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당신은 누굴까2022.03.08.
거실에 나 있는 창을 통해 햇볕이 들어오자 수희가 눈을 떴다. 계속 선잠이 들어 있던 상태라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잠을 잘 수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수희가 기지개를 쭉 켜며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수희야.”
한승조가 이름을 불렀었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 분명 무어라 말을 했었다. 뭔가 중요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잠이 덜 깬 상태였던 터라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 수희가 등 뒤에 있는 슬라이딩 도어를 바라봤다. 승조는 아직 자는 건지 별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희는 제 다리 위를 덮고 있는 승조의 재킷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 위에 올려진 검은색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손을 뻗어 헤집어 보니 안에 연고와 밴드가 보였다. 바르라는 친절한 안내도 없이 툭 얹어져 있는 것이 꼭 무감각한 한승조를 보는 것 같았다. 가끔 헷갈린다. 친절한 듯 불친절한 남자가.
“하나만 하라고요.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성의가 있으니 수희는 연고를 푹 짜 벗겨진 뒤꿈치에 발랐다. 야무지게 밴드까지 빨간 상처 위에 바르는데 방 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자연스레 승조가 있는 방으로 고개를 돌렸고, 이내 인기척이 들리더니 슬라이딩 도어가 열렸다.
“일어나 있었습니까?”
샤워를 마친 승조는 상의 대신 흰색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털며 방을 나오는 승조의 모습은 패션 잡지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외모에, 저 피지컬이면 길 가다 받았을 기획사 명함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웠을 것이다.
“네, 방금요.”
말없이 오랫동안 시선을 유지했다는 걸 깨닫고 수희가 뒤늦게 답했다. 승조는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호텔 방 밖에 있는 사람은 뭐가 그리 급한지 연이어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수희가 앉아 있는 소파 쪽에서는 현관이 보이지 않아 목을 길게 빼야 했다. 현관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호텔 방 안으로 철용이 들어왔다.
“수희야.”
철용은 뒤쪽에 있는 승조를 흘깃거렸다.
“왜 네 방이 아니라 여기 있어.”
“오빠는 왜 전화를 안 받았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미안. 내가 어제 변기에 휴대폰을 빠트리는 바람에 메시지를 아침에 봤어.”
보고 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다 손이 미끄러져 변기 속에 빠트리고 말았다. 급한 대로 드라이어로 말렸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켜지지 않았다. 혹시나 해 아침에 일어나 다시 켜 보니 다행히 전원이 들어왔고, 그제야 승조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고 찾아왔던 것이다.
“어제 일은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나가자.”
언제까지 승조의 방에 머물 수는 없었다. 수희가 철용과 함께 방을 나가려는데, 승조가 수희에게 검은색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승조가 어제저녁에 나가서 사 왔던 연고와 밴드였다.
“들고 가요. 난 필요 없으니까.”
수희가 손을 들어 올리자, 승조가 비닐봉지를 넘겨주었다. 어제 왜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건지 묻고 싶었다. 우리는 알고 지내던 사이도 아닌데. 궁금증을 풀고 싶었지만, 철용이 수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쓸게요. 어제오늘, 신세 많이 졌어요.”
발길을 돌린 수희가 철용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호텔 방을 나왔다. 호텔 방을 나오자마자 철용이 수희가 입고 있는 옷을 빤히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남자 정장 와이셔츠였다. 매운 걸 먹은 것도 아닌데, 철용이 “쓰읍” 하고 소리를 냈다. 프런트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는데 철용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그런 거 아니지?”
“뭐가?”
“한 대표님이랑 그런 사이 아니지? 어제…… 아무 일도 없었지?”
“오빠.”
무섭게 내려앉는 ‘오빠’라는 단어에 철용이 바로 깨갱했다.
“나는 네가 한 대표님 옷 입고 있어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야.”
“어제 소매치기당해서 방 키랑 지갑, 휴대폰 전부 도난당했어.”
“그랬어?”
“거기에다가 비까지 내려서 쫄딱 젖는 바람에 잠깐 신세 진 거야.”
“내가 그것도 모르고 대표님이랑 네 사이를 의심이나 하고.”
철용은 제 입술을 철썩철썩 내려쳤다.
“다음부터는 휴대폰은 절대 화장실에 안 들고 갈게.”
“응, 제발.”
“한 대표님 정말 좋은 분이네. 대표님 아니었으면 너 갈 곳 없이 떠돌 뻔했잖아.”
좋은 분이지. 그저 좋기만 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게 문제지만.
“수희야.”
당신 진짜 정체가 뭐야. *** 아침까지 잡지 촬영을 이어 간 수희가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일등석 좌석은 모두 차 있는 상태였지만 수희의 옆자리만 비어 있었다. 수희는 좌석 위에 있는 짐칸을 열어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과 함께 가방을 안에 밀어 넣었다. 짐칸 문을 닫고 앉으려는데 어째서인지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다시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세게 내리려는데, 짐칸 문을 누군가 붙잡았다.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귓가에 묵직하게 닿는 음성에 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다 싶더니 한승조가 서 있었다. 철용이 승조 역시 사흘 뒤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던 게 언뜻 기억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많지 않으니 지극히 대단한 우연은 아니었다. 짐칸 밖으로 나와 있는 수희의 가방 손잡이를 안으로 밀어 넣은 승조가 수희를 내려다봤다. 승조는 짐칸 문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면서도 수희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가방 손잡이가 들어간 짐칸은 그제야 달칵하고 문이 닫혔다. 귀에 닿는 승조의 옷깃 소리에 수희의 귓불에 슬며시 열이 올랐다. 둘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지만, 승조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물러서기는커녕 수희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오수희 씨가 들어가는 입구를 막고 있습니다.”
승조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수희가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가 수희의 옆자리인 복도 자리에 앉는 게 아닌가.
“……거길 왜 앉아요?”
“내 자리라서 앉는 건데 뭐가 이상합니까?”
승조가 손을 들어 올리자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티켓이 보였다. 좌석 번호와 티켓에 적힌 숫자가 같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긴 비행을 승조와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소름 돋을 정도로 대단한 우연이었다.
“손님, 비행기 곧 출발합니다. 자리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상냥한 항공사 직원의 요청에 수희가 좌석에 앉았다. 수희는 옆에 앉아 있는 승조가 신경 쓰였지만, 그는 아닌 건지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커다란 소음을 내던 비행기가 출발하고, 곧 지면을 딛고 있던 바퀴가 떨어졌다. 사선으로 솟은 비행기가 천천히 수평을 유지했고, 귀에 울리던 소음에도 적응되어 갈 때쯤. 승조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물 한 잔만 주시겠습니까.”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유리잔에 든 물을 가져와 승조에게 건넸다. 승조는 미리 챙겨 둔 약 봉투를 하나 꺼내 입 안에 넣고 물을 마셨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옆자리에 앉아 있으니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봤을 땐 전혀 아픈 곳이 없어 보이는데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한 걸까. 좌석 테이블 위에 놓인 약 봉투를 보던 수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 아파요?”
좌석에 편히 몸을 기댄 승조가 한쪽 입꼬리만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왜요. 걱정이라도 됩니까?”
“하. 내가 대표님을 왜 걱정해요?”
그대로 가만히 수희를 보던 승조가 입술을 떼어 냈다.
“왜 안 됩니까. 내가 오수희 씨 걱정하는 것처럼 오수희 씨도 날 걱정해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설핏 가늘어진 승조의 눈매가 서운함을 담고 있었다. 일정하게 웅웅대는 백색 소음 때문인지 머리가, 심장이 울렸다. 할 말을 잃은 수희에게 승조가 뒤늦은 답을 주었다.
“수면젭니다.”
“수면제요? 불면증 있어요?”
승조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폐소 공포증이 있습니다. 처음엔 숨 쉬는 게 힘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렇게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정도니까요.”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고작 예전처럼 쓰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수면제 없이는 오랜 시간 비행을 하는 건 무리였다. 수희는 승조에게 처음으로 동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수희도 트라우마를 이겨 내지 못해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약이 바닥난 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있었기에 병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언제까지 약 없이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에 적힌 글자를 보기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으니까.
“완전히 괜찮아지길 바라요. 진심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승조가 괜찮아지길 바랐다. 자신은 그럴 수 없으니, 그라도 나아졌으면 해서였다.
“그거 압니까?”
“…….”
“오수희 씨가 날 보는 눈이 바뀐 거.”
수면제를 복용해서인지 승조의 눈이 아까보다는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보고 있었는데요?”
승조가 제 눈 끝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오수희 씨, 그 두 눈이 항상 화난 것처럼 날 쏘아보고 있었습니다.”
음, 그랬던 것도 같다. 승조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파악하기까지 늘 경계를 유지했었다. 더불어 찢어진 고양이 눈매가 한몫한 듯했다. 인정이 빠른 수희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대표님을 보는 제 눈이 어떤데요?”
눈초리에 머물러 있던 검지가 아래로 내려갔다.
“날 동정하고 있는 눈입니다, 지금은.”
“싫으세요? 동정받는 거.”
갑자기 쏟아지는 약 기운에 승조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이어 두 눈을 감은 승조가 말했다.
“나쁘지 않네요, 오수희 씨가 해 주는 동정.”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한 마디가 더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날 선 눈으로 쳐다보는 거 말고 동정이라도 해 줘요. 그 편이 더 나은 것 같으니까.”
심장이 대뜸 간지러워졌다. 처음 느껴 보는 기분에 수희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어야 했다. 폐부 깊이 숨이 들어가자 아까의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이상했다. 온몸에 열이 오른 것처럼 갑자기 간지러워지는 게. 한승조라는 사람은 도통 종잡을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당신은 누굴까 궁금해졌다. 그걸 넘어서 알고 싶어졌다. 한승조가.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수희의 물음에 승조가 눈꺼풀을 반쯤 들어 올렸다. 대답을 전부 듣고 싶은데 이러다 승조가 잠이 드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감정이 그대로 담긴 말은 조급하게 흘러나왔다.
“팬 사인회 말고요. 우연히라도 만난 적이 있나요? 이를테면 아주 어렸을 때요.”
사실 답을 듣는 게 무서웠다. 꿨던 꿈이 정말 과거의 한 부분일까 봐.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 한승조가, 꿈속에 나온 그 한승조일까 봐. 스르르, 옆으로 시선을 옮긴 승조가 답을 내어 주려는 듯 입술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