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끝나지 않은 하루 (15/118)

15. 끝나지 않은 하루2022.03.22.

[임산부 금기 등급, 2등급]

1655183930597.jpg“……2등급.”

명확한 임상적 근거 또는 사유가 있는 경우 부득이하게 사용. 승조가 또렷이 박혀 있는 글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또 읽었다. 이제야 승조는 처방전에 적혀 있는 의원의 명칭을 확인했다. 이지혜 정신 건강 의학과 의원. 수희가 다녀온 곳은 산부인과가 아닌 정신과였다. 들고 있던 처방전을 책상에 내려 둔 승조가 생각의 굴레에 사로잡혔다. 임신했다고 하면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을 것이다. 일전에 수희를 <침수> 회식 장소에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수희는 김 감독의 강요에 이기지 못해 술을 마셨었다.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게 임신하지 않아서였다면…….

1655183930597.jpg“정말 임신이 아니었다고?”

손을 들어 올린 승조가 자신의 턱을 쓸어내렸다.

1655183930598.jpg“유튜브 영상에, 목격담에. 홑몸인 사람을 임산부로 만드는 거 쉽네요.”

1655183930598.jpg“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임신 아니에요.”

1655183930598.jpg“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사실이에요. 저 임신 안 했어요.”

수희는 항상 임신이 아니라고 말해 왔다. 사실을 말하는 그녀에게 거짓을 덮어씌운 것은 자신이었다. 승조가 두 손바닥을 맞붙이고는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1655183930597.jpg“네 편이 돼 주려고 했던 건데, 오히려 그 반대였구나.”

지금 수희에게는 자신을 믿어 주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되지는 못할망정, 그녀가 철저히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다니. 한심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처음부터 그녀를 믿었어야 했다. 아주 오래전 수희가 그래 줬던 것처럼.

1655183930597.jpg“그럼 왜 복귀를 서두르지 않는 거지.”

수희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껏 미팅을 거절하는 건 그럴 수밖에 없는 몸 상태 때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면 복귀하지 못하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승조는 책상 위에 올려진 처방전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16551839306007.jpg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희가 침대에 누웠다. 천장에 달린 하얀 조명을 바라보고 있는데 베개 옆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울렸다. 누운 채로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은 수희가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낯선 번호에 엄지가 통화 버튼 근처에서 배회했다. 원래 모르는 번호면 받지 않는 편이지만, 끊어질 때까지 울리는 전화에 잠시 갈등했다. 혹시나 아는 사람의 전화일 수도 있겠다 싶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1655183930598.jpg“여보세요.”

1655183930597.jpg[납니다, 한승조.]

헤어진 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승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당황한 수희는 곧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1655183930598.jpg“……아. 무슨 일로 전화하신 거예요?”

수희가 용건부터 묻자 승조가 지체 없이 답했다.

1655183930597.jpg[만나죠. 내일.]

또 미팅이야, 싶어 수희가 지루한 어조로 대꾸했다.

1655183930598.jpg“저녁 약속 있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1655183930597.jpg[미팅이 아니라 데이트면 나오겠습니까?]

데이트라는 말에 수희는 뉘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넘긴 수희가 되물었다.

1655183930598.jpg“방금 뭐라고 했어요?”

1655183930597.jpg[데이트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애정을 표하는 숱한 남자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한승조는 자신에게 사심 따위 없다는 걸. 사사로운 감정이 존재했더라면, 병원 건물 뒤편에서 그런 말은 덧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1655183930597.jpg“오해할 거 없습니다. 내가 책임지겠다는 건 오수희 씨 배우 인생이니까.”

혼자서 답을 내린 수희가 허탈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1655183930598.jpg“장난 전혀 재미없는 거 아시죠?”

1655183930597.jpg[데이트라고 뭐 별거 있습니까? 같이 밥 먹는 것도 데이트죠.]

1655183930598.jpg“죄송하지만 전 불편한 사람과 식사 못 해요.”

1655183930597.jpg[전혀 죄송한 말투가 아닌 것 같네요.]

수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코끝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1655183930598.jpg“하여튼 저녁 식사는 거절할게요.”

1655183930597.jpg[그럼 오수희 씨한테 받아야 할 걸 받는 자리로 하죠. 파리에서의 저녁 식사 값도, 와이셔츠도 내일 받겠습니다.]

어떻게 이 남자는 포기를 모를까. 이 정도 되니 중요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55183930598.jpg“절 꼭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1655183930597.jpg[만나면 압니다. 그때 다 설명하죠.]

일 이야기라면 비서를 통해서 연락했을 것이다. 직접 연락까지 해 온 거라면 개인적인 일일 것이고, 이렇게까지 약속을 잡으려는 걸 보니 중요한 용건인 듯했다.

1655183930598.jpg“……알겠어요. 만나요, 내일.”

1655183930597.jpg[시간대는 상관없습니까?]

1655183930598.jpg“저녁이면 다 괜찮아요.”

1655183930597.jpg[식당이랑 시간 메시지로 보내겠습니다.]

1655183930598.jpg“네.”

전화를 끝낸 수희가 다시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휴대폰에 띄워진 승조의 번호를 보던 수희가 연락처 추가 버튼을 눌렀다. [한승조 대표님] 여섯 글자를 적는 것보다 저장 버튼을 누를지 말지 결정하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몸을 모로 돌린 수희가 휴대폰을 빤히 바라봤다. 번호를 저장할 만큼 오래 볼 사이일까, 고민이 돼서였다. 휴대폰 액정을 손톱으로 톡톡 두드리던 수희가 결국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침대에 덮어 둔 뒤, 병원에서 받아 온 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1655183930598.jpg“……그런데 내가 약을 받아 왔었나?”

처방전은 분명 병원에서 받아 왔었는데, 약국을 간 기억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여학생 때문에 급히 도망친 것만 떠올랐다. 수희는 넓은 방 안과 거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이곳저곳을 뒤져 보아도 처방전 종이 끝자락도 보이지 않았다. 허망해진 수희가 차가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1655183930598.jpg“나 처방전 잃어버린 거야?”

어디서 처방전을 잃어버린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고생을 해서 병원을 다녀왔건만, 어렵사리 얻어 낸 처방전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시 병원을 가야 하는 게 두려웠지만, 그것보다 당장 내일 있을 인터뷰가 걱정됐다. *** <침수> 300만 기념 인터뷰는 J 백화점 로비 중앙에서 치러졌다. 수희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이 단상 위에 오르자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왔다. 많은 기자들은 수희를 향해 셔터를 눌러 댔다. 단상에 마련된 자리에 앉자 수희의 옆에 선 MC가 마이크를 들었다.

16551839390354.jpg“<침수>가 전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어느덧 400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감독님부터 소감 한 말씀 들어 볼까요?”

김 감독은 몇 주 사이에 얼굴빛이 더욱 좋아져 있었다. 아무래도 <침수>가 화제성과 작품성으로 인정을 받고 있어서일 것이다.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한 김 감독이 소감을 밝히고 나서 수희의 차례가 됐다. 단상을 둥글게 감싸고 선 사람들은 수희에게 집중했다.

1655183930598.jpg“먼저 좋은 작품을 알아봐 주신 관객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함께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김 감독님께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가지런하게 흘러나오는 수희의 음성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MC가 수희에게 질문 하나를 더 했다.

16551839390354.jpg“다른 분들도 궁금하실 것 같아요. <침수>에서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 주셨는데,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만나 볼 수 있을까요?”

말문이 막혀 버린 수희가 단상 아래에 서 있는 철용을 바라봤다. 철용 역시 대답을 기다리듯 수희를 빤히 쳐다봤다. 미리 기자들에게 질문지를 받은 철용이 대본을 밴에서 건네줬었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속을 뒤집어 놓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수희를 훑어 내리며 수군거렸다.

16551839390354.jpg“왜 대답을 못 해?”

16551839390354.jpg“복귀 안 하는 거 아니야? 아기 낳아야 하잖아.”

16551839390354.jpg“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말이 들릴 리도 없는데 수희는 제멋대로 추측하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속을 누군가 헤집어 놓은 것 같았다. 마이크를 잠시 떼어 냈던 수희가 길게 숨을 몰아쉰 뒤 입을 열었다.

1655183930598.jpg“곧 작품으로 인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들과 작품으로 소통하고 싶습니다.”

16551839390354.jpg“지금 당장 만나 볼 수 없다니 아쉽습니다. 그래도 늦지 않게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겠죠?”

답을 듣고 난 후에야 질문의 상대가 바뀌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수희의 손바닥에는 땀이 차 있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데 눈앞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언제 그랬냐는 듯 일그러진 형상이 돌아왔다. 수희는 질문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어서 이 긴 인터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16551839390354.jpg“지금부터 기자님들의 질문을 받아 보겠습니다.”

이윽고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까지 무리 없이 넘긴 수희는 남몰래 안도했다.

16551839390354.jpg“마지막 질문 받아 보겠습니다.”

MC가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는 기자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있던 마이크를 쥔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51839390354.jpg“연예나라의 이무진 기자입니다. 오수희 씨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수희가 허벅지 위에 얹어져 있던 손을 들어 마이크를 잡았다. 기자는 거침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16551839390354.jpg“오늘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 보셨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물음에 수희의 눈썹 사이가 절로 좁혀졌다.

16551839390354.jpg“어제 산부인과에 간 사진이 올라왔는데, 왜 다시 그 병원을 찾으신 겁니까?”

1655183930598.jpg“……네?”

16551839420633.jpg

  어안이 벙벙해진 수희는 한순간 패닉에 빠졌다. 혼란에 사로잡혀 손도 덜덜 떨렸다. 사실을 따지면 어렵지 않게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수희는 애초에 산부인과를 간 적이 없었다. 그 위층에 있는 정신과를 갔을 뿐이었다. 사실대로 자신이 찾은 곳은 산부인과가 아닌 다른 병원이었다 답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와는 관련 없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말해도 됐다. 하지만 지금 수희는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싸늘해진 인터뷰 자리에 MC가 눈치를 보며 나섰다.

16551839390354.jpg“이무진 기자님, 죄송하지만 <침수> 300만 기념 인터뷰 자리입니다. 영화에 관련된 질문만 받겠습니다.”

16551839390354.jpg“답은 들은 거 같으니까 질문은 더 하지 않겠습니다.”

숨을 턱 막히게 하는 기자의 답변에 수희는 심장을 누군가 꽉 쥐는 것만 같았다. MC가 급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하자 수희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척 단상을 내려가다 마지막 계단에서 몸이 휘청였다.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은 수희가 쓰러지려는데, 대기하고 있던 철용이 얼른 수희를 붙잡았다. 그 순간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 댔다. 철용은 수희를 제 몸으로 가리며 밴을 세워 둔 주차장으로 향했다.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과 기자들의 모습이 요동치자 수희는 눈을 감았다. 간신히 사람들을 헤치고 밴에 올라탄 수희가, 운전석에 몸을 밀어 넣는 철용에게 물었다.

1655183930598.jpg“방금 그게 무슨 소리야? 커뮤니티에 내 사진이 올라와?”

16551839447914.jpg“잠깐만 기다려 봐.”

철용은 인터뷰 10분 전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진을 확인한 수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창백해졌다. *** 그로부터 여섯 시간 뒤, 수희는 승조가 메시지를 보낸 장소에 도착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간 수희가 승조의 앞에 섰다.

1655183930598.jpg“좀 늦었어요.”

10분 늦게 도착한 수희가 의자에 앉자, 승조는 인사 대신 다른 말을 먼저 꺼냈다.

1655183930597.jpg“먼저 사과부터 하죠.”

차에 두고 간 처방전을 허락 없이 살펴본 건 명백히 잘못된 일이었다. 그런데도 약의 성분까지 알아본 건 수희가 숨기고 있는 사실의 실마리가 될 것 같아서였다.

1655183930597.jpg“오수희 씨가 두고 간 처방전 봤습니다.”

제 잘못을 청산하듯 더없이 깔끔한 사과였다. 오늘, 수희는 애란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무너져 내릴 일이 더 남아 있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