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게 (19/118)


19.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게
2022.04.05.


16551840243251.jpg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던 수희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이제 겨우 8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쩌면 애란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아직도 눈앞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애란의 모습이 선명했다.

한 달 동안은 눈을 감아도 떠도 피로 물든 애란의 곁이 떠올라 잠을 잘 수도 없었다.

16551840243259.jpg

“내가 연기를 그만뒀더라면, 그날 엄마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그날 이후, 수희는 죄책감이라는 칼을 가지고 자신을 찔렀다.

16551840243259.jpg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연기를 증오했어요.”

16551840243274.jpg

“…….”

16551840243259.jpg

“배우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더라면 엄마는 내게 더 좋은 엄마가 됐을 테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다. 내게 연기가 아주 작고 보잘것없었다면 어땠을까.

정말 엄마의 꿈이기만 했더라면 기다렸다는 듯 그만뒀을 것이다.

16551840243259.jpg

“아주 잠깐은 엄마가 유언처럼 남긴 마지막 말 때문이라도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포기가 안 돼요.”

몸의 일부였더라면 차라리 도려냈을 거다.

하나 그건 그녀의 존재 자체와도 같아 뺄 수도, 더할 수도 없었다.

16551840243259.jpg

“제 삶의 반 이상을 함께한 연기를 너무 사랑했거든요.”

태어나서 가장 사랑했고, 지금까지도 사랑하는 것.

그게 연기였다.

긴 이야기 내내 승조는 계속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고 깊은 바다를 응시하고 있던 수희가 승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16551840243259.jpg

“엄마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도 말이에요.”

쓸쓸함이 담긴 미소가 수희의 입가에 파도처럼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검고 검은 바다처럼 수희의 마음은 이미 까맣게 타 버리고 재밖에 남지 않았다.

16551840243259.jpg

“그래서 벌을 받고 있나 봐요. 대본을 읽을 수 없게 돼 버렸거든요.”

16551840243274.jpg

“…….”

16551840243259.jpg

“대본에 적힌 글자만 봐도 속이 뒤집히고, 대사를 읽으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복귀를 할 수 있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척 단단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끝냈다.

16551840243259.jpg

“이게 제가 은퇴하려는 이유예요.”

긴 이야기를 끝냈는데도 승조는 수희를 지그시 바라만 봤다.

네 탓이 아니다, 많이 힘들었겠다, 어머니 일은 안됐다.

그 흔하디흔한 말 중 최대한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골라 해줄 줄 알았다.

먼저 승조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수희가 모래사장으로 고개를 떨궜다.

16551840243259.jpg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나요? 괜히 대표님까지 우울하게 만든 것 같네요.”

내내 수희를 바라보기만 하던 승조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냈다.

16551840243274.jpg

“이런 이야기, 다른 사람한테 해 본 적 있습니까?”

16551840243259.jpg

“병원에서 했죠. 상담받았을 때.”

16551840243274.jpg

“그거 말고, 주변 사람한테 한 적 있습니까?”

동생인 주형에게도 못 한 말들이었다. 친오빠나 다름없는 철용에게도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저어 내는 수희에게 다시 한번 물음이 더해졌다.

16551840243274.jpg

“그럼 제대로 울어 본 적은.”

이번에도 아니었다.

16551840243274.jpg

“편히 마음 아파한 적은 있습니까?”

애란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것 자체가 사치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게 자신이니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16551840243259.jpg

“내가 과연 아파할 자격이나 있을까요?”

16551840243274.jpg

“오수희 씨.”

보닛에 걸터앉아 있던 승조가 일어서 수희에게 몸을 틀었다.

16551840243274.jpg

“자기 마음을 그렇게 재단하면서 아프고 슬퍼할 필요 없습니다.”

16551840243259.jpg

“…….”

16551840243274.jpg

“누구도 그러길 바라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사람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건 당연한 건데, 너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가슴이 답답할 만큼 조여 왔다.

16551840243259.jpg

“대표님은 모르시잖아요. 감히 그럴 수 없을 만큼, 그 일이 저한테 얼마나 컸는지.”

16551840243274.jpg

“모르니까 하는 말입니다.”

승조를 외면하고 있던 수희가 그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16551840243274.jpg

“오수희 씨 말대로, 단편적인 말만 듣고 하는 말이에요.”

16551840243259.jpg

“…….”

16551840243274.jpg

“그래서 거만하고 오만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닷바람이 두 사람을 휘감았다.

16551840243274.jpg

“내 눈에는 오수희 씨가 죽을 만큼 힘들어 보여서.”

찌푸려 들었던 승조의 미간 사이가 한순간에 풀어졌다.

16551840243274.jpg

“오수희 씨 어머니에 대한 애도보다, 오수희 씨에 대한 연민이 먼저 드는 겁니다.”

16551840243259.jpg

“…….”

16551840243274.jpg

“내 앞에 있는 건 오수희 씨, 당신이니까.”

뭔데 이렇게 가슴이 뻐근하게 아픈 걸까.

뭔데 이렇게 이 남자 한 마디 한 마디에 눈가가 저릿해지는 걸까.

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 사람의 말이 진심이 담긴 위로같이 느껴질까.

16551840243259.jpg

“……아.”

신음과도 같은 토막 난 숨을 내쉰 수희가 손을 뻗어 내어 뺨을 쓸었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건 투명한 물기였다.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질 리 없었다.

후드득 흘러내리는 건 자신의 눈가에서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16551840243259.jpg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리는데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연기할 때 말고는, 누군가의 앞에서 울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어렸을 적, 애란 앞에서 눈물을 보일 때마다 꾸지람을 듣고 자랐다.

그 이후 눈물을 보이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 행동과도 같았다.

그래서 애란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다.

16551840243259.jpg

“죄송해요.”

눈물을 보인 게 잘못한 일도 아닌데 수희는 승조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빨리 눈물을 훔친 수희가 나오려는 울음을 참아 내려 안간힘을 썼다.

16551840243259.jpg

“이러고 싶지 않은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는 수희의 모습에 승조가 손을 들어 올렸다.

수희의 흔들리는 어깨를 붙잡아 돌리고 싶었다.

애처롭게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가 해 주고 싶었던 건 수희를 안아 주는 것이었다.

그녀가 따뜻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힘껏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바라만 보는 것뿐이었다.

결국 공중에 들어 올렸던 손이 아래로 꺼졌다.

승조는 재킷 안에 있던 남색 손수건을 꺼내 수희에게 건넸다.

16551840243274.jpg

“써요.”

수희는 승조를 돌아보지 않고 손만 뻗어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코를 훌쩍거리던 수희는 손수건을 펼쳐 코를 틀어막았다.

크으응. 대뜸 코끼리 한 마리가 등장하자 승조의 눈이 커졌다.

태연하게 수희가 손수건을 접어 코끝을 꾹꾹 찍어 눌렀다.

16551840243259.jpg

“빨아서 드릴게요.”

승조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어 저어 냈다.

16551840243274.jpg

“아뇨, 버려요.”

고개를 획 돌린 수희가 빨개진 눈으로 승조를 장난스럽게 쏘아보았다.

16551840243259.jpg

“제가 코 좀 풀어서 더럽다고 그런 거죠?”

16551840243274.jpg

“말은 정확히 해야죠. 코를 좀 푼 게 아니라 많이 풀었습니다.”

16551840243259.jpg

“하하.”

쓸데없이 정확한 승조의 말 때문에 수희가 소리를 내 웃음을 터트렸다.

급하게 웃음을 정리한 수희가 중얼거렸다.

16551840243259.jpg

“아, 울다가 웃으면 안 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꽉 막혀 있는 듯했던 숨을 터트리며 수희가 하늘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커다란 손톱달이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16551840243259.jpg

“털어놓고 나니까 좀 나은 것 같네요.”

승조가 턱 끝을 들어 올려 수희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16551840243274.jpg

“다행이네요, 나아져서.”

누군가 한 입 베어 문 듯 보이는 노란 달 위로 애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수희의 코가 시큰거리며 빨개졌다.

16551840243259.jpg

‘엄마, 나 약속 못 지킬 거 같아. 난 아직 배우 일이 너무 좋거든.’

어쩌면 그녀에게 내려진 저주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엄마가 자신을 조금만 미워해 주길, 그렇게 바랐다.

16551840243259.jpg

“그러고 보니까 고맙다는 말을 못 했네요.”

내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수희가 승조에게 말했다.

16551840243259.jpg

“고마워요, 내 이야기 들어 줘서.”

밤공기가 흐르는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이 부딪쳤다.

이윽고 수희의 두 눈이 고요히 커졌다.

16551840357978.jpg

 
뺨에 승조의 손이 닿았기 때문이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전에 승조의 엄지에 닿았다.

뺨에 닿은 손은 조심스러웠고, 눈물을 닦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수희는 승조의 손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16551840243274.jpg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걸까. 너에게 닿는 거.’

너에게 차라리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상처가 곪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네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 중에 네 진심을 털어놓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그동안 넌 어떤 아픔 속에서 살아갔던 걸까.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닌,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승조가 눈물을 닦아 낸 손을 거두자, 수희가 괜스레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문질렀다.

16551840243259.jpg

“한승조 대표님은 참 아이러니해요.”

16551840243274.jpg

“어떤 점이 아이러니한데요.”

두 손으로 보닛을 짚은 수희가 승조를 올려다봤다.

16551840243259.jpg

“어쩔 땐 매정할 정도로 냉정하다가, 어떨 땐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니까요.”

16551840243274.jpg

“…….”

16551840243259.jpg

“하나만 하셨으면 좋겠어요. 가끔 혼란스럽거든요.”

승조가 피식하고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거친 파도 소리에 웃음소리가 묻힐 만도 하건만, 귓가에 닿는 승조의 웃음소리는 또렷했다.

희미하게 번진 미소를 유지한 채 그가 말했다.

16551840243274.jpg

“원한다면 하나만 하겠습니다.”

16551840243259.jpg

“…….”

16551840243274.jpg

“이왕이면 눈물 날 만큼 다정한 쪽으로.”

뭔데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 줄까.

괜히 설레게.

까만 하늘에 까만 바다까지. 온통 까맣게 번진 세상에 선 자신이 외롭지 않았다.

이 모든 게 한승조 때문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위로다운 위로를 받아 본 건 처음이어서인 걸까.

16551840243259.jpg

“솔직히 처음에는 대표님이 제 이야기를 듣고 절 모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16551840243274.jpg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16551840243259.jpg

“제가 배우 일을 포기했더라면 엄마가 그렇게 떠나진 않았을 테니까요.”

16551840243274.jpg

“난 오수희 씨가 기특합니다.”

수희의 아랫입술이 움찔하고 떨렸다.

16551840243274.jpg

“그런 일을 겪고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 줘서.”

사람은 때때로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답을 발견하곤 한다.

수희가 한승조라는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을 줄 몰랐던 것처럼.

16551840243259.jpg

“그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어요.”

꺼내는 말이 살짝 떨렸던 것도 같다.

애란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수희는 혼자서 작은 행성에 살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도 곁에 없는 행성에서 스스로를 깎아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손톱만큼 남아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게 되었을 때, 고통에 잠긴 그녀를 위로해 주러 찾아온 유일한 사람 같았다.

16551840243274.jpg

“오수희 씨를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나처럼 말했을 겁니다.”

16551840243259.jpg

“…….”

16551840243274.jpg

“모든 게 당신 탓이 아니라고, 일어난 일의 전부를 당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은 왜 내게 이런 기분을 선사해 주는 걸까.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내 편에 서 있는 걸까.

16551840243259.jpg

“며칠 전만 해도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수희가 후련하게 미소 지었다.

16551840243259.jpg

“대표님 덕분에요.”

왠지 그런 날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은 날.

그날이 오늘이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진대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16551840243274.jpg

“꼭 고백처럼 들립니다.”

초승달을 닮은 승조의 입매가 휘어졌다.

16551840243274.jpg

“가끔 혼란스럽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오수희 씨 같네요.”

조금 이상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색으로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연분홍과 많이 닮았을 것이다.

***

찰칵, 찰칵.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 안에 정지된 장면으로 담겼다.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는 움직임이 이어질 때마다 연달아 셔터를 눌렀다.

사각형 화면 안에 담긴 피사체는 수희와 승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