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유니콘 같은 남자2022.03.15.
다음 날. 수희는 진료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을 찾아갔다. 혹시나 자신의 차를 타고 간다면 기자들이 알아볼 수 있으니 택시를 선택했다. 검은색 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껴 얼굴도 철저히 가리고 있었다. 택시에서 내린 수희는 건물 밖으로 사람들이 빠져나오자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수희를 지나쳐 가고 나서야 건물로 들어가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정신과가 있는 7층을 누른 수희가 엘리베이터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엘리베이터는 한 번도 멈추지 않고 7층에 곧장 다다랐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수희는 어깨를 아래로 털썩 내려놓으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해 두었기에 병원 직원이 곧장 상담실로 안내해 줬다.
“오수희 씨, 오랜만이네요.”
문이 열리자 의사가 안경을 끌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상담실에 들어왔었는데, 오늘은 왠지 모를 안도감 같은 게 들었다. 아무래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소파에 수희가 앉자 의사가 환자 차트를 가지고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오수희 씨가 마지막으로 병원을 찾은 지 2주가 지났네요. 약은 다 먹었을 텐데, 증상이 사라졌던 건가요?”
수희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약을 끊자마자 증상이 심해졌어요. 구토도 여러 번 했고요.”
“그럼 병원을 찾지 않은 게 증상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가요?”
숨길 만한 일도 아니기에 수희는 사실대로 밝혔다.
“누군가 제가 이 건물에서 나오는 걸 보고 임신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어요. 아직 기자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태라 그동안 들를 수가 없었어요.”
“그랬군요.”
워낙 인터넷이 수희의 이야기로 떠들썩했기에 의사 역시 들은 바 있었다. 수희가 복용 중인 약 중에는 임산부에게 독이 되는 약들이 있었다. 기형아나 유산까지 일으킬 수 있기에, 정말 임신했다면 진즉 의사와 상의했을 것이다.
“한동안은 오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약을 받아 두려고 해요.”
수희의 사정을 이해한 의사가 곧바로 복용할 약들을 적어 내려갔다.
“오수희 씨가 먹고 있는 약들은 최대 한 달밖에 처방할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나요?”
지금 수희에겐 물러설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한 달이라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다음 일은 잠시 나중으로 밀어 두기로 했다.
“괜찮아요. 한 달 치 처방받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해 줄게요.”
차트에서 펜을 떼어 낸 의사가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이렇게 약만 먹는다고 좋아지진 않아요. 상담을 받고 지금 오수희 씨가 품고 있는 그 응어리를 풀어 나가야 해요. 그게 바로 실질적인 해결 방법이에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약으로 증상을 줄이는 건 아주 잠시뿐이라는 걸. 이대로 두다가는 언젠가 가슴에 박혀 있는 불덩어리가 자신을 집어삼킬 거라는 걸 잘 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오수희 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거예요.”
“…….”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잔혹한 불씨가 커지는데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진실을 알렸을 때, 사람들에게 받을 눈총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동생마저 그 일이 있고부터 수희에게 벽을 쌓았다. 핏줄이 이어진 가족도 그녀를 용서 못 하는데, 과연 남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금 제 옆에 남아 있는 자신의 편들이 돌아서지 않는 것. 그게 수희가 자신의 비밀을 덮어 두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요.”
굳게 다물린 입술이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8개월 동안 상담을 해 온 의사는 적잖게 걱정이 됐다. 어렸을 적부터 강한 자립심을 가지고 있는 수희는 쉽사리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단 한 번도 남들에게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장 내일 곪은 부분이 터지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오수희 씨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털어놓는 걸 우선으로 해 봐요.”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철용이었다. 하지만 편찮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철용에게 마음의 짐을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오수희 씨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절대 외면하지 않을 거예요.”
진심 어린 조언에 수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크에서 수납을 마친 수희가 병원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칠세라 서둘러 챙을 붙잡아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가다 지난번과 같이 사람들을 마주할 수도 있었다. 전과 같은 일을 당할까 싶어 수희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구 계단을 택했다. 비상구에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까 싶어 계단을 내려가는 수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쉬지 않고 1층으로 내려온 수희가 비상구 문을 열었다. 그대로 로비를 벗어나려는데 비상구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온 사람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건물 밖으로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가야 했다. 여학생이 수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수희가 마스크를 눈가로 좀 더 끌어당겼다. 와 닿는 눈길을 무시하고 여학생을 지나치려는데, 수희의 모자 아래를 보려 여학생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혹시 배우 오수희 아니세요?”
모자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는데 여학생은 그녀가 수희라는 걸 알아차렸다. 수희는 눈을 피해 반대쪽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어? 목소리 들으니까 수희 언니 맞는 것 같은데.”
나는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팬이라면 제발 조용히 지나가 줬으면 했다. 하지만 여학생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두 손을 모으며 부탁했다.
“언니, 저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면 안 돼요?”
언뜻 눈이 마주친 여학생이 낯설지 않았다.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면 팬 사인회에 여러 번 참석했을 가능성이 컸다.
“오수희 아니라니까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여자가 자신의 딸을 말렸다.
“그래, 오수희 아니라잖아.”
“언니 맞아. 이 옷 언니 사복 패션이란 말이야.”
뜨끔. 대충 넘겨짚고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이유 있는 확신이었다.
“언니 올해 수능 보는데 힘내라는 의미에서 사인 한 장만 해주시면 안 돼요?”
평소라면 간절한 이 여학생의 요청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사람들이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어서 자리를 피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수희는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건물을 벗어나려는데 뒤에서 여학생이 후다닥 뛰쳐나왔다.
“수희 언니!”
혹시나 사람들이 쳐다볼까 봐 수희의 고개가 얼른 뒤편으로 돌아갔다. 수희에게 쫓아가려는 여학생의 팔을 아이의 엄마가 붙잡고 있었다. 여학생은 이름을 듣고 뒤를 돌아본 수희를 보고 방방 뛰었다.
“봐 봐. 수희 언니라고 부르니까 뒤돌아보잖아.”
뭐가 저렇게 날카로워? 얼른 고개를 제자리로 돌린 수희가 빠르게 밖으로 걸어갔다. 옆 건물에 있는 약국에 들러야 했지만 지금은 여학생을 따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여학생은 기어코 자신을 붙잡은 엄마의 팔을 뿌리치고 수희의 뒤를 쫓아왔다. 수희의 심장이 쿵쾅대며 터질 듯이 뛰어 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수희 언니! 사인만 해 주세요!”
설상가상 여학생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수희를 다시 한번 불렀다. 인도를 걷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였고, 뛰어오는 여학생에게는 붙잡히기 직전이었다. 그때, 황급히 도망치는 수희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수희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보고 그대로 발이 멈춰 버렸다. 두 눈을 키운 수희가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승조.”
모자로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수희의 눈동자에 승조가 비쳤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승조는 수희를 알아보는 듯했다. 흔들림 없이 수희를 응시하고 있는 승조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수희는 제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길 바라며 도리질을 했다. 우연히 이곳에 나타난 거라면 조용히 자신을 지나쳐 가기를 바랐다. 하나 그런 마음이 닿지 않았던 건지 승조가 수희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언니!”
어느새 뒤따라온 여학생이 수희에게 손을 뻗는데.
“수진아.”
승조가 그녀의 이름이 아닌 수진이라 부르며 옆에 섰다.
“많이 기다렸어?”
우리가 언제 약속 같은 걸 했었나? 수희가 자신의 왼쪽 어깨로 시선을 내렸다. 어깨 위에는 승조의 손이 얹어져 있었다. 시선이 손을 스쳐 승조의 얼굴 쪽으로 옮겨졌다. 그러자 그가 한 걸음 물러서며 멈칫거리는 여학생을 눈으로 가리켰다.
“도와줄 테니까 협조해요.”
이 남자는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건지 알고 있는 걸까.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승조가 여학생을 두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맞춰 걷던 수희는 어깨를 감싼 그의 뜨거운 손이 의식됐다. 자신을 끌어당기고 있는 탓에 걸을 때마다 부딪치는 몸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여학생은 수희와 승조의 뒤를 따라 밟으려 했다. 그때, 승조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더니 수희를 데리고 골목길로 들어갔다.
“영지야! 버스 오잖아. 어서 이리 와!”
여학생은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는 엄마의 곁으로 걸어갔다. 끈질기게 따라오던 여학생이 사라졌지만, 수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벽을 팔로 짚은 채 자신의 앞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승조 때문이었다. 높은 건물 틈 사이. 머리 위에는 해가 떠 있었지만, 건물 그림자로 인해 주변은 어두웠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둘 사이는 정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승조와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던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건만, 더 많은 대화가 눈으로 오가는 듯했다.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있으면서 왜 도와주는 건데. 파리에서도, 여기서도.’
‘아이 아빠는 어디 있어. 왜 너 혼자인 건데.’
1분, 2분, 5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본 채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마스크를 아래로 내린 수희가 먼저 운을 뗐다.
“왜 날 도와준 거예요?”
한승조는 자꾸만 곤란한 상황에 백마를 탄 왕자처럼 나타났다. 동화 속에만 존재해야 하는 유니콘 같은 남자가 자신의 앞에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자연스레 스쳐 지나가도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도와줄 의무 같은 건 없으니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는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나 날 구해 주는 걸까.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내게, 그는 계속 자신의 옆을 내어 줬다.
“왜……. 왜 그랬어요?”
“말했잖아요.”
“…….”
“내가 오수희 씨 책임지겠다고.”
당연하다는 듯 뱉어 내는 말이 순풍과 함께 수희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아, 순풍. 승조를 처음 만났던 날도 봄을 닮은 순풍이 불어왔었다. 그 순풍에 높게 쌓아 올렸던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책임지겠다는 말 그만해요.”
그 말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요. 그런 말 좀 했다고 떨리기라도 합니까?”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승조와 달리 수희는 도리어 심각해졌다.
“네.”
“…….”
“떨리니까, 그만하세요.”
어떤 여자가 백마 탄 왕자를 보고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수희의 심장이 뛰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