpg“오수희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차려진 음식이 아까워 최대한 배에 밀어 넣었지만,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놔야 했다. 호텔 직원이 남은 음식들을 치우고 떠날 때까지도 철용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수희는 10시를 지나쳐 가는 시침을 보며 건너편 소파에 앉아 있는 승조에게 말을 건넸다.

16551838070906.jpg“늦었는데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전 여기서 기다리다가 전화 오면 나갈게요.”

방과 거실 사이에는 슬라이딩 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문만 닫는다면 소음도 시야도 차단할 수 있었다. 소파에서 일어선 승조가 방으로 가는가 싶더니 소파에 올려 둔 재킷을 걸쳐 입었다.

165518380709.jpg“나갔다가 올 테니까 쉬고 있어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는지 묻고 싶었지만, 안다고 해도 수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16551838070906.jpg“다녀오세요.”

승조가 호텔 방을 나가자 주변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몸도 녹았겠다, 배도 부르겠다. 점차 이기지 못할 정도로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16551838070906.jpg“정신 차려, 오수희.”

전혀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16551838070906.jpg“여기서 잘 거야?”

승조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한숨 자면 어떤가.

16551838070906.jpg“그러다가 아침까지 푹 자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두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서라도 잠들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몸은 자꾸 노곤해져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이건 푹신한 소파 탓이 분명했다.

16551838070906.jpg“10분만 자자. 딱 10분.”

수면욕을 이기지 못한 수희가 줏대 없이 흔들렸다. 스르르 상체를 옆으로 기울인 수희가 소파에 머리를 댔다. 껌뻑, 껌뻑. 점차 움직임이 느릿해지던 눈꺼풀이 더는 들리지 않게 됐다. 곧이어 정적 위로 수희의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쌓였다. 결국 수희는 10분 뒤에 일어날 거라는 목표가 무색하게도, 승조가 돌아온 30분 뒤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 찬 기운이 묻어나는 재킷을 승조가 소파 위에 얹어 놓았다. 인기척에도 수희는 곤히 잠이 들어 깨어나지 못했다. 오늘 고단한 하루를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승조가 손에 들려 있는 검은색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다름 아닌 연고와 밴드였다. 불이 꺼진 상가들 사이에서 어렵게 찾아낸 약국에서 사 온 것이었다. 소파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있는 수희의 발꿈치가 빨갛게 벗겨진 게 보였다. 은연중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던 걸 눈여겨보고 있었다. 승조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어 통화 내역을 확인했다. 역시나 철용에게서는 전화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수희가 전화를 걸었던 번호로 승조가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165518380709.jpg[스튜디오 그린 한승조 대푭니다. 오수희 씨랑 같이 있습니다. 메시지 확인하면 2809호로 오세요.]

휴대폰을 내려 둔 승조가 소파에 누워 있는 수희를 바라봤다. 옛날에도 이렇게 잠이 든 수희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적이 있었다.

16551838127111.jpg“수희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인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됐지만,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한다면 거절할 게 분명했다. 수희에게 자신은 불편한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재킷을 덮어 주는 것밖에 해 주지 못했다. 오랫동안 수희를 바라보고 있던 승조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어렸을 때 수희는 그를 잘 따랐다. 지금과 같은 경계의 눈빛은 볼 수도 없었다. 비록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이건 또 이거대로 좋았다. 새로운 수희의 내면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이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희의 모습을 알아 갈 수 있으니까.

165518380709.jpg“좋네, 이렇게 다시 만나니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럽기만 했다.

165518380709.jpg“수희야.”

뒤에 따라붙는 이름이 한없이 다정했다. 한데 승조가 흘려보내는 말은 혼잣말이 되지 못했다. 처음 만났던 그때와는 달리 수희에게는 불면증이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줄 알았던 수희가 깨어났다는 걸 승조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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