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가까워지는 진실2022.03.19.
수희가 병원을 찾기 10분 전, 승조는 압구정에 위치한 편집숍에 있었다. 오늘 입점한 브랜드 상품들을 확인하던 승조의 곁으로 차 비서가 다가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차 비서의 두 손에 휴대폰이 소중히 들려 있었다. 승조는 3층에 일렬로 서 있는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내려가 보세요.”
직원들이 허리를 푹 숙였다 들어 올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승조가 차 비서에게 돌아서자, 차 비서가 휴대폰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방금 전화가 왔습니다.”
“무슨 전화.”
“대표님께서 저번에 유튜버 제보자 알아보시라고 한 거요.”
안 그래도 승조는 차 비서에게 진전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승조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차 비서는 입술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과할 정도로 목소리 톤을 끌어 올렸다.
“유튜버가 개인적으로 아는 정보책이라고 하더라고요. 나이는 20대 초반이라고 했습니다.”
“차 비서.”
“네.”
“내가 알고 싶은 게 그 사람 나이 같나? 이름은.”
망설이는 빛이 역력하던 차 비서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주소는.”
“주소도…….”
승조가 가볍게 웃음 지어 보였다.
“그럼 차 비서가 할 일을 대신 할 비서를 알아보면 되겠네. 차 비서 손으로 직접.”
책상을 치워 버리겠다는 말을 저렇게 웃으면서 할 건 뭔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당하기 전에 차 비서가 얼른 휴대폰 액정을 승조 쪽으로 돌렸다.
“그래서! 제가 이걸 알아냈습니다.”
지도 앱에는 병원 상가가 찍혀 있었다.
“오수희 씨가 찾아갔다는 병원입니다.”
승조가 휴대폰을 가져가자 차 비서가 금세 의기양양해졌다.
“이것도 어렵게 얻어 낸 정보예요. 이 정도면 저 방 안 빼도 되는 거죠?”
“간단한 인적 사항은 왜 못 알아내는 거야?”
주소를 외워 둔 승조가 휴대폰을 다시 차 비서에게 내밀었다. 차 비서는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철저한 사람이라 돈도 계좌로 안 받고 현금으로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알려 준 이름도 가명이라고 했고요.”
“알겠어. 혹시 제보자 정보 더 알아내는 거 있으면 말해 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승조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자 차 비서가 뒤에 따라붙었다.
“어디 가십니까?”
“퇴근이야. 차 비서도 퇴근해.”
어디를 가는지 차 비서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분명 수희가 들렀던 병원이리라,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차 비서의 예상대로 승조는 수희가 목격되었다는 병원으로 향했다. 수희를 만날 생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 병원을 다시 찾을 확률은 희박했으니까. 그럼에도 병원에 들른 건 그저 발길이 그곳으로 닿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수희를 만날 수 있었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같은 저울 재기는 하지 않았다. 주변의 이목이 쏠리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골목으로 숨어든 승조는 여학생에게 발각될까 봐 저도 모르게 수희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닿지 않으려 벽을 팔로 밀어냈다. 수희의 숨이 점차 빠르게 쌓이는 게 느껴졌다.
“책임지겠다는 말 그만해요.”
두 뺨이 빨간 건 그저 급박한 상황에 일어난 몸의 변화라 여겼다.
“왜요. 그런 말 좀 했다고 떨리기라도 합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던 농담이 담긴 물음이었다.
“네. 떨리니까, 그만하세요.”
그런데 진담이 돌아오자 승조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것도 잠시. 벽을 짚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린 승조가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부담스럽다는 뜻을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까?”
승조는 수희가 자신에게 떨릴 리가 없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소중한 아기의 아빠가 있었다. 그럼에도 수희를 보고 있으면 가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곤 했다. 지금처럼.
“오해할 거 없습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건 오수희 씨 배우 인생이니까.”
네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됐다고 판단했을 때, 그때가 지금인 것 같아 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너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도, 아이도 있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쩌면 선을 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말 안 해도 알고 있어요.”
수희가 승조의 눈을 외면했다. 위기에 빠졌을 때마다 나타나 자신을 구해 주고 책임지겠다고 말하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나에게 아주 사적인 감정이 있는 거라고. 그래서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착각할 뻔했다.
“가 볼게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끌어 올린 수희가 몸을 틀었다.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승조가 수희에게 말을 건넸다.
“근처에 내 차 있습니다. 내 차 타고 가요.”
괜찮다고 하려는데 승조가 말을 막았다.
“거절할 생각은 마요. 아까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잖아요.”
일이 닥치고 나서야 승조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이미 파리에서 겪었기에, 승조의 의견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렇게 할게요.”
승조는 수희가 쓰고 있는 모자의 챙을 아래로 눌러 주었다.
“잘 생각했어요.”
챙으로 반쯤 가려진 시야 안으로 설핏 웃어 보이는 승조의 입술이 보였다. 다부진 입매가 호선을 그리는 게 보기 좋았다. 수희는 돌아서서 가는 승조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주 잔잔하게 진동하는 심장 때문인지 숨이 간질거리며 뱉어졌다.
“아직도 숨이 차는 건가.”
수희가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러 보며 걸음을 떼어 냈다. 그의 말대로 차는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수희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승조가 내비게이션을 눌렀다.
“집이 어딥니까?”
“아지오청담요.”
아지오청담이라면 승조가 머무는 펜트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파트였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검색해 넣은 승조가 페달을 밟았다.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차 안은 먼지 한 톨 내려앉아 있지 않았다. 수희는 승조의 차를 보니 차 실내 청소를 제법 오랫동안 하지 않은 게 기억났다.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겁니까?”
쓸데없는 잡념에 사로잡혀 있던 수희는 승조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승조가 사이드 미러와 정면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병원 간 거 아닙니까?”
몸이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이 컸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아픈 건 똑같으니 수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몸이 좀 안 좋아서 갔어요.”
“아기는 괜찮습니까?”
승조가 아무것도 품지 않은 수희의 납작한 배를 눈으로 가리켰다. 이제는 그가 아기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웃길 정도였다. 신호 탓에 차를 세운 승조는 헛웃음을 품고 있는 수희에게 눈길을 돌렸다.
“왜 웃습니까?”
“웃기니까요.”
“그러니까 뭐가 웃긴데요.”
“한승조 대표님이 제가 임신했다고 믿는 거요.”
승조는 이해한다는 듯 입술을 떼어 냈다.
“숨기고 싶은 거 압니다.”
빨간 신호를 보고 있던 수희가 승조와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입가에 있던 미소를 지운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줘 말했다.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 임신 안 했어요.”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그가 믿어 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상관없었다. 한승조라는 사람에게 기대하고 말한 건 아니니까.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면 그렇게 생각하라고 둘 것이다. 그게 어쩌면 더 편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정말입니까?”
그런데 승조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 대신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쩌면 그가 믿어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수희는 스스로 그 기대감을 무너트렸다.
“됐어요. 안 믿을 거 알아요.”
“…….”
“……믿어 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으니까.”
자그맣게 뱉어 내는 말이 너무나 담담해 오히려 쓸쓸함이 묻어났다. 어느새 바뀐 신호에 승조의 차가 정지선을 지나 속도를 내 도로를 달렸다. 수희의 집으로 가는 동안 더는 임신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두 사람 모두 다른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로 승조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서행하던 승조의 차가 지하 주차장에 세워지자, 수희가 기다렸다는 듯 매고 있던 안전띠를 풀었다.
“오늘 일, 감사합니다.”
승조가 수희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오수희 씨는 나한테 감사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여긴 파리도 아닌데.”
덧붙은 말이 너는 참 손이 많이 간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을 수희가 아니었다.
“그러게요. 요술 램프 지니도 아닌데 여기저기 나타나는 누구 덕분이죠.”
승조가 싱겁게 웃음 지었다.
“내일 저녁에 뭐 합니까?”
내일은 <침수>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오전에 마무리될 일정이니 저녁 전에는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따로 일 없어요. 왜요?”
“정 고마우면 내일 같이 저녁 먹죠.”
뭐야. 임신 아니라고 하니까 바로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설핏 눈썹 사이가 좁혀지자 승조가 곧장 말을 더했다.
“데이트 신청 아닙니다.”
“제, 제가 언제 데이트 신청이래요?”
“그럼 얼굴은 왜 빨개집니까?”
“하! 더워서 그런 거예요.”
짧게 수희가 손부채질하며 눈을 크게 떴다. 사람 오해하지 않게 목적을 말해 주면 좀 좋은가. 갑자기 억울해진 수희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면 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한 건데요?”
“저번에 못 끝낸 미팅을 다시 하려는 겁니다. 매니저분도 시간 되면 같이 저녁 먹죠.”
미팅이라는 말에 수희의 얼굴이 금세 어두워졌다.
“생각해 보니까 저녁에 약속이 있네요.”
“…….”
“죄송해요. 미팅은 어려울 것 같아요.”
승조가 내일이 아닌 다른 날을 꺼낼까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들어가 볼게요. 조심히 가세요.”
조수석에서 내린 수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수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걸 보고 나서야 승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수희에게 보냈던 대본들은 유명 배우들이 줄줄이 캐스팅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수희라면 분명 먼저 연락해 올 거라 여겼다.
“임신이 아니라면 상관이 없지 않나.”
처음에는 불러오는 배 때문에 복귀하지 않은 줄 알았다. 그녀의 말대로 임신이 아니라면 미팅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거짓을 뱉는다고는 보기 어려웠던 그녀의 얼굴이 정말 연기였던 걸까. 그녀는 자신이 아는 배우 오수희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을 계속해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해 본들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승조가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조수석 아래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전띠를 풀고 허리를 숙인 승조가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하얀 종이 가운데에 굵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처방전’. 그리고 그 아래 수희의 이름과 처방받은 약품들이 적혀 있었다. 그저 평범한 처방전에 불과한데도 승조는 이 종이 하나가 답을 내어 줄 것 같았다. *** 서재 안으로 들어온 승조는 흰 샤워 가운의 매듭을 지었다. 헐렁하게 매진 매듭 때문인지 가운 사이가 벌어졌지만 개의치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터넷 창 하나를 켠 승조는 수희의 처방전에 적힌 약 중 한 가지를 검색했다. [알프람정0.5㎎] 상단에 떠 있는 약 정보가 승조의 입에 올랐다.
“불안 장애의 치료 및 불안 증상의 단기 완화.”
스크롤을 내려 약의 세부 정보를 클릭했다. 화면이 검색한 약에 관한 내용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글자를 따라 움직이던 마우스 커서가 한곳에 멈췄다. 반듯했던 승조의 미간 사이에 점차 짙은 주름이 잡혔다. [임산부 금기 등급, 2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