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잃어버린 과거2022.03.29.
“수희야, 허리 곧게 펴야지.”
밥상 앞에서 훈계를 하는 애란 때문에 수희는 편히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눈치를 보던 수희가 앞에 놓인 불고기를 먹으려는데, 애란이 수희에게로 멸치볶음을 바짝 밀었다.
“고기는 방금 네 번 먹었잖아. 키 크려면 멸치 더 먹어.”
애란은 수희가 무엇을 얼마만큼 먹는지 매번 지켜보고 있었다. 수희는 옆에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는 주형을 쳐다봤다. 무릎을 접어 가슴에 가져다 댄 주형은 고기반찬만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수희는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관심이 불편했다.
“엄마, 주형이는 고기만 먹는데요?”
“주형이는 주형이고, 너는 너잖아.”
애란은 멸치볶음을 수희의 하얀 쌀밥 위에 올려 주었다.
“어서 먹어. 이거 먹고 시금치 먹자.”
마치 인형 놀이를 하듯 애란은 수희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들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은 수희가 숟가락으로 밥을 푹 퍼 입에 넣었다. 눈칫밥을 먹어서인지 수희는 밥을 반도 먹지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수희가 일어서자 애란이 수희의 밥그릇을 확인했다. 밥을 다 먹지 않았지만, 오히려 애란은 더욱 밝게 웃었다.
“그래, 들어가서 내일 오디션 준비해. 대사 다 외웠는지 엄마가 체크할 거야.”
방으로 들어가려던 수희가 돌아서서 애란에게 물었다.
“엄마, 오늘은 책 읽으면 안 돼요? 대사는 아침에 일어나서 볼게요.”
탕. 거칠게 숟가락을 내려놓는 애란 때문에 수희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애란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수희가 방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대사 외울게요.”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을 푼 애란이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그래. 들어가서 외우고 있어. 엄마도 치우고 갈 테니까.”
“……네.”
방으로 들어온 수희는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책상에 앉은 수희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에 눈이 갔지만 어쩔 수 없이 대본을 펼쳤다. 지금까지 오디션을 본 건 세 번이었지만, 한 번도 배역을 지정받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애란은 수희를 배우로 데뷔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애란은 한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연극배우였지만, 수희를 임신하고 그 좋아하던 일도 그만두어야 했다. 애란은 자신의 재능과 외모를 물려받은 수희가 배우로 성공할 거라 장담하고 있었다. 대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던 수희는 방문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치를 보다 책상 서랍에서 편지지를 한 장 꺼냈다. 연필을 쥔 수희가 힘을 줘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썼다. [To. 승조 오빠에게] 무슨 이야기를 쓸까, 연필 뒷부분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던 수희가 씩 웃었다. 하얀 편지지는 금세 글자로 가득 찼다. [오빠, 나 내일 오디션 보러 가. 사실 나는 이 역할 별로 안 하고 싶었거든. 근데 엄마가 좋아하는 감독님 작품이라고 꼭 배역 따내라고 했어. 그래서 좀 부담스러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역할 하고 싶은데. 나중에 커서도 엄마가 마음대로 역할 정하면 어떡하지? 난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잘 못해. 가끔은 이런 내가 바보 같기도 해. 오늘 너무 우울한 이야기만 한 것 같네. 오빠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나 드디어 휴대폰 생겼다? 010-XX92-6794 여기로 문자 보내. 기다릴게! From. 수희가] 연필을 내려놓은 수희는 편지 봉투에 편지를 넣고 물풀로 입구를 봉했다. 이사를 오고 난 뒤 승조에게 여러 번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편지의 겉면에 주소를 적고 있을 때, 노크도 없이 방 안으로 애란이 들어왔다. 흠칫 놀란 수희가 애란을 보는데, 애란이 싱긋 웃으며 수희 옆에 앉았다.
“또 승조한테 편지 보내니?”
“네. 죄송해요. 이제 다 했으니까 대본 볼게요.”
수희가 편지를 서랍장 안에 넣어 두려는데, 애란이 편지 끝을 붙잡았다.
“엄마가 보내 줄게. 계속 엄마가 보내 주고 있었잖아.”
“이건 내일 학교 갔다가 집에 올 때 내가 보내려고 했는데.”
“학교 갔다가 오디션 보러 가야 하잖아. 너 학교 갔을 때 엄마가 보낼게.”
애란이 편지를 당기자 수희의 손안에서 편지가 빠져나갔다.
“어서 대본 읽어. 엄마 빨래 널고 올 테니까.”
애란은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수희의 방을 나왔다.
“엄마, 엄마. 이거 봐라? 이거 내가 그린 거다?”
“엄마 나중에 볼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형이 애란에게 스케치북을 보여 줬지만, 애란은 스케치북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애란은 문을 잠그고 수희가 쓴 편지를 뜯어보았다. 안에 적힌 편지를 읽던 애란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화를 눌러 참은 탓인지 얼굴 근육들이 일제히 덜덜 떨렸다.
“이게 다 너를 위한 일인데…….”
감히 이따위 생각을 해? 손안에 쥐고 있던 편지를 애란은 갈기갈기 찢어 냈다. 그리고 내용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만큼 잘게 찢어 낸 편지를 휴지통 안에 집어넣었다.
“어린 게 벌써 연애질이나 하려고.”
친구는 수희의 연기 생활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언제 해이해져 연기를 그만둔다고 할지도 몰랐다. 아직 이룬 거 하나 없는 수희에게 친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었다. 그건 배우로 성공하고 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내가 널 꼭 배우로 성공시킬 거야.”
나처럼, 나보다 더 멋진 배우로.
*** 오디션장을 나오자 애란이 수희를 데리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애란이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연기는 잘했지?”
“…….”
수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먹었던 김밥이 잘못된 건지 속이 좋지 않아 제대로 연기를 펼칠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수희는 고개만 끄덕였다. 애란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수희를 안아 주었다.
“분명히 네가 될 거야. 오늘 저녁에 합격자 발표한다니까, 집에 케이크 사서 가자.”
틀림없이 수희가 합격할 거라 애란은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수희는 덜컥 겁이 났다.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날에는 늘 애란은 저기압 상태를 유지했다. 더불어 수희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는 날에는 가차 없이 처벌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오늘 저녁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엄마, 나 그럼 친구 좀 만나고 와도 돼?”
“친구? 친구 누구?”
승조를 만나러 부산에 간다고 하면 애란은 분명 말릴 것이다. 하지만 수희는 오늘만이라도 애란의 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애란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나 영주 만나고 올게.”
수희는 반 아이 중 한 명의 이름을 댔다. 애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희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갔다 올게.”
“그래, 늦지 않게 와.”
처음으로 애란에게 거짓말을 한 수희의 가슴은 돌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오늘 애란에게 혼나지 않으려면 잡히지 않을 만큼 멀리 도망쳐야 했다. 수희는 그길로 시외버스 터미널을 찾았다. 혼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수희는 피어나는 설렘을 지울 수 없었다. 승조를 만나는 건 무려 1년 만이었다. 그동안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승조에게는 답장 한 번 오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는 건지 승조의 안부가 궁금했다. 곧 버스가 출발하려는 건지 운전석에 기사가 앉았다. 수희가 안전띠를 매려는데 버스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그리고 헐거워진 수희의 손안에서 안전띠가 스르르 빠져나갔다.
“일어서, 어서.”
어느샌가 다가온 애란이 수희를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마른침을 연달아 삼킨 수희는 다리를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낮게 목소리를 내리깐 애란이 먼저 버스에서 내리고, 수희가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애란은 말도 없이 먼저 휘적휘적 걸어갔고, 수희는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터미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애란은 우뚝 멈춰 섰다. 수희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애란의 뒷모습을 눈으로 흘겼다.
“엄마 속이니까 좋아?”
수희를 보고 돌아선 애란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영주가 부산에 있니?”
“엄마…… 죄송해요.”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귓전을 울리는 외침에 수희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해.”
강요에 가까운 애란의 말에 수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오수희.”
경고하듯 수희의 이름을 힘주어 불렀다. 동그란 눈물방울이 볼 위로 도르르 도르르 떨어져 내렸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꼼지락거리던 수희가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말했다.
“엄마, 나 친구들 보고 싶어. 부산 다시 가면 안 돼?”
“수희야. 그 친구들이 네 연기 인생에 도움이 돼?”
“…….”
“다 잊어. 너한테 필요 없는 것들이잖아.”
필요 없지 않았다. 기쁨, 슬픔, 행복. 감정을 가르쳐 준 게 친구들이었다.
“……싫어.”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느꼈던 중압감과 압박감을 더는 이기지 못해서 한 반항이었다.
“나 부산 갈래. 친구들 만날래.”
화가 잔뜩 났던 애란의 얼굴에서 일순 모든 감정이 한 톨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실랑이가 오고 갈 줄 알았던 수희는 애란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친구들 만나.”
수희가 기뻐하기도 전에 애란이 덧붙였다.
“대신 엄마는 버려.”
뜻을 이해하지 못한 수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애란을 바라봤다.
“친구가 좋으면 친구랑 살라고, 엄마가 아니라.”
“……엄마.”
수희가 울먹거리자 애란이 등을 돌렸다.
“부산 가. 그리고 집에 오지 마. 와도 문 안 열어 줄 테니까.”
다른 아이들이라면 엄마가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하는 말인 줄 알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보란 듯 버스에 올라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애란은 아니었다. 없는 말을 뱉어 낼 사람이 아니었기에, 수희는 덜컥 겁부터 났다. 엄마에게 버려질까 봐. 수희는 멀어져 가는 애란을 붙잡기 위해 달려갔다.
“엄마!”
그러면 그럴수록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애란이 거리를 벌리자 수희는 마음이 급해졌다. 달려가던 수희는 돌부리에 걸려 바닥에 엎어졌다. 무릎이 갈려 피가 철철 나는데도 수희는 다시 일어서 애란에게 달려갔다. 멀리서 걸어가던 애란이 걸음을 멈추자, 수희가 제대로 숨 한 번 뱉지 않고 뛰었다. 애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수희가 두 팔을 펼쳐 애란을 껴안았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안 그럴게. 부산 안 갈게.”
애란은 그제야 수희에게 돌아서 쪼그려 앉았다. 젖은 수희의 뺨을 닦아 주며 애란은 냉정히 일러두었다.
“운다고 해서 너한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울지 마.”
억지로 눈물을 잠재우려 수희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는 울음을 꿀떡 삼켰다. 애란은 눈물을 참는 수희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수희야.”
포기와 절망도 네가 알아야 할 감정이야. 분명 네 연기에 도움이 될 거야. 수희 너는 내가 최고로 만들 테니까. *** 그렇게 소중하게 빛나던 추억들은 수희의 무의식 그 깊숙한 곳으로 꺼져 버리고 말았다. 매일같이 수희의 추억들을 모욕하고 짓밟는 애란 때문이었다. 스물여섯, 애란은 자신의 바람대로 수희를 최고의 배우로 만들었다. 수없이 봤던 오디션을 더 이상은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본가로 오라는 애란의 전화를 받고 찾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은 수희는 어둠으로 가득 찬 집을 밝히기 위해 거실 불을 켰다. 그러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 안 거실에 애란이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애란의 주변에는 유리 파편과 가전제품들이 부서져 널려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로 얼룩진 애란의 얼굴이 보였다.
“연기 그만둬.”
“…….”
“엄마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배우 오수희를 만들었던 그때처럼, 배우 오수희를 죽이려는 것도 애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