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오수희는 열애 중?
(20/118)
20. 오수희는 열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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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오수희는 열애 중?
2022.04.09.
“꼭 고백처럼 들립니다.”
“…….”
“가끔 혼란스럽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오수희 씨 같네요.”
승조와 마주친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수희는 방금 자신이 했던 낯간지러운 말들을 떠올렸다.
대표님 덕분에 살 것 같다니.
한결 편해진 분위기에 생각만 하고 있던 걸 입으로 그대로 뱉고 말았다.
당황한 수희가 잔뜩 굳어져서는 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전 단지 대표님께서 해 주신 말이 가슴 깊이 와닿아서 한 말이에요. 고백이 아니라요.”
“농담이었는데 꽤 진지하게 답을 하네요.”
말렸다. 완전히 말렸다.
수희의 눈썹 끝이 움찔거렸다.
“농담을 꼭 진담 같은 표정으로 하니까요.”
“내가 원래 표정이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곧잘 웃던데. 그것도 아주 예쁘게.
내 앞이라서 잘 웃는 걸까, 아니면 오늘 기분이 좋았던 걸까.
물어볼 틈도 없이 그가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집으로 가죠. 시간도 늦었으니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다지 오래 대화를 나눈 것 같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승조가 두 시간이 넘도록 수희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어 준 것이다.
고맙다는 말은 아까 했기에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수희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승조가 안전띠를 매며 물었다.
“배는 안 고픕니까? 저녁도 안 먹었는데.”
“오늘은 밥 생각 없어서요. 괜찮아요.”
아침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이지만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먹은 것도 없이 약을 먹은 탓에 속이 쓰라리긴 했지만,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승조의 차가 바닷가와 점점 멀어지더니, 매끈한 도로 위를 달렸다.
수희는 제 쪽에 있는 도어 트림 버튼으로 창문을 반쯤 내렸다.
그리고 빠르게 흘러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꺼풀을 닫았다.
바닷가와는 멀어진 지 오래인데 바람결 끝엔 미미한 소금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애란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매일같이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기분으로 살았다.
무엇으로 메꿔야 할지, 어떻게 메꿔야 할지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는 스스로의 마음 하나 보살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승조에게 모든 걸 털어놓은 후, 처음으로 그녀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많이 아팠고, 힘들고, 슬퍼했다.
그 속에서 견뎌 내는 방법은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잘못됐고, 결국에는 마음의 병을 키우는 꼴이 되어 버렸다.
가끔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아픔은 외면할 줄도 알아야 했다.
자신을 죽여 가며 모든 걸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차는 뻥 뚫린 도로 위를 막힘없이 내달렸다.
달리는 차의 창문을 내린 수희가 손을 내밀었다.
“좋다.”
날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곁에 있어 줄 것이다.
두려워할 거 없었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자신에게 말했다.
***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는 승조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라졌다.
차 안에서 승조를 기다리고 있던 수희는 핸드백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주형이
주형에게서 온 전화에 수희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주형아.”
[누나 진짜 임신한 거 아니지?]
다짜고짜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주형의 말투는 비아냥조와 비슷했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수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됐고.]
연락해 온 걸 보니 오늘 있었던 <침수> 인터뷰 기사를 본 듯했다.
“왜? 누나 걱정했어?”
[누나 임신하면 일 못 하잖아. 그리고 애 낳으면 지금처럼 돈 못 벌 거고. 애까지 있는 유부녀가 드라마 주연으로 나오면 몰입이 안 되잖아.]
모난 말들이 수희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뱉어 냈다.
“넌 누나가 걱정돼서가 아니라, 누나가 돈 못 벌까 봐 걱정된 거야?”
[겸사겸사지.]
“내가 돈 못 벌면 네 용돈 줄 사람 없어질까 봐 그런 건 아니고?”
[뭘 또 말을 그렇게 해?]
까칠한 주형의 목소리 너머로 깔깔거리는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더는 기분 상하고 싶지 않아 수희가 주제를 바꿨다.
“시끄럽네. 어디야?”
[친구들이랑 놀러 왔어.]
“어디로?”
[제주도.]
주형은 수희가 물어야만 답을 해 줬다.
그것도 단답형이었지만, 수희는 그걸로 만족했다.
처음부터 남매 사이가 서먹했던 건 아니었다.
애란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족의 형태를 띠며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후에 충격을 받은 주형은 한동안 수희와 말도 섞지 않았다.
어쩌면 남보다 못한 사이일지라도 수희는 가족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재미있게 놀아, 술 적당히 마시고.”
[또 잔소리. 끊는다.]
언제나 그렇듯 주형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마침 승조가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게 보여 수희는 전화를 끊었다.
거실에서 통화를 마친 주형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바닥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물었다.
“야, 네 누나 진짜 임신한 거 아니래?”
“우리한테만 말해 줘. 우리만 알고 절대 말 안 할게. 가족들한테도.”
친구들 옆에 털썩 앉은 주형은 방금까지만 해도 굳어 있던 얼굴을 활짝 폈다.
“임신한 거 아니란다.”
“진짜?”
“어. 누나가 나한테까지 숨기겠냐?”
주형이 맥주가 반쯤 남은 잔을 들어 올렸다.
“한잔하자.”
“너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인다? 오늘 누나 기사 보고 충격받은 것 같더니.”
“크크큭. 오주형 겁나 웃겨, 누나랑 사이 안 좋다더니. 개구라였어.”
무섭게 주형이 얼굴을 구겼지만, 친구들은 그 표정조차 놀림거리로 만들었다.
“이것들이 그만 안 해?”
주형이 양옆에 있는 친구들의 머리를 팔에 끼고 흔들어 댔다.
그때 주형의 맞은편에서 조용히 술을 홀짝이던 석진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근데 너한테도 구라 친 거 아냐?”
석진의 한마디에 모두 입을 다물고 주형의 눈치를 봤다.
주형은 친구의 목을 붙잡고 있던 팔을 풀며 물었다.
“이석진, 너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야?”
매서운 주형의 눈빛에 오히려 석진은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게 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줄 석진은 알고 있는 듯했다.
“아니, 그렇잖아. 증거 다 나왔는데 아니라고 하니까.”
“…….”
“속아 넘어가는 네가 좀 불쌍해서 그러지.”
듣다못해 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우리 누나 이제까지 나한테 거짓말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친구들이 다급하게 주형을 말렸다.
“야, 야. 앉아서 이야기해.”
“그래, 주형아. 진정하고 앉아.”
“이거 놔.”
주형은 손을 붙잡는 친구들을 뿌리치고 방을 나갔다.
한순간에 싸늘해진 방 분위기에 친구들은 석진을 나무랐다.
“이석진, 너는 또 왜 주형이 성질을 긁고 그러냐.”
방을 나간 주형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석진은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알 게 뭐야. 복에 겨운 새끼.”
***
차가 지하 주차장에 세워지자 수희가 안전띠를 풀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짧게 고개를 숙인 수희가 조수석 문을 여는데, 무슨 일인지 승조가 따라서 내렸다.
승조는 차 뒷좌석에 놔뒀던 흰 종이 가방을 챙겨 수희에게 다가왔다.
“가서 이거 먹어요.”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종이 가방에 죽 브랜드 로고가 크게 박혀 있었다.
갑자기 죽을 내미는 승조가 의아해 수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죽은 왜요?”
“빈속에 자지 말고, 들어가서 간단하게라도 먹어요.”
내미는 손이 민망할 것 같아 수희는 일단 받아는 들었다.
마치 ‘오다 주웠다’처럼 승조는 불필요한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죽을 든 수희를 두고 승조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출구로 바퀴를 돌린 승조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수희가 돌아섰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집까지 올라간 수희는 주방에 불을 켰다.
그러고는 하얀 전등 아래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승조가 준 죽을 올려 두고 앉았다.
조용한 거실에 바스락대며 포장된 죽을 꺼내는 소리가 잔잔히 깔렸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죽을 보니 그대로 차가운 냉장고 안에 넣어 둘 수 없었다.
아직 뜨끈한 열기를 머금은 죽을 숟가락 끝으로 긁었다.
한 입 입에 넣은 수희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몇 숟가락 더 퍼먹었다.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은 생각으로 복잡했다.
“잠시 어디 갔다 온다더니 죽 사러 간 거였나 보네.”
오전에 있었던 인터뷰로 아무것도 챙겨 먹지 못했을 것 같아 끼니를 때울 걸 사온 듯했다.
종일 빈속에다 저녁도 늦었으니 소화가 잘되는 죽을 선택했던 거고.
무심하게 던져 준 것치고는 죽 하나에 배려가 듬뿍 담겨 있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줄 줄 알았다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을 것이다.
“저녁 안 먹은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왜 괜히 잘해 줘서 자꾸 신경 쓰이게 해.
이렇게 머릿속을 어지럽힐 줄 알았더라면 악랄하고 못되게 굴어 달라고 할 걸 그랬다.
눈물 날 만큼 다정한 거 말고.
***
시간이 늦었는데도 불구하고 승조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그는 수희가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벌을 받고 있나 봐요. 대본을 읽을 수 없게 돼 버렸거든요.”
복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본을 읽을 수 없어 못 한 것이었다.
그래서 파리에서 김시운 작가의 작품에 관해 물었을 때 전혀 다른 평을 꺼내 놓은 것이었다.
깊어져 버린 마음의 병이 하루아침에 낫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승조 역시 폐소 공포증을 이겨 내는 데 오래 걸렸고, 아직 증상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완치를 기다리며 복귀를 늦출 수는 없었다.
기정사실로 변하고 있는 수희의 임신 스캔들도 복귀에 따라 판도가 바뀔 수 있었다.
어둠이 자리 잡은 서재에 오랫동안 앉아 있던 승조가 휴대폰을 들었다.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가져다 대자 곧장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대표님.]
늦은 시각이어서인지 차 비서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막 잠에서 깼거나, 이제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신경 썼다면 이 시간에 차 비서를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 비서가 지금 바로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새벽 1시에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뭘까요, 대표님.]
“오수희 씨한테 보내 줬던 대본들, 1회분씩만 메일로 보내 줘.”
수희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아차린 차 비서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수희 씨가 저희 제작사랑 같이 일하기로 한 겁니까?]
“아직 정해진 건 없어.”
[그럼 오늘 오수희 씨랑 만나 보시고 뭔가 진전된 이야기라도 나누신 겁니까?]
“그게 업무랑 관련이 있나?”
끈질긴 차 비서의 물음에 승조는 슬슬 짜증이 몰려왔다.
‘업무 시간도 아닌데 전화하셨으면서, 업무랑 관련 없는 것 좀 물으면 어때.’
라고 솔직히 말하고 싶은 차 비서였지만, 그러기에는 높은 연봉을 포기할 깡이 없었다.
[방금 메일로 대본 보내 드렸습니다.]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는데 차 비서가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가볍게 입을 놀리는 게 특기였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확실했다.
메일함에 들어온 차 비서의 새 메일을 확인한 승조가 귓전에서 휴대폰을 떼어 냈다.
“수고했어. 내일 봐.”
[새벽 1시라 오늘인…….]
전화를 끊어 버린 승조 때문에 굳이 사실을 집어내려던 차 비서의 말이 반 토막 났다.
세 개의 대본을 전부 내려받은 승조가 책상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손이 멈추고, 승조가 의자에 기댔던 허리를 세웠다.
……수희를 복귀시킬 방법이 떠올랐다.
***
어제, 수희의 임신 스캔들이 연예 뉴스를 장악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9시가 되자 새로운 기사가 임신 스캔들의 헤드라인을 밀어냈다.
[[단독] “우리 사랑에 빠졌어요.” …… 배우 오수희는 열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