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착한 딸 (16/118)

16. 착한 딸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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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39518952.jpg“오수희 씨가 두고 간 처방전 봤습니다.”

처방전을 봤다고 말을 꺼내는 건 그 약의 성분을 알고 있다는 뜻일 거다. 누구에게나,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게 마음의 병이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수희가 사람들에게 숨겨 온 것은, 자신의 아픔을 나눠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어나 한 번도 자기 삶의 무게를 누군가와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마음에 박힌 응어리를 푸는 법도, 나누는 법도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을 치부로 여기는 사람이 그녀의 어머니인 고애란이었다. 힘들어 울 때 수희를 다그치며 남들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걸 수치라 가르쳤다. 그렇기에 수희는 승조가 자신의 처방전을 봤다고 했을 때 절망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승조에게 자신의 치부가 낱낱이 밝혀지게 돼서.

16551839518956.jpg“처방받은 약도 봤겠네요?”

테이블 밑에 있는 손을 떨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16551839518952.jpg“무슨 약인지 봤습니다.”

16551839518956.jpg“그래서, 배우 오수희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고 알릴 건가요? 그 이유로 복귀하지 못하는 거라고.”

16551839518952.jpg“…….”

16551839518956.jpg“아니면 그걸로 협박이라도 할 건가요? 그게 협박의 이유가 될까요?”

16551839518952.jpg“오수희 씨.”

승조가 무게를 실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수희는 그제야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알았다. 수희가 입을 다물자 승조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16551839518952.jpg“내가 그런 사람으로밖에 안 보입니까?”

크게 부풀었던 가슴을 꺼트린 수희가 눈꺼풀을 닫았다. 오전에 있던 일로 수희는 아직도 이성을 찾지 못했다. 철용이 보여 주었던 사진에는 하얀 모자를 쓰고 산부인과 데스크에 서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 여성은 수희와 비슷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수희라는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사진이었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한 게시물에 무려 천 개가 넘는 댓글들이 담겨 있었다. [저 옷 저번에 오수희가 공항 갔을 때 입은 거임.] [오수희 임신한 거 빼박인 듯.] [저 사진만으로 어떻게 오수희라고 판단함?] 몇몇은 수희를 옹호하는 댓글을 달았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문제가 커진 건 그 사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 있었던 인터뷰가 끝난 후, 봇물 터지듯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수희, 커뮤니티 사진에 대해 답변하지 못해.] [충격을 받은 듯 쓰러지는 오수희.] [인터뷰 중 하얗게 질린 오수희…… 매니저 부축받고 사라져.] 사전에 커뮤니티 사진을 봤더라면 수희는 기자의 질문에 입을 다물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수희는 사진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갑자기 밀려든 구토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인터뷰 한 번에 수희에게 임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16551839518956.jpg“죄송해요. 흥분했어요.”

16551839518952.jpg“화내도 이해합니다. 명백한 내 잘못이니까.”

수희는 발치에 내려 두었던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16551839518956.jpg“제가 보다시피 몸이 안 좋아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안에 파리에서 빌렸던 식사비랑 와이셔츠 들어 있어요.”

할 말을 끝낸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16551839518952.jpg“미안합니다.”

아까도, 지금도, 사과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수희가 꾹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16551839518956.jpg“사과는 아까 하셨어요.”

16551839518952.jpg“아까 한 건 오수희 씨 처방전을 본 거에 대한 사과였습니다.”

16551839518956.jpg“그럼 지금은요?”

16551839518952.jpg“오수희 씨가 임신이 아니라고 했을 때 믿어 주지 못했던 거.”

16551839518956.jpg“…….”

16551839518952.jpg“그거에 대한 사과입니다.”

깔끔하게 와 닿은 그 말이 수희의 가슴에 먹먹하게 자리 잡았다. 모두 수희의 말에 귀를 막고 등을 보일 때, 승조만이 진실을 보고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16551839518956.jpg“대표님이 믿어 주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상처받진 않아요.”

16551839518952.jpg“…….”

16551839518956.jpg“그러니까 그 사과, 안 하셔도 돼요.”

담담히 말을 뱉어 낸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51839518956.jpg“속이 안 좋아서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네요.”

수희는 승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식당 룸을 도망치듯 나갔다. 멀어지는 수희를 바라만 볼 뿐, 승조는 구태여 수희를 붙잡지 않았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승조는 이윽고 생각을 정리한 듯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을 가져온 직원이 룸으로 들어왔을 때, 승조는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입었다. 먼저 식당을 나왔던 수희는 인도 끝에 서서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퇴근 시간과 겹쳐서인지 넓은 도로는 차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희도 마음 같아서는 차를 가지고 나오고 싶었지만, 핸들만 붙잡으면 머리가 어지러워 운전을 할 수 없었다. 손을 흔들어 보지만 주황색 차들은 모두 손님을 싣고 있었다.

16551839579058.jpg“오수희 아냐?”

16551839579058.jpg“어디?”

택시를 잡으려는 수희의 곁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람들을 의식한 수희의 고개가 자꾸만 수그러들었다. 발끝만 바라보고 있는데 수희의 앞에 차 한 대가 세워졌다. 택시인 줄 알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예상과 달리 자신의 앞에 세워진 차는 승조의 검은색 세단이었다. 못 본 척 넘기려는데 승조가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16551839518952.jpg“타요. 태워 줄게요.”

16551839518956.jpg“아뇨. 괜찮아요.”

다른 곳을 응시하며 수희는 승조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로 지나갈 줄 알았던 승조는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직접 조수석 문을 열고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수희를 바라봤다.

16551839518956.jpg“뭐 하는 거예요?”

승조의 행동을 예상 못 했던 수희의 눈이 커졌다.

16551839518952.jpg“이 시간에 택시 못 잡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더 기다린다고 하면 가겠습니다.”

원래라면 고집을 부려서라도 택시를 타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수희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지금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다. 망설이던 수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으로 돌아온 승조가 때마침 풀린 정지 신호에 차를 출발시켰다.

16551839518952.jpg“조수석 앞에 있는 서랍 열어 봐요.”

수희는 승조의 말에 앞에 있는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500㎖ 물과 수희의 이름이 적힌 약 봉투가 있었다.

16551839518952.jpg“저녁 먹고 난 뒤에 줄 생각이었습니다. 가져가요.”

약 봉투와 물을 꺼낸 수희가 글로브 박스를 닫았다. 성분이 독해 빈속에 먹으면 안 되는 약들이었지만, 차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네 개의 알약을 입에 넣은 수희가 물을 마셨다. 아직 약효가 돌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하지만 승조가 처방전을 허락도 없이 살펴봤기에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승조와의 대화를 미리 거부하듯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빨갛고 노란 불빛들이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들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눈을 감은 수희는 머리를 채운 고민을 잠시 밀어냈다.

16551839518956.jpg‘떠나고 싶다.’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곳으로. 잠깐 눈을 감고 있어야겠다고 한 게 약 기운 때문인지 선잠이라도 들었나 보다. 눈을 뜨자 차는 멈춰 있었고, 열린 창가 틈 사이로 바람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코끝 언저리에 언뜻 소금기가 가득한 바다 향이 머물렀다. 옆으로 기울였던 고개를 세우자 눈앞에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16551839518956.jpg‘꿈을 꾸는 건가.’

다시 눈을 감아 보자 흐릿했던 정신이 점차 선명해졌다. 뺨을 간질이는 바닷바람이 현실이라 일깨워 주는 듯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수희가 안전띠를 풀곤 조수석 문을 열고 나왔다. 차 보닛 끝에 걸터앉아 있던 승조가 수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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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839518952.jpg“깼습니까?”

바다가 반쯤 삼킨 붉은 석양이 승조를 비추고 있었다. 수희는 자신의 몸을 덮치는 노을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어두워진 하늘과 섞인 붉은빛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처음엔 그에게 왜 의견도 묻지 않고 이곳으로 온 거냐 따질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지러웠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 갈 만큼 찬란한 풍경에 말을 잃고 말았다.

16551839518952.jpg“오수희 씨.”

특유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수희를 불렀다. 수희가 돌아보자 그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운을 뗐다.

16551839518952.jpg“오수희 씨가 복귀할 수 없는 이유. 알고 싶습니다.”

네가 열한 살 때, 넌 항상 웃었었다. 작은 것에 행복해하고 즐거워했다. 늘 그때와 같을 줄만 알았던 네가 지금은 내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아픔에 잠겨 있다. 어떻게 하면 네가 열한 살 그때로 돌아올 수 있을까. 네가 내 행복을 바랐던 것처럼, 나 역시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16551839518956.jpg“왜…….”

16551839518952.jpg“…….”

16551839518956.jpg“왜 대표님이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신 거예요?”

수희를 바라보는 승조의 눈동자가 그녀를 감싸 주듯 다정한 빛을 띠었다. 승조는 오늘 수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수희가 식당에 도착하기 전에 차 비서가 보내 준 기사들을 전부 읽었으니까. 그 뒤에 식당으로 온 수희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이 됐다.

16551839518952.jpg“누구든 지금 오수희 씨 말을 들어 줄 사람이 필요해 보여서요.”

16551839518956.jpg“…….”

16551839518952.jpg“너무 별거 아닌 이윱니까?”

수희에게 가장 필요한 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든 털어놓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가슴이 답답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16551839579058.jpg“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오수희 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거예요.”

그게 한승조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유롭게 풍경을 눈에 담은 건 애란이 제 곁을 떠난 이후 처음이었다. 보석을 박아 놓은 듯 예쁘게 반짝이는 파도 때문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이대로 가다간 스스로 무너져 내릴까 봐 버팀목이 필요했던 걸까. 자신에게 그 어떠한 존재도 아닌 한승조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그 이야기를. 머뭇거리던 수희가 발아래를 집어삼킨 모래알을 바라보았다.

16551839518956.jpg“지루할 수도 있어요.”

16551839518952.jpg“재밌으려고 듣고 싶은 거 아닙니다.”

16551839518956.jpg“긴 이야기가 될 거고요.”

16551839518952.jpg“상관없어요.”

너한테 줄 시간은 아주 많이 있으니까. 승조의 옆으로 걸어간 수희가 보닛에 앉았다. 붉은빛으로 일렁이던 하늘은 어느새 사라지고, 검은 바다 뒤에는 달도 해도 보이지 않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수희의 옷깃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차가워진 뺨을 쓸어 넘긴 수희는 한참 동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승조는 긴 시간 동안 수희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10분이 무의미하게 흘러만 갔다.

16551839518956.jpg“배우라는 꿈을 꾼 건 저였지만, 그 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 건 엄마였어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열세 살, 그때가 시작이려나. 어쩌면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시절이 처음일 수도 있겠다. ***

16551839633479.jpg“뭐? 오디션을 안 봐?”

비상구 계단에서 수희의 어머니 고애란이 큰소리를 냈다. 열세 살, 또래보다 큰 키에 비해 마른 체구인 수희는 한껏 움츠러들었다.

16551839579058.jpg“나…… 하기 싫어요, 엄마.”

16551839633479.jpg“크게! 똑바로 말 안 해? 엄마가 평소에 말할 때도 발음 정확하게 하라고 했지?”

애란의 호통에 수희가 몸을 벌벌 떨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수희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됐다.

16551839579058.jpg“오디션 보기 싫어요, 엄마.”

16551839633479.jpg“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쉰 애란이 무릎을 접고 앉아 수희와 눈을 맞췄다. 수희의 어깨를 붙잡은 애란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16551839633479.jpg“수희야, 너는 엄마가 네 눈앞에서 사라지면 좋겠니? 응? 사라질까?”

16551839579058.jpg“……엄마.”

잔뜩 겁을 먹은 수희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16551839633479.jpg“너 오디션 안 보면 엄마 평생 너 안 봐. 그러니까 네가 선택해.”

16551839579058.jpg“…….”

16551839633479.jpg“네 눈앞에서 엄마 없어져 버릴까? 아니면, 네가 오디션 볼래?”

과연 이게 선택지라고 할 수 있을까. 강요와 억압에 수희는 제 뜻을 펼칠 수 없었다.

16551839579058.jpg“할……게요.”

16551839633479.jpg“그래, 그래야 착한 딸이지.”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착한 딸. 그게 고애란이 수희 맞춤으로 만들어 놓은 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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