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러면 곤란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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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러면 곤란해지지
2022.04.30.
[S 호텔에서 만나죠.]
다른 곳도 아닌 호텔에서 보자는 메시지에 순간 수희가 멈칫했다.
그런 수희를 지켜보기라도 하듯 새 메시지가 액정에 떠올랐다.
[이상한 생각 중이라면 그만하는 게 좋습니다.]
이상한 생각 하게 만든 게 누군데.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저 혼자만의 상상을 치워 낸 수희가 엄지를 움직였다.
[지금 출발해요.]
휴대폰을 허벅지 위에 덮어 둔 수희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운전석에 바짝 붙었다.
라디오를 켠 철용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막 페달을 밟으려던 참이었다.
“오빠, 나 지금 한승조 대표님이랑 보기로 했어.”
“또? 어제 봤잖아.”
“오늘 만나서 이야기 끝내려고.”
“어제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해 놓고 아직 다 못 끝냈어?”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철용이 내비게이션을 누르며 물었다.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어?”
“S 호텔.”
“에스.”
내비게이션을 꾹 누르는 철용의 손이 멈췄다.
수희는 미리 대비하듯 두 검지로 귓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호테에에엘?”
***
“후우, 겨우 떼어 놓고 왔네.”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수희는 3층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어떻게 너를 호텔로 불러? 한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도가 너무 다분하네!”
역정을 내며 펄펄 뛰어 대던 철용을 안심시키느라 수희는 안 써도 될 힘을 쏟고 왔다.
처음엔 자신도 오해했으니 철용이 승조의 목적에 대해 의심을 갖는 건 당연했다.
사실 그가 호텔에서 보자고 한 건 그다지 큰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몇 시간 전에 S 호텔 3층 소규모 연회장에서 FL 패션몰의 회의가 있었다.
마침 3층에 다른 손님이 없어 수희를 S 호텔로 부른 것이었다.
띵, 하고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밖으로 발을 빼내자 구두 아래에 푹신한 카펫이 밟혔다.
‘자스민’
세 개의 연회장 중 자스민 알림판이 달린 연회장 앞에 섰다.
문고리를 붙잡아 당기자 천장에 달린 환한 조명등이 눈가에 쏟아져 내렸다.
눈부신 불빛에 익숙해진 시야 안으로 디귿 모양의 테이블이 들어왔다.
회의가 끝난 연회장 안에는 승조 이외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왔습니까?”
승조가 건네는 말에 수희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넓은 공간 안에 승조와 둘뿐이니 괜히 어색한 공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수희는 하얀 의자에 앉아 있는 승조의 앞으로 걸어갔다.
승조의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수희가 말했다.
“급하게 만나자고 했는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둘한테 중요한 일이니까요.”
‘우리 둘’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낯간지럽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느끼는 건 자신뿐인 것 같아 수희는 말을 아꼈다.
“결정은 했습니까?”
결정하고 승조를 찾아왔건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시선을 끌어 올린 수희가 승조의 눈을 바라봤다.
줄곧 그는 수희를 보고 있었던 듯, 서로를 향하는 시선이 교차했다.
“몇 가지 약속을 하고 싶어요.”
“말해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승조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막상 저렇게 멍석을 깔아 주니 잠시 멈칫했지만 수희는 곧이어 목소리를 냈다.
“대본 녹음 파일을 전달해 주는 건, 이번 복귀 작품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들도 해당하는 사항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제 증상이 나아진다면 대본 녹음은 더는 받지 않을 거고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어려운 합의점이 아니라는 듯 곧장 대답이 나왔다.
“그리고…… 결별은 복귀 작품이 끝난 뒤였으면 좋겠어요. 작품 때문에 서로에게 소홀해졌다, 이런 식의 기사면 될 것 같고요.”
“열애설 인정하겠다는 겁니까?”
벌어진 잇새로 말이 나온 건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혼자서 내린 이 결정에 후회는 없었다.
낭떠러지를 뒤에 둬서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열애설 인정해요.”
그렇다고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승조의 손을 잡은 것만은 아니었다.
한승조라는 사람을 알게 된 건 고작해야 한 달 정도.
그 한 달이 수희에게는 꽤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과거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때때로 흔들리기만 하던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짧은 사이에 수희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 승조였기에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한승조에게 이따금 두근거리던 가슴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함께 있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후회 없는 선택이길 바랍니다.”
그의 말대로 수희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기를 바랐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승조가 수희의 곁으로 걸어왔다.
자연스레 수희의 눈이 자신의 앞에 서는 승조에게로 옮겨졌다.
승조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수희에게 내밀었다.
“파트너로서 잘 부탁합니다.”
“파트……너요?”
“이제 한배를 탔으니 파트너죠.”
악수를 청하는 승조의 손을 바라보던 수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고는 말아 쥐었던 손끝을 펼쳐 승조의 손을 맞잡았다.
승조가 수희의 손을 감싸 쥐자 서로의 온기가 겹쳐졌다.
가만히 악수한 손을 바라보던 수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봐. 전혀 안 두근거리잖아.’
걱정과는 달리 승조와 손을 맞잡고 있어도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떨렸던 건 설렘과 거리가 멀다, 수희는 생각하고 있었다.
짧게 악수를 끝낸 수희가 손을 떼어 내자, 승조의 손도 아래로 떨어졌다.
“계약서가 필요하겠습니까?”
계약까지 할 필요 있나 했지만, 승조의 마음이 바뀌게 될 수도 있었다.
승조의 도움 없이는 지금 당장 복귀할 수 없으니 계약서는 필수였다.
“네, 계약서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계약서 내용 정리되면 드리도록 하죠.”
수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장 출입구로 몸을 틀었다.
“이야기는 끝났을까요? 지금 주차장에서 매니저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같이 나가죠. 나도 지금 회사로 복귀해야 하니까.”
두 사람은 연회장을 나와 근처에 있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수희는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승조도 지하 1층에 차를 세워 둔 건지 다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수희가 버튼에서 손을 떼어 내자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스르르 내려갔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마자였다.
갑자기 덜컹, 하고 엘리베이터가 크게 흔들리면서 수희의 몸이 휘청했다.
그러자 승조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흔들리는 수희의 허리부터 받쳤다.
몸에 닿는 승조의 손을 의식할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천장에 있던 불빛이 꺼졌다.
눈앞이 깜깜해지자 수희는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수희는 차마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수희는 길을 잃은 것처럼 방황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다리는 힘을 잃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여기 사람이 갇혔습니다.”
차분한 승조의 음성에 수희는 얄팍한 숨을 연달아 몰아쉬었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 안으로 승조의 넓은 등이 들어왔다.
승조는 오로지 혼자서 빛나고 있는 비상벨을 누르고 있었다.
“아무도 없습니까?”
아까보다는 승조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대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채 갇혀 있어야 하나 싶었다.
[거기 엘리베이터가 멈췄습니까?]
하지만 이내, 엘리베이터 안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희는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수희는 승조의 팔을 붙잡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리베이터가 멈추면서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딘가 다쳐서 119까지 온다면 소란스러워질 게 분명했다.
하얗게 질려 버린 수희를 바라보며 승조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엘리베이터 관리자 불러서 문부터 열어 주세요.”
수희가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그녀가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시끄러운 일에 휘말리는 건 이전의 일들로 충분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호텔 관계자와의 통화가 끝난 후 수희가 뒤로 물러서며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댔다.
누군가 도와주러 올 거라는 걸 알게 되자 그나마 안심이 됐다.
벽에 붙어 서 있던 수희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는 승조를 응시했다.
호텔 관계자와의 통화가 한참 전에 끝났건만 승조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승조 대표님.”
조심스레 걸음을 떼어 낸 수희가 승조의 뒤로 다가갔다.
승조의 팔을 붙잡자 그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불렀습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수희는 승조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그제야 수희는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승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폐소 공포증이 있습니다. 처음엔 숨 쉬는 게 힘들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나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비행기를 탔을 때 수면제를 먹었을 것이다.
어두워서 승조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수희는 승조의 팔을 붙잡은 채로 그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대표님 폐소 공포증 있잖아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인 건지 붙잡고 있는 승조의 팔이 잘게 떨려 왔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이번에는 승조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갑자기 불안해진 수희가 잠시 망설이다가 승조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찬 기운보다 흥건하게 묻어 나오는 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놀란 건 자신보다 승조일 것이다.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매뉴얼대로 행동하니 그에게 폐소 공포증이 있다는 것도 깜빡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렇게 겨우 버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도 119 불러요.”
수희가 비상벨을 누르려는데, 공중에 올라선 손이 승조에게 잡혔다.
“됐어요. 차에 약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요.”
“이러다가 쓰러지면요.”
“어떻게든 버틸 테니까 오수희 씨는 걱정하지 마요.”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어떻게 걱정이 안 될까.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가 않은데.
수희는 힘없이 얹어지기만 한 승조의 손을 내려다봤다.
“혹시 나 때문이에요? 구급차 오면 시끄러워질까 봐.”
“그런 거 아닙니다.”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승조가 구급차를 부르지 않을 리 없었다.
승조는 잡고 있던 수희의 손을 놓아 주고 엘리베이터 벽에 기댔다.
그대로 등을 댄 채 승조가 엘리베이터 바닥에 앉았다.
두 무릎을 꿇고 앉은 수희가 전전긍긍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구급차 부를게요.”
호흡이 답답했던 승조는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울려 왔다.
“그냥 조용히 옆에 있어요.”
“계속 말을 걸어 줘야지 대표님이 정신을 안 잃죠.”
틈틈이 잔소리를 잊지 않은 수희가 승조를 타박했다.
사실 승조는 티 내지 않았지만 언제 과호흡이 올지 몰라 예민해져 있었다.
혼자서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면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자신까지 쓰러진다면 수희가 겁먹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이렇게 있으면 더 낫지 않을까요?”
과호흡이 오지 않도록 승조가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반쯤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승조가 제 손등 위로 시선을 옮겼다.
손등 위에는 수희의 손이 얹어져 있었다.
“폐소 공포증이 불안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어느덧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희가 승조에게 열기가 전해질 만큼 손을 꽉 잡았다.
“손잡고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요?”
네가 이러면 내가 더 곤란해지지.
“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
아니…… 네 덕분에 괜찮지 않아지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고르게 쉬고 있던 숨이 멈춰 버렸다.
아주 잠시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