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같이 집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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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같이 집으로 가요
2022.05.03.
“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
평정심이 요동치는데도 수희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승조의 표정을 읽는 건 어려웠다.
멈췄던 숨을 천천히 내쉰 승조가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좀 괜찮은 것 같네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과호흡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괜찮다고 말한 건, 수희가 내민 도움의 손길이 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괜찮다는 말에 수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밝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해사하게 웃는 수희의 표정만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승조는 엘리베이터 벽에 뒷머리를 기댄 채 수희를 지그시 바라봤다.
시선을 느낀 수희가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승조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 승조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자, 수희가 멋쩍어하며 입술을 떼어 냈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승조가 수희가 잡은 손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좀 더 제대로 잡아도 되겠습니까?”
“불편해요?”
수희가 승조의 손등에서 손을 걷어 내려는데, 승조가 손등을 뒤집어 수희의 손을 붙잡았다.
퍼즐처럼 승조의 기다란 손가락이 수희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열 개의 손가락이 풀리지 않을 것처럼 깊숙이 엮였다.
틈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깍지 낀 손은 밀착되어 있었다.
“훨씬 낫네요. 아까보다.”
승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너무나 희미해 수희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래로 고개를 떨군 수희가 승조에게 붙잡힌 손을 바라봤다.
아까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심장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심장이.
쿵, 쿵, 쿵 갈비뼈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승조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면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멈출 것 같았다.
그러나 먼저 손을 잡은 게 자신이었기에, 그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얀 뺨을 도화지 삼아 붉은 홍조가 점차 번지기 시작했다.
수희는 엘리베이터의 불이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엘리베이터 안이 불빛으로 채워진다면, 지금 자신의 얼굴을 승조에게 들킬 게 분명했으니까.
승조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수희가 자신의 뺨을 덮었다.
얼굴에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난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나 어떻게 된 거지?’
너무 놀라서 심장이 제대로 기능을 못 하는 거야.
아까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심장이 계속 빨리 뛰고 있는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손 좀 잡았다고 미친 듯이 떨리는 게 말이 돼?
아닐 거야. 아니야.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고 여기던 때였다.
툭, 하고 수희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정면을 향해 있던 수희의 눈길이 빠르게 옆으로 돌아갔다.
수희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수희의 어깨 위에 안착한 건 다름 아닌 승조의 머리였다.
옆으로 기울어진 승조의 상체 탓에, 서로의 온기가 전해질 정도로 어깨가 닿아 있었다.
“지, 지금. 뭐…….”
“잠깐만 이렇게 있죠.”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승조가 수희에게 통보했다.
승조가 제게 조금 더 가까워지니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른침을 넘기는 행위 하나에도 온 신경이 쏠렸다.
자신이 승조를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비웃을까 싶어서였다.
드라마 촬영 때 배우들과 했던 스킨십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그만큼 남자 연예인과 했던 스킨십은 수희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만은 달랐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귀가 먹먹해졌다.
허락 없이 자신에게 닿은 승조가 불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승조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세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 있었습니까?”
굳어 있던 수희는 갑작스러운 승조의 물음이 의아했다.
질문을 건넨 승조는 두 눈을 감은 채로 수희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시운 작가님 작품 흥미롭게 봤어요. <패밀리>요.”
곧바로 돌아올 줄 알았던 승조의 대답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흘러나왔다.
“수급된 대본은 3화까지예요. 이번 주 중으로 녹음해서 보내 줄게요.”
담담하게 내뱉었지만 승조의 어조는 물에 푹 젖은 듯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승조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고 있었다.
승조 쪽으로 상체를 튼 수희가 제 어깨에 기대고 있는 승조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승조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놓은 수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얼음장을 만진 것처럼 손바닥이 금방 차가워졌다.
그제야 승조가 자신의 어깨에 기댄 건 머리를 가눌 힘조차 없어서라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식은땀이 흠뻑 배어 나오고 있었다.
수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환한 휴대폰 액정이 수희의 얼굴을 비추는데, 그 빛은 곧 승조의 손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다.
“곧 문 열릴 겁니다. 시끄럽게 사람 부를 필요 없어요.”
“이렇게 쓰러지면 내가 편할 것 같아요?”
“안 쓰러져요.”
수희를 두고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입술이 찢어져라 깨물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이러는 거죠?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알면 그렇게 화내지 말고, 그냥 고마워만 해요.”
1박에 50만 원이 넘는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멈췄으니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다.
거기에 눈에 띄는 소방관마저 등장한다면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출 것이다.
어차피 수희와의 열애설을 사실로 인정하려 했으니 상관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호텔이었다.
수희와 승조가 머물렀던 곳은 호텔 방이 아닌 연회장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그걸 해명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그게 승조가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붙들고 있는 이유였다.
“하아, 이렇게까지 하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아요?”
수희는 속상해서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었다.
모진 말을 하면 그의 마음이 변할까 싶었다.
닫혀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상당히 고마워하는 얼굴인 거 다 보입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 승조의 마음도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장난스럽게 넘어가 보려 하는 승조의 노력에 수희는 도리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 때문에 승조가 쓰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덜컥 겁부터 났다.
“시간 끌다가 과호흡까지 오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서 오수희 씨가 도와주고 있잖아요.”
승조가 수희와 잡은 손을 들어 올렸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승조가 버겁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휴대폰을 덮은 승조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리자마자 수희는 제 품으로 휴대폰을 끌어갔다.
그리고 다이얼의 숫자를 누르려던 찰나였다.
머리 위에 있던 불이 깜박이더니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불이 들어왔다.
엘리베이터가 멈췄을 때처럼 전체가 덜컹하고 뒤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놀란 수희가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2층에 멈춰 있는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사람 있어요?”
엘리베이터 관리자의 목소리에 수희가 얼른 대답했다.
“네, 안에 사람 있어요!”
“지금 엘리베이터 수리 기사님 도착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문밖으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어지는 사이사이 기계를 다루는 듯 굉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쇠막대기 하나가 들어왔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눈을 감고 있던 승조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수희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 있던 승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밖에 사람들이 왔어요. 곧 문이 열릴 것 같아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승조가 힘겹게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 땀이 날 정도로 꽉 붙잡고 있던 수희의 손을 놓았다.
한순간에 온기가 사라지자 수희가 덩그러니 남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승조가 손을 놓는 순간, 수희는 아쉽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사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다물려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점차 벌어졌다.
조금의 틈이 벌어진 엘리베이터 문은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스르르 열렸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마주하기 직전, 수희의 머리 위로 옷 하나가 툭 떨어져 내렸다.
눈에 들어온 소매로 승조가 입고 있던 재킷이라는 걸 알았다.
방금까지 겨우 숨만 내쉬고 있던 승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수희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수희가 가만히 승조를 올려다보자, 그가 옷이 떨어지지 않도록 재킷을 끄집어 올려 주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수희의 귓가에 호텔 관계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승조의 대답에 호텔 관계자가 재킷을 얼굴에 덮고 있는 수희에게 물었다.
“그쪽 분도 괜찮으신 건지…….”
“저랑 이 사람 둘 다 괜찮습니다.”
수희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승조가 답변을 대신 했다.
호텔 관계자의 시선이 수희에게 오랫동안 머무르자 승조가 수희를 끌어안았다.
수희는 승조가 자신을 끌어안은 것보다, 팔을 감싼 그의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워 놀랐다.
승조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에 맞춰 수희는 붙어 있던 발을 떼어 냈다.
눈앞이 가려져 있으니 승조가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아직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 재킷을 내리지도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걸음을 멈춘 승조를 따라 수희도 옆에 붙어 섰다.
귓가에 윙 하는 기계음이 들리고, 승조가 수희의 머리를 덮고 있던 재킷을 내렸다.
승조가 수희를 데려온 곳은 반대편에 있던 엘리베이터였다.
수희는 재킷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대신 승조의 얼굴부터 살폈다.
어떻게 버티고 서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일단 병원부터 가요.”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자 승조가 먼저 내렸다.
“병원 가도 해 주는 건 없어요. 약 먹고 쉬는 게 제일 나아요.”
자기 몸이니 자기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억지로 병원에 끌고 갈 수는 없으니 수희가 할 수 있는 건 걱정밖에 없었다.
승조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전전긍긍하던 수희는 승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멀대처럼 큰 키의 승조가 일순간 휘청하자, 수희가 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세운 승조가 수희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나 부축하다가 오수희 씨까지 넘어집니다.”
허공 위에 덜렁 남은 손을 내리며 수희가 애가 타 토로했다.
“그럼 혼자 넘어지게 둬요?”
“둬요. 그쪽이 나도 편하니까.”
‘내가 불편하다는 거야?’
수희는 호의를 거절당하자 울컥하고 서운함이 몰려왔다.
건조하게 툭 내뱉는 어투 때문에 수희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수희는 승조가 이대로 혼자 집으로 가게 두고 싶었지만, 양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운전하다가 정신을 잃기라도 할까 싶어 대책을 강구해 냈다.
‘아, 오빠가 있었지.’
철용에게 승조의 집까지 운전을 부탁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수희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철용에게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수희야, 나 엄마가 찾아서 병원 왔거든? 엄마 상태만 보고 갈게.]
그렇다면 지금 당장 승조를 도와줄 사람은 수희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망설일 틈조차 없었다. 승조가 차로 다가서자 수희는 행동이 앞서 나왔다.
수희는 승조가 운전석으로 걸어가자, 자신이 먼저 운전석 문을 열어 몸을 실었다.
승조는 대뜸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수희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같이 집으로 가요.”
턱 끝을 들어 올린 수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승조에게 말했다.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