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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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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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첫 키스
2022.04.26.
집으로 돌아온 수희는 겨우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푹신한 침대에 엎어져 손안에서 반짝이는 휴대폰을 바라봤다.
팔을 끌어와 휴대폰을 보자 승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알림 창을 누르자 예상과 다르게 음성 파일 세 개가 도착해 있었다.
제목을 보니 승조의 집에서 들었던 대본 파일들이었다.
“잘 들어갔는지 물을 리가 없지.”
서로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들려고 했다.
쓸데없는 감정들을 뒤로 미룬 수희가 휴대폰을 덮어 두려 했다.
[대본은 전부 들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그때, 말풍선을 밀어내고 메시지 하나가 더 올라왔다.
[대본 들어 보고 다시 만나는 걸로 하죠.]
자연스레 승조는 또다시 수희와의 약속을 잡았다.
“꼭 얼굴 보고 이야기를 하자고 하네.”
전화 통화만으로도 끝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휴대폰에 뜬 메시지를 빤히 보던 수희가 음성 파일들을 전부 내려받았다.
그러고는 침대 협탁 서랍 안에 있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베개에 머리를 댄 수희가 승조의 집에서 다 듣지 못한 파일을 재생했다.
[신 1. 강호의 방 안. 굵은 뿔테 안경에 헝클어진 머리를 한 강호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노크도 없이 벌컥 들어온 나영이 베개를 던진다.]
나긋나긋하게 들려오는 승조의 음성에 수희의 눈꺼풀이 편안하게 감겼다.
[난데없이 머리를 강타당한 강호가 뒤를 돌아본다. 강호,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내가 들어올 때 노크하라고 했지.]
지문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대본을 읽을 때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정은 상황을 좀 더 빠르게 와닿게 했다.
한참 녹음 파일을 듣고 있던 수희는 작게 감탄했다.
“왜 이렇게 잘해.”
적절하게 강약을 조절하는 승조의 목소리는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희는 어느새 대본이 아니라 승조의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머릿속에 장면이 펼쳐졌다.
가만히 승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수희는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오빠, 오빠!”
깜박 잠이 들었던 수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수희는 예전에 꿈속에 나왔던 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고로 여기는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뜻이었다.
운동장을 둘러본 수희는 놀이터에 있는 두 아이에게로 걸어갔다.
꼬마 수희는 그네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에게 깡충깡충 뛰어갔다.
이번에도 남자아이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좌우로 움직이던 꼬마 수희가 상처 난 남자아이의 얼굴을 빤히 봤다.
“또 친구랑 싸운 거야?”
남자아이는 생채기로 붉어진 입가를 손으로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왜.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게?”
어린 수희는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 오빠가 더 많이 때렸는지 물어보려고. 몇 대 더 때렸어?”
남자아이는 황당한 얼굴로 수희를 바라보다가 혼자 웃음이 터졌다.
“오수희, 너 진짜 못 말린다.”
“못 말리는 건 짱구고.”
아이답게 어린 수희는 재미없는 말장난을 했다.
수희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이것도 내가 만들어 낸 상상 같은 건가.’
‘저 남자애는 누군데 계속 내 꿈에 나타나는 거야.’
‘내가 저 애랑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는 건가.’
교복에 박혀 있는 이름은 전과 같은 ‘한승조’였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한승조가 늘 수희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가 많이 때려 줬어?”
“상대는 세 명이었어.”
어린 수희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승조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아아. 오빠가 더 많이 맞았구나?”
“한 명이었으면 내가 더 많이 때릴 수 있었다고.”
흥분에 가득 찬 남자아이의 목소리에 지켜보고 있던 수희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남자애라고 여자애 앞에서 창피한가 보네.’
귀엽게 논다 싶어 수희는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대로 즐겁게 관람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 수희가 순순히 구경만 하게 둘 리 없었다.
“어디 보자. 얼마나 다쳤는지.”
어린 수희가 그네를 타자 끼익끼익 쇠가 긁히는 소리가 수희의 귀에 울렸다.
저번에도 느낀 거지만 펼쳐지는 꿈은 모두 현실처럼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남자아이는 다친 입가를 보여 주기 위해 어린 수희에게 턱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남자아이의 눈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별로 안 다쳤어.”
어린 수희는 빨갛게 피딱지가 진 남자아이의 입술을 바라봤다.
“별로 안 다치긴. 침 발라야겠구먼.”
“더럽게 침을 왜 발라.”
어린 수희가 손을 뻗어 질색하는 남자아이의 얼굴을 붙잡았다.
가만히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수희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했다.
쪼옥.
귓가를 때리는 ‘쪼옥’ 소리에 지켜보던 수희는 뒷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어린 수희가 겁도 없이 남자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굳어 버린 남자아이와 다르게 어린 수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렇게 하면 금방 나을걸?”
“너! 진짜! 여자애가 남자한테 막 뽀뽀하고 그래도 돼?”
흥분한 남자아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입을 손등으로 틀어막았다.
어린 수희는 수줍어하는 남자아이를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뭐 어때? 어차피 우리 결혼하기로 했잖아.”
“나 첫 키스라고!”
조금 억울하다는 듯 남자아이가 외치자 어린 수희가 또박또박 목소리를 냈다.
“처음도 마지막도 나일 텐데 상관없잖아.”
어린 수희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안개라도 덮인 듯 희미했던 남자아이의 얼굴이 점차 선명해졌다.
두 눈에 들어오는 남자아이의 얼굴에 수희의 폐부에 숨이 깊게 들어찼다.
줄곧 어린 수희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아이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수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건 착각일까.
이윽고 남자아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수희의 시야에 잡혔다.
마주한 얼굴은 너무나 뜻밖이라 수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너는.’
“악!”
꿈을 꾸고 소리를 지르며 깨어난 적은 처음이었다.
수희는 믿고 싶지 않아 뺨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내려쳤다.
짝짝짝.
볼이 얼얼해진 게 아니라 머리가 얼얼해지는 듯했다.
정신이 혼미해져 다시 침대에 쓰러질 것 같았다.
이건 절대 현실이면 안 된다. 꿈이어야 했다. 무조건 꿈이어야 했다.
내가, 어렸을 적 내가, 남자아이에게 뽀뽀했다.
한승조라는 남자아이에게.
“미쳤어! 미쳤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움켜잡은 수희의 손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수희는 꿈에 나왔던 한승조라는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분명 잠에서 깨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아이의 얼굴을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해 뒀었다.
잊을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가 새하얗게 번졌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꿈에서 느낀 공기마저도 너무나 선명한데 남자아이의 얼굴만 기억나지 않았다.
손을 뻗은 수희가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흘렸다.
“이거 진짜 꿈 맞아?”
어린 자신과 남자아이가 나오는 꿈.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게 두 번째가 되니 꿈이 아니라 과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 나 진짜 어떡하지.”
이전에 꿨던 꿈도, 지금 꿨던 꿈도 모두 무의식 속에 있던 과거라면…….
한승조라는 남자아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 아이도 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설마…… 진짜 결혼하려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
잠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승조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승조는 조금 전까지 꿨던 꿈을 떠올리며 작게 웃음 지었다.
“오랜만이네.”
중학교 때 꿈을 꾼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수희와 꽤 많은 시간을 학교 운동장에서 보냈다.
자신의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넓다는 이유로 수희는 승조의 학교를 자주 찾아왔었다.
언니 오빠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수희는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점령했었다.
서울로 떠난 수희와 연락이 끊기고 난 후, 수희의 꿈은 더는 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수희를 만난 이유에서일까.
막을 틈도 없이 자신의 첫 키스를 가져갔던 수희가 꿈에 나왔다.
“이것도 기억 못 하겠지.”
이 일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우리가 다시 만났던 그때.
팬이냐는 물음을 던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린아이 장난 같은 입맞춤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밤마다 설레어 잠 못 들게 만들었던 원인이었지.
“난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네.”
장난스러운 키스에 마음 쓰고 매일같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알게 된다면 수희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고작 열세 살도 안 된 애가 한 말을 기억할까요?”
약 기운 때문에 비행기에서 수희가 마지막으로 했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마 그 답은 ‘난 기억하고 있다’일 것이다.
그녀가 잊어버린 과거를 승조는 기억하고 있었다.
늘.
***
그날 저녁, 일정을 마친 수희는 밴 뒷좌석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벌써 하루의 끝에 서 있었다.
철용이 포장해 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자, 이거 마셔.”
“고마워.”
커피를 건네받은 수희는 안전띠를 매는 철용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대본을 읽어 주는 건 승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도 될 일이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가장 최측근인 철용이라면 흔쾌히 승낙할 게 분명했다.
만약 대본의 녹음 파일이 왜 필요한지 묻는다면 무어라 할까.
움직이는 차 안에서 대본을 읽는 게 불편하니 녹음 파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할까.
“오빠, 오늘 마치고 어디 가?”
룸미러로 수희를 보며 철용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는데, 어제 엄마 아프셔서 응급실 가셨거든.”
깜짝 놀란 수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응급실을?”
“엄마 혈압 관리가 안돼서 고생 좀 했어. 지금 입원해 계셔서 오늘도 병원 가야 해.”
만성 신부전증으로 철용의 어머니는 5년째 투석을 하고 있었다.
올해 들어와 당뇨까지 심해져 철용의 근심은 늘어만 가고 있었다.
“말을 하지. 그랬으면 내가 사장님한테라도 말해서 오빠 쉴 수 있게 했을 텐데.”
“아냐, 됐어. 일에 지장 줄 수는 없잖아.”
애써 밝게 말하는 철용의 속이 얼마나 답답할지 수희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런 철용에게 대본을 녹음해 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녹음 파일은 다른 직원을 통해서라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조처럼 완벽하게 파일을 만들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매번 대본이 나오고 수정될 때마다 차 안에서 들을 테니 녹음을 새로 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고민의 시간을 끝내 주듯 승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수희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지금 만날 수 있나요?]
딩―
곧장 답신이 돌아왔다.
[S 호텔에서 만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