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철용은 오징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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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철용은 오징어가 아니었다
2022.04.23.
“이게 그 방법입니다.”
복귀할 방법이 있다고?
손을 뻗은 수희가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은 뒤 태블릿 화면을 바라봤다.
[안녕, 파트너]
[아직 사랑하고 있다.]
[패밀리]
음성 메모에는 세 개의 파일이 녹음되어 있었다.
낯설지 않은 저장 파일 제목을 훑어본 수희가 가장 위에 있는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신 1. 화성 성곽길.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사이. 한 남자가 누워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남자의 얼굴은 피투성이다.]
수희가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어 내 승조를 바라봤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승조의 것이었고, 그가 낭독하고 있는 것은 대본이었다.
1화분의 내용이 30분가량의 녹음 파일에 담겨 있었다.
<침수> 이후 처음 대본을 접하는 거니 거의 1년 만이었다.
어느새 승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수희가 대본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심장이 온몸에서 뛰어 대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 방법이라면 직접 대본을 읽지 않아도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
수희는 음성 파일 하나가 끝나고 나서야 승조에게 시선을 옮겼다.
승조는 변함없는 자세로 수희가 음성 파일을 전부 들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연기?”
승조의 물음에 수희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감에 가득 부풀어 오른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대사를 뱉을 수 있다는 게,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수희에게는 숨과도 같았다.
들이쉬고 내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해 왔던 일을 이제야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할 수 있어요, 이 방법이면.”
어린아이처럼 수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담겼다.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수희를 보며 승조는 조금의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수희에게 대본을 건넸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수희 씨가 무사히 촬영을 끝낼 수 있도록 서포트하겠습니다.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요.”
물론 수희의 입장에서는 승조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승조가 꺼내 놓은 방안은 그의 시간과 체력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한승조 대표님은 괜찮은 건가요?”
“뭐가 말입니까?”
수희가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매번 이렇게 녹음해 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번거로울 거고, 시간도 걸릴 거고요.”
“봉사해 준다고는 안 했습니다.”
“네?”
“나도 사업갑니다. 대가 없이 오수희 씨한테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당연하게 승조가 자신을 도와줄 거라고 여겼다.
그건 아마 일전에 승조가 팬이라고 말했던 것 때문일 것이다.
민망해진 수희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은 뒤 물었다.
“원하는 게 있으신 건가요?”
“복귀 작품은 우리 제작사와 하는 걸로 하죠.”
그거야 전혀 어려운 조건이 아니었다.
작품을 고를 때 가장 신중하게 따지는 건 제작사보다는 대본이었다.
곧장 대답하려 입술이 벌어졌지만, 승조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열애설 인정하죠.”
이건 좀 생각이 필요했다.
아니, 아주아주 많은 생각이 필요했다.
“굳이 열애설을 인정해야 하나요?”
“서로한테 득이 되는데 인정하지 않을 필요는 없죠.”
저 남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열애설을 인정하자고 하는 건지.
“한승조 대표님한테는 이 열애설이 어떻게 득인 건가요?”
“말했잖습니까. 나한테는 열애설이 필요하다고.”
멋대로 기대한 건 수희였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희가 퉁명스럽게 불만을 토로했다.
“저는 절 위해서 봉사라도 해 주시는 줄 알았네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공이다?”
“공이죠.”
와, 치사해.
눈물 날 만큼 다정하게 굴어 준다더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냉정하네.
“눈으로 욕하는 겁니까? 말로 하는 게 덜 아플 것 같은데요.”
정확하게 집어내자 수희는 쏘아보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네요.”
“결정을 늦추는 건 복귀를 미룰 뿐이라는 거 알아 둬요.”
친절한 어투와 다르게 속에 들어 있는 말은 독촉과도 같았다.
“방금 사채업자 같았던 거 아세요?”
“이렇게 친절한 사채업자도 있습니까?”
“지금 자기 입으로 친절하다고 한 거 맞죠?”
“말투가 비웃는 거처럼 들리네요.”
그렇게 들리라고 말한 건데.
“그건 대표님께서 판단하세요.”
애처럼 약을 올리려던 건 아닌데 인위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울려왔다.
액정을 보니 철용이 걸어 온 전화였다.
펜트하우스로 올라온 지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도통 내려오질 않으니 걱정돼서 전화를 건 듯했다.
철용에게서 온 전화가 끊기자 수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에 수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선 수희가 복도를 나와 현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도어 록의 세로로 길쭉한 손잡이를 잡아당기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 비싼 집에 달린 도어 록이 고장이라도 난 건가 싶어 좀 더 강하게 당겼다.
“당기는 게 아니라 미는 겁니다.”
수희의 손등 위로 승조의 손바닥이 얹어졌다.
따듯하게 수희의 손을 덮은 승조의 손이 부드럽게 손잡이를 밀었다.
요지부동이었던 문이 그제야 덜컥하고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지만, 수희는 그러지 못했다.
하얀 목덜미가 따끔거릴 만큼 진하게 닿는 승조의 시선 때문이었다.
온통 남자의 향기로 가득한 집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나 보다.
가까워진 남자의 온기에 숨을 깊게 들이쉴 만큼 긴장됐다.
수희는 제 손등 위에 얹어진 승조의 손을 바라보다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부진 그의 입매가 시야에 들어찼다.
“하나만 묻죠.”
“…….”
“왜 내가 오수희 씨한테 고백할 리 없다고 확신합니까?”
수희의 손등 위에 있는 승조의 손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 채였다.
“아니면, 나랑 연애하겠습니까?”
“고백일 리는 없고, 지금…… 농담하시는 거예요?”
흘리듯 가볍게 던진 말을 승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걸까.
제 손등에 얹어진 승조의 손바닥의 열기가 델 것처럼 뜨거웠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도어 록 손잡이를 붙잡은 손이 가늘게 떨려 왔다.
움찔하고 수희의 속눈썹이 떨렸다.
“이번에도 농담이죠?”
“농담인지 아닌지는 오수희 씨가 판단해 봐요.”
받은 대로 꼭 갚아 줘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승조는 수희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뭐든 쉽게 넘어가 주지 않는 게 한승조였다.
수희의 손등 위에 있는 승조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당연히 그가 자신에게 고백할 리 없을 거라는 걸 안다.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벌써 좋아하는 감정 같은 게 생겼을 리가 없었다.
분명…… 그럴 리 없는데.
왜 한승조에게서 고작 시선 하나 떼기도 어려울까.
지그시 응시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수희의 두 뺨이 점차 달아올랐다.
“정말 대표님은.”
“나는?”
짓궂다.
그 장난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 가끔은 화가 날 만큼.
결국 말을 잇지 못한 수희가 문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수희가 떠난 집 안엔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 쌓였다.
가만히 수희가 나간 문을 바라보던 승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장난이 심했나.”
그녀의 뒤에 서서 문을 밀어 주고 나서야 손이 닿았다는 걸 알았다.
불필요한 터치였기에 곧바로 손을 떼려 했다.
그러던 와중에 수희의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구름처럼 새하얀 살결이 연분홍색으로 번지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그래서 집을 나가려는 그녀를 붙잡고 농담 섞인 말을 건넸다.
그녀를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만든 게 자신의 탓인 듯 원망 섞인 눈으로 올려다볼 줄은 몰랐다.
아랫입술을 깨문 승조가 현관을 떠나지 못하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내가 뭔가를 크게 잘못한 것 같은데.”
지하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온 수희가 급하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주차되어 있는 철용의 차로 뛰어갔다.
전화를 받지 않는 수희가 걱정됐던 건지 철용은 차 앞에 서 있었다.
“너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미안. 이야기가 좀 길어졌어.”
수희는 철용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곧장 조수석에 올라탔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 수희를 보며 철용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전석으로 온 철용은 벌써 안전띠까지 맨 수희를 살폈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데 왜 그렇게 얼굴이 벌게.”
두 볼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지만, 수희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아닌데. 괜찮은데?”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철용이 캐묻는 걸 포기하고 핸들을 붙잡았다.
“열애설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대응 안 하는 거 승낙하신 거야?”
“…….”
“수희야. 오수희!”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어?”
“한 대표님이 별말 안 했냐고.”
“어, 안 했어.”
철용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수희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한 대표님이 너한테 뭐라고 했어? 화라도 냈어?”
차라리 화를 냈으면 더 나았으려나.
그래, 그쪽이 더 나았을 수도 있겠다.
“하아아아.”
“땅 꺼진다. 어린것이 벌써 한숨은.”
“땅이 꺼져서, 나도 같이 꺼졌으면 좋겠다.”
“갑자기 왜 이래.”
앞뒤 상황을 모르는 철용은 갑자기 한탄하는 수희를 이해하지 못했다.
혼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수희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남자 맞잖아.”
“어? 뭐라고 했어?”
“……아냐.”
수희는 자신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철용에게 다시 말해 주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지금 철용에게 상냥하게 굴 정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수희의 머릿속, 아니 마음속은 승조가 한바탕 쓸고 지나간 탓에 엉망진창이었다.
“어디 남자 집에 혼자 가.”
남자 집에 혼자 가는 게 아니라고 한 철용의 말이 맞았다.
“한 대표님이 남자가 아니면, 나는 오징어냐?”
철용은 오징어가 아니었고, 한승조는 남자였다.
승조의 손이 내게 닿았을 때.
승조가 고백 비슷한 말을 꺼냈을 때.
그가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을 때.
그때마다 모두 설렜으니까.
“망했어.”
남자 아니라며, 이 바보 오수희. 멍청한 오수희!
수희가 몇 번이나 탄식하며 창문에 쾅쾅 머리를 부딪쳤다.
“어어! 멀쩡한 창문은 왜 괴롭혀.”
운전 중인 철용이 한 손으로 수희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렸다.
그러나 수희는 철용의 손을 밀어내며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문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수희는 자신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오빠, 걱정하지 마. 대표님 나한테 남자 아니야.”
한승조가 자신에게 남자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지금 수희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한승조에게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수희는 창문에 기대고 있던 이마를 떼어 내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깐 우연일 수도 있잖아.’
짓궂은 장난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잘난 얼굴 때문에 아주 잠깐 설렜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인해 봐야겠어.”
이게 우연인지, 필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