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만납니다, 오수희 씨랑
(22/118)
22. 만납니다, 오수희 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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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만납니다, 오수희 씨랑
2022.04.16.
“열애설 인정하면 더 좋고.”
아직 잠이 덜 깼을 리도 없는데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수희가 되물었다.
“열애설을 인정해요?”
“올해 경제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7위에 꼽힐 만큼 대단한 인물이야. 돈 잘 벌어, 나쁜 소문 없어, 외모는 외모대로 또 좋잖아.”
“…….”
“한 대표만큼 괜찮은 사람 찾기 힘들지. 아직 네 나이에 열애설이 이른 것도 아니니 인정해도 나쁘지 않아.”
한국말이 분명한데 말의 의미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대화가 자꾸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왜 열애설을 인정해야 해요?”
그건 최 사장도 마찬가지인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정말 너랑 한 대표, 사귀는 거 아냐?”
이미 전후 상황 다 들어 놓고도 최 사장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작게 탄식한 수희가 이젠 억울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사귀는 사이 아니에요. 한승조 대표님이랑은 정말 파리 일 때문에 본 거였어요.”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저녁도 먹고, 바닷가도 가고, 집에도 데려다주고?”
최 사장이 오전에 철용이 했던 말을 복사해 물었다.
누가 보아도 오해하기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수희도 그다지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 승조와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아무 사이도 아니다?”
“네.”
수희의 대답을 몇 번이나 확인하던 최 사장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나는 네가 한 대표랑 만나길 바랐는데.”
당연히 자신의 소속사 연예인의 열애설이 달갑지 않을 줄 알았다.
한데 어째서인지 최 사장은 굉장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한 대표랑 열애설이 난 덕분에 네 임신설에 관련된 기사가 전부 내려갔어. 사람들이 전부 네 열애설에만 신경 쓰고 있다고.”
열애설을 ‘실’이 아닌 ‘득’으로 보는 건지 최 사장은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라고 말했다.
중간에 낀 철용은 수희와 최 사장의 눈치만 보고 앉아 있었다.
“오히려 한승조 대표님이랑 임신으로 엮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수희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철용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최 사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검지로 수희를 가리켰다.
“어제 커뮤니티에 산부인과에서 찍힌 사진 올라온 거 있지?”
“네.”
“그 사진에 찍힌 사람이 자기라고, 한 일반인이 글을 올렸어. 그 시간대에 결제했던 산부인과 영수증이랑 옷이랑 같이. 그 글이 올라온 지 얼마 안 돼서 익명 글은 지워졌고.”
<침수> 인터뷰에서 자신을 패닉으로 만들었던 커뮤니티 글이 사라졌다는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번 떠돈 소문은 잘 꺼지지 않는 불씨 같아서 금방이라도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었다.
“열애설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 또 네 임신설이 떠돌지 모르니까.”
최 사장의 입장에서는 임신 스캔들보다는 열애설이 훨씬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수희를 설득하려는 듯 최 사장이 잔뜩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만큼 적기일 때가 없어. 열애설 인정한 뒤에 바로 복귀 시동 걸면 귀찮게 따라붙던 임신설도 완전히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힐 거라 여겼어.”
그렇다고 어떻게 만나지도 않는 승조와의 열애를 인정할 수 있을까.
그건 승조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임신 스캔들 좀 덮자고 안 하는 연애를 한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하아. 내 마음이 너무 급했어. 인정해.”
젊은 여배우에게 임신만큼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쉬운 단어는 없었다.
게다가 <침수> 인터뷰에서 내내 얼굴이 굳어 있었다며 덩달아 태도까지 문제 삼았다.
다른 배우들이었다면 몸이 좋지 않겠거니 넘어갈 일이었지만 수희에게는 달랐다.
수희의 손짓, 눈짓, 몸짓 하나에 많은 사람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물론 부정적으로.
“사장님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저도 인지하고 있고요.”
“너도 알겠지만, 최대한 빨리 복귀라도 해야 해.”
복귀가 시급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영화 일정도 모두 끝이 났으니 복귀가 아니라면 당분간 활동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다시 소문에 힘이 실릴지도 모른다.
“네가 가지고 있는 대본 중에 마음에 드는 역할 있으면 언제든 말해. 무조건 주연 자리 비워 달라고 할 테니까.”
최 사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희의 자리를 얻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고, 수희 역시 그만큼 인정받고 있는 배우였다.
다만 문제는 수희가 지금 당장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일단 지금 당장은 열애설에 대응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건 동의하지?”
밴 뒷좌석에 앉은 수희는 조금 전 최 사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라면 열애설을 부인해야 했다. 그렇게 하기로 승조에게도 말했으니까.
하나 약속과는 다른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가끔은 시끄러운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었다.
괜히 열애설을 내린다면 사람들은 수희의 다른 점을 물고 뜯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기에 최 사장이 대응하지 않는 걸로 의견을 낸 것이었다.
‘한승조 대표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열애설을 최대한 빨리 내리겠다 장담했는데,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됐으니 당사자에게 알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승조가 일 문제로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
열애설 때문에 최대한 만남은 자제하고 싶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통보하듯 전화로 할 수가 없었다.
수희는 휴대폰을 꺼내 승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어지기에 업무 중인 것 같아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였다.
[여보세요.]
휴대폰 건너편에서 특유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괜찮으니까 말해요.]
“오늘 보기로 한 것 때문에 전화했어요. 시간은 언제가 괜찮아요?”
[7시 이후로 시간이 될 것 같네요.]
“그럼 8시에 보는 걸로 할까요?”
[그렇게 하죠.]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장소였다.
수희와의 스캔들로 이미 승조의 얼굴은 많은 사람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탁 트인 공간에서 만나는 건 당당하게 연애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땅히 만날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던 차였다.
[내 집에서 보죠.]
자연스럽게 제안해 오는 승조 때문에 수희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활활 타오르는 열애설에 기름이라도 붓자는 건가 싶었다.
“만약 기자들한테 들키게 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텐데요?”
[보안이 걱정이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오수희 씨 아파트처럼 기자들이 드나드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승조의 단언에도 수희는 고민하듯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승조가 다른 방안을 제시했다.
[아니면 오수희 씨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 상관없습니다. 생각해 둔 곳이 있습니까?]
당장에 생각나는 곳은 없었다.
어쩌면 기자들을 피해 외부로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승조의 집이 더 안전할지도 모른다.
“아니에요. 대표님 집으로 갈게요.”
덜컹.
수희의 아파트 주차장에 밴을 세우던 철용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상체를 크게 돌린 철용이 휴대폰과 수희를 번갈아 봤다.
“주소 메시지로 보내 주세요.”
수희가 전화를 끊자마자 철용이 뒤로 넘어갈 것처럼 펄쩍 뛰었다.
“너, 지금 한 대표님 만나러 가겠다는 거야?”
“지금 말고 8시에.”
욱, 하고 올라오는 화를 진정시킨 철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8시에 한 대표님 만나러 나가겠다고?”
“응, 오늘 있었던 일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철용 역시 열애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직접 만나서 설명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승조의 집에 혼자 보내려니 영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것 때문이면 내가 가서 설명할게. 굳이 네가 갈 필요는 없잖아.”
“그건 그런데, 대표님이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정 가야겠으면 나도 같이 가.”
철용이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오빠도 같이?”
“어디 남자 집에 혼자 가.”
남자라는 단어가 승조와 어울리지 않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승조를 남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 간헐적으로 승조에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승조를 남자로 느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주한 상황들에 의한 거라고 단정 지었다.
“오빠, 걱정하지 마. 대표님 나한테 남자 아니야.”
“한 대표님이 남자가 아니면, 나는 오징어냐?”
어이없다는 듯 수희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건 무슨 소리야.”
“하여튼 안 돼. 오늘 나랑 같이 가.”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수희가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걸 그대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대표님이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래?”
“당연하지. 너, 남자는 다 믿으면 안 돼.”
남자를 믿은 적은 없었지만, 한승조에게는 무던히 믿음이 가는 편이었다.
그래도 철용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수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같이 가게 7시 30분까지 우리 집으로 와.”
“오케이. 시간 맞춰서 올게.”
합의점을 찾은 수희가 철용과 인사를 마치고 밴에서 내렸다.
***
업무를 보고 있던 승조는 모니터 구석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6시가 지나가자 승조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 두었다.
일을 전부 끝마치고 퇴근한다면 수희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할 듯했다.
하는 수 없이 태블릿을 서류 가방에 챙겨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집무실 문을 두드리고 차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잔뜩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차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잠깐을 기다리기 힘들었던 건지 한병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너 휴대폰은 어디에다 뒀길래 전화를 안 받아?”
병호는 제 아들에게 친근한 인사 대신 날카로운 면박을 던졌다.
하지만 이 정도 호통은 별거 아니라는 듯 승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퇴근 시간입니다. 내일 다시 오시죠.”
“일 때문에 찾아온 거 아니라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대화를 시작하고 끝내는 건 순전히 병호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병호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승조는 차 비서에게 나가라 눈짓했다.
차 비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승조가 옷걸이에 걸어 둔 재킷을 입었다.
“약속 있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해 주세요.”
“너 버릇없이 나한테 명령하는 거냐?”
눈썹을 끌어 올린 승조가 비꼬듯 대꾸했다.
“버릇이 없다뇨. 정말 버릇이 없었다면 연락도 없이 찾아오신 아버지를 마주하고 있겠습니까?”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병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큰 소리를 내려던 병호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너 정말 그 배우랑 만나고 있는 거냐?”
“한 달 만에 아들 보러 와서 하는 말이 그겁니까?”
잘 지냈냐, 밥은 먹었냐. 그 흔하디흔한 말을 놔두고.
하지만 승조는 여전히 변함이 없는 제 아버지에게 실망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승조가 말을 돌리자 병호가 지레짐작하고 소리쳤다.
“내가 딴따라는 안 된다고 했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단지 연애사 때문이라니.
저 관심이 받고 싶어 어렸을 때 별짓을 다 해 본 적이 있었다.
친구와 싸워 본 적도 있었고, 가방 하나 덜렁 들고 가출을 한 적도 있었다.
차라리 질책해 주길 바랐다. 그것도 관심의 한 종류였으니까.
사랑해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했지만, 돌아오는 건 방치뿐이었다.
서른하나가 돼서야 열다섯에 바라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게 우스웠다.
“딴따라라는 말씀을 하실 줄 몰랐습니다. 워낙 상스러운 말이라 들어 볼 기회가 없었는데.”
“한승조!”
버럭 내지르는 화에도 승조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았다.
“그 애가 뭐라고 감싸는 거냐. 정말 만나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간 어디에서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던 아버지라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버린 자식의 연애사에 참견한다는 게.
승조가 피식 웃자 병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한승조, 너…….”
이러니 자꾸만 엇나가고 싶은 거다.
“만납니다, 오수희 씨랑.”
아주 나쁜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