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말할 수 없는 비밀2022.03.12.
승조는 조금 기뻤다.
“팬 사인회 말고요. 우연히라도 만난 적이 있나요? 이를테면 아주 어렸을 때요.”
그녀가 드디어 자신을 알아본 것 같아서. 무언가 기억나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그 기억에 대한 확신은 없는 듯했다. 어쩌면 그저 어릴 적 봤던 승조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 묻는 말일 수도 있었다.
“어디서 날 닮은 사람이라도 봤습니까?”
“본 건 아니고…….”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수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좀 더 수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듯 눈꺼풀이 무거웠다. 약 기운을 이겨 내 보려 승조가 말을 붙였다.
“방금 한 말, 보통 작업 수법 아닙니까?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냐는 말.”
“하. 제가 왜 한승조 대표님한테 작업을 걸겠어요?”
왜 안 돼. 네가 나한테 작업 거는 게. 승조는 머릿속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스스로 답을 내렸다. ……아. 너한테는 아이가 있지. 게다가 사랑하는 남자도 있고. 우리의 과거를 네가 떠올려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너는 그저 우스갯소리였다 할지라도, 어렸던 나는 웃긴 농담으로 넘길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과거를 너는 모르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만약에 너에게 가족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적 없습니다. 오수희 씨랑 만난 건 <침수> 회식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답이 지금과는 달랐을까.
“아, 난 또.”
꿈이 진짜인 줄 알았네. 수희의 안도가 섞인 한숨에 승조가 물었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는 겁니까?”
꿈이 과거와는 멀다고 느낀 수희가 승조에게 털어놓았다.
“얼마 전에 꿈을 꿨거든요. 한승조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오는 꿈.”
그건 승조가 맞을 것이다. 수희를 처음 만난 게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그냥 꿈 아닙니까? 어릴 적 일이었다면 오수희 씨가 기억했겠죠.”
과거를 기억 못 하니 물었던 거였다. 하지만 승조에게 시시콜콜한 과거사까지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다지 중요한 기억이 아닌가 보죠.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어요. 그 남자애한테 제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거든요.”
“뭐라고 했는데요.”
“내가 그 남자애를 책임진다고 했어요.”
낯부끄러운 말일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꿈인데.
“정말 꿈이라서 다행이네요.”
좌석에 머리를 기댄 승조는 어느새 눈꺼풀을 완전히 닫고 있었다.
“꿈이 아니라면 그 터무니없는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고작 열세 살도 안 된 애가 한 말을 기억할까요?”
물음표가 달렸건만 마침표가 달린 말은 따로 오지 않았다. 약을 이기지 못한 승조가 어느 틈에 잠이 든 것이다.
“흠.”
수희가 승조를 바라본 채 세우고 있던 상체를 좌석에 파묻었다. 손을 눈앞에 흔들어 봤지만 승조는 움찔대는 기색조차 없었다. 완전히 잠에 빠져든 것이다. 좌석에 몸을 바로 뉜 수희가 생각에 잠겼다. 가만 생각해 보니 꿈에 나온 아이가 제 옆에 있는 한승조가 아니라는 것밖에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꿈이 아니라면.
“진짜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약속을 믿고 큰 건 아니겠지?”
만약에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말만 믿고 큰 거면…….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해질 것 같은데.”
*** 한국으로 돌아온 수희는 새 휴대폰부터 만들었다. 지갑에 들어 있던 카드들도 재발급을 해야 했지만 그건 급한 게 아니기에 나중으로 미뤘다. 파리에서부터 함께한 캐리어를 풀어 안에 들어 있는 옷들을 꺼냈다. 카디건과 청바지를 걷어 내자 밑에 깔린 흰 와이셔츠가 보였다. 비가 오던 날, 승조에게 빌렸던 와이셔츠였다. 입었던 셔츠를 그대로 돌려줄 수 없어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오빠한테 대신 전해 달라고 해야겠네.”
빌린 돈은 계좌로 넣어 주면 되니, 굳이 직접 전해 줄 필요도 없었다. 철용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주형이 오랜만에 동생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수희가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주형, 너 왜 그동안 내 전화 안 받았어.”
[잔소리할 거면 끊고.]
걱정스러운 수희의 목소리에도 주형은 감정이 바짝 메마른 어조로 협박했다. 석 달 만에 연락된 동생이 전화를 끊을까 봐 수희는 화를 참았다.
“알겠어. 잔소리 안 할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고?”
[안 그래도 돈 달라고 전화했어. 내 계좌로 돈 좀 넣어 줘.]
“내가 일주일 전에 용돈 보냈잖아.”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수희는 매달 주형에게 100만 원씩 보내 주고 있었다. 주형이 지내고 있는 오피스텔도 수희의 명의였고, 얼마 전에 대학교도 휴학한 상태였기에 따로 돈이 들어갈 만한 곳도 없었다.
[다 썼으니까 달라는 거잖아.]
주형이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투덜거렸다.
“일주일 만에 100만 원을 어디에 쓴 건데. 피시방에서 쓸 만한 돈도 아니잖아.”
[아, 진짜. 누나가 엄마야? 엄마 없다고 누나가 엄마 노릇이라도 해 보려고?]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수희는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나한테 엄마는 한 명이야. 고애란 여사, 딱 한 명. 그러니까 엄마 역할 하려고 하지 마.]
매정할 정도로 단호한 주형의 말에 수희는 저자세를 취했다.
“미안. ……난 네가 나쁜 길로 빠지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거야.”
[나 지금 써야 하니까 바로 보내 줘.]
한숨을 삼킨 수희가 들고 있던 승조의 와이셔츠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손안에서 구겨진 와이셔츠에는 안절부절못하는 속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얼마나 필요한데?”
[300만 원 보내 줘.]
“뭐? 300만 원을?”
아까운 돈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생에게는 더더욱. 주형을 위해서라면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줄 수도 있었다.
[왜. 설마 그것도 못 줘?]
“300만 원은 안 돼.”
하지만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데 300만 원을 줄 수는 없었다. 수희가 거절의 의사를 표하자 곧장 짜증 섞인 말이 날아들었다.
[돈도 많으면서 나한테 300만 원도 못 줘? 왜. 누나가 번 돈이라 못 주겠어?]
“어디에 필요한지만 말해. 그럼 보내 줄게.”
[내 사생활을 누나가 알아서 뭐 하게. 그냥 카메라 보고 웃어 주면 손쉽게 억씩 턱턱 벌잖아. 내가 천을 달래, 억을 달래. 고작 300만 원이야.]
“300만 원이라도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르면 나 못 줘.”
이번에는 수희도 물러서지 않을 것같이 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나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주형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
[나한테 그러고 싶냐? 엄마도 없는 나한테.]
“오주형, 그만해.”
[뭘 그만해. 엄마가 누나한테 연기 그만하라고 했을 때 그만했으면 그 일도 안 일어났어.]
역겨운 것이라도 집어삼킨 듯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입을 틀어막은 수희가 휴대폰을 귓전에서 떼어 냈다. 휴대폰에서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주형의 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말싸움을 이어 나간다고 해도 승자는 결국 주형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수희는 이번에도 주형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돈 보내 줄게.”
[땡큐.]
“보내 줄 테니까 내 전화 받아. 내가 자주 전화하는 것도 아니잖아.”
[알겠어.]
“전화 못 받는 상황이면 메시지라도 주고.”
[아, 알았다고. 돈 좀 보내 준다고 유세 부려? 끊는다.]
수희가 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단박에 뚝 끊겼다. 불덩이라도 삼킨 것 같은 가슴을 손바닥으로 짓누른 수희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저리가 날 정도로 눈앞이 일렁거렸다. 약을 끊은 지 일주일이 지나가자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일상생활조차 불가능했다. 이틀 뒤에 예정되어 있던 <침수> 인터뷰에 참석하려면 약이 필요했다. 원래 진료받던 병원을 찾고 싶었지만, 기자들이 병원을 알아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새로운 병원을 찾는 것 또한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8개월 동안 고집스럽게 한 병원만 찾은 건, 그저 상담 내용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새로운 병원에서 과거의 일을 처음부터 끄집어낼 생각을 하니 그것마저도 고역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을 수만은 없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 채 갈팡질팡하던 수희가 결정을 내렸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수희는 연락처 목록에 있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끊어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이지혜 정신 건강 의학과 의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일 상담 예약하려고 전화했어요.”
[혹시 저희 병원 오신 적 있을까요?]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실까요?]
“오수희, 예요.”
골목 어귀에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짙은 담배 냄새가 흘러나왔다.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문 남자 무리의 중심에는 오주형이 있었다.
“야, 너희 누나가 진짜 돈 보내 준다고 한 거 맞아?”
담배꽁초를 신발로 짓이겨 끈 주형이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보내 준다니까. 기다려 봐.”
“너 귀찮아서 보내 준다고 구라 친 거 아니냐?”
“그러니까. 너 오수희가 누나라는 것도 구라지?”
놀림감이 되어 버린 주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가고 있던 그때. 딩동. 알람이 오고 곧 계좌에 300만 원이 찍혔다. 주형은 금세 기세등등해져서는 친구들 앞에 휴대폰을 들이댔다.
“보이냐? 내 능력.”
“오오. 대박. 능력자 맞네.”
“야, 오늘부터 친하게 지내자.”
“‘야’가 뭐냐. 주형이 형님한테.”
돈 300만 원에 친구들이 떠받들어 주자, 주형은 광대가 솟아올랐다.
“기분이다. 이번에 제주도 여행 가서 내가 방값 쏜다!”
“멋있는 새끼.”
“남자네.”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주형이 형님.”
주형이 우두머리라도 된 양 구는 게 못마땅했던 건지 남자애 한 명이 비꼬았다.
“야, 근데 그게 어떻게 네 능력이냐? 잘나가는 네 누나 능력이지.”
순식간에 주변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분위기를 풀어 보려 한 친구가 먼저 시비를 걸어 온 남자애의 등을 툭툭 쳤다.
“이석진, 너 갑자기 왜 그러냐? 분위기 어색해지게.”
“왜.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신 발언도 못 하냐?”
풀어 보려던 분위기가 더욱 엉망으로 가라앉았다. 다들 주형과 석진의 눈치만 보고 있는데, 불편한 심기를 가득 드러낸 주형이 말했다.
“그 잘난 누나 한 번에 나락 보낼 수 있는 것도 나야. 그러니까 내 능력이지.”
어이없다는 듯 석진이 턱 끝을 들어 올려 주형을 깔봤다.
“네가 어떻게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데?”
“내가…….”
순간 욱한 주형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못할 비밀을 밝힐 뻔했다. 아무리 감정이 앞섰다 하더라도 맨정신으로 사실을 뱉을 일은 없었다.
“됐다. 나 오늘 들어간다.”
더 있어 봤자 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아 주형이 돌아섰다.
“야. 술도 안 사 주고 그냥 가냐?”
“오주형! 석진이가 한마디 했다고 삐친 거 아니지?”
친구들의 원성에도 주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들 뿐이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은 주형이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섰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주형은 석진의 말을 되뇌었다.
“네가 어떻게 나락으로 보낼 수 있는데?”
그 일이 세상에 밝혀지는 날에는 온 세상의 화살이 누나를 공격할 것이다. 다시 TV에 나오는 일도, 어쩌면 세상 밖으로 나올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 특권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쥐여 줄 수 없었다.
“절대 말 못 하지.”
엄마를 죽인 게 누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