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너 정말 좋아하는구나 2022.05.07.
“내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승조는 어림도 없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수희의 팔을 붙잡았다.
“내려요. 괜히 같이 집에 가다가 사람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져요.”
“어차피 열애설 인정할 거잖아요.”
수희는 승조의 손을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밀어내며 안전띠를 맸다.
“그것보다 호텔에 우리 둘이 있는 걸 다른 사람이 보는 게 더 문제가 될 것 같은데요?”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자 승조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세운 승조가 조수석으로 걸어와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올라탄 승조는 가장 먼저 글러브박스를 열어 안에 들어 있던 흰 약통을 꺼냈다. 달그락거리는 약통 안에서는 몇 개의 약이 통 안을 굴러다니는 소리가 났다. 뚜껑을 연 승조는 안에 들어 있던 약 한 알을 꺼내 입에 넣었다. 물도 없이 약을 삼킨 승조는 아플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이 얼른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수희가 아니었다면 운전석에서 안정을 취하다 운전할 생각이었다. 거절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승조는 힘없이 좌석에 상체를 뉘었다.
“안전띠, 해야 하는데.”
수희는 차를 출발시키려다가 두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승조를 바라봤다.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승조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승조에게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수희가 안전띠를 끌어왔다. 안전띠를 당겨 오는 소리에 승조가 닫혀 있던 눈꺼풀을 열었다. 걸쇠를 안전띠 꽂이에 밀어 넣으려던 수희는 갑자기 눈을 뜬 승조와 시선이 마주쳤다. 승조의 검은색 눈동자 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이내 나른하게 감기는 승조의 눈꺼풀에 수희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마저 안전띠를 채웠다. 좌석에 바로 앉은 수희가 시동을 켠 뒤 핸들을 붙잡았다.
“후우.”
얼굴 아래에서부터 후끈하게 열기가 올라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그스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던 수희는 운전에 집중하려 애썼다. *** 승조의 차가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에 세워졌다. 안전띠를 푼 수희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만 승조 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폐소 공포증의 여파 때문인지 승조는 빌라로 오는 내내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한승조 대표님.”
차 안의 딱딱한 좌석보다는 푹신한 침대가 낫겠다 싶어 그를 깨우려 했다. 하지만 얼마나 깊은 수면에 빠졌는지 승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희가 승조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레 흔들었다.
“대표님, 집에 다 왔어요.”
“으음.”
승조는 눈을 뜨는 대신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승조를 흔들어 보지만,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지장 같은 얼굴에 입술만 빨간 그를 보자 슬금슬금 걱정이 밀려왔다. 식은땀은 멎었지만, 살짝 벌어진 잇새로 흘러나오는 숨은 가쁘고 뜨거웠다.
“한승조 대표님.”
한 번 더 힘주어 승조를 부르자, 그제야 감고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차가 펜트하우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걸 확인한 승조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안전띠를 풀어낸 승조가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데려다준다고 고생했어요.”
내뱉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승조가 조수석 문을 열기도 전에 수희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렸다. 위태로워 보이는 승조를 이대로 두고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가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만이라도 보기 위해 승조를 지켜봤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문밖으로 승조의 두 다리가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승조가 굽혀져 있던 다리를 세우는 동시에 휘청였다. 큰 나무 같은 승조의 몸이 기울어지자 수희는 재빨리 손을 뻗어 승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쪽 팔로 승조의 허리를 감을 수가 없어, 팔로 등을 겨우 받치고 있었다. 똑바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승조가 수희에게로 쓰러졌다.
“아, 아니. 한승조 대표님.”
승조가 일어나길 바랐지만, 그는 온몸을 수희에게 맡기고 있었다. 수희는 뻣뻣하게 굳어진 목을 움직여 자신의 어깨에 파묻힌 승조를 바라봤다. 가쁜 숨만 내쉬는 승조는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이렇게 쓰러진다고?”
자신을 덮친 승조의 넓은 어깨를 밀어내 봤지만, 거대한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윽, 하아, 읏.”
가파른 산을 오른 것처럼 엉망진창인 숨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짐짝이라도 된 것처럼 승조는 수희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쓰러져 있었다. 긴 다리가 아래로 질질 끌렸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지땀을 있는 대로 흘리며 수희가 승조의 집 문 앞에 섰다. 난관을 넘어서면 또 다른 난관이 다가왔다. 수희가 승조의 집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굳게 닫힌 문을 두고 수희가 승조를 바닥에 내려 두었다. 쪼그리고 앉은 수희는 마치 취객을 대하듯 승조가 입고 있는 재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 오늘 데려다준 값은 제대로 받을 거야.”
제 평생 누굴 끌어안고 집까지 데려다준 적은 처음이었다. 물이라도 머금은 것처럼 무거운 솜뭉치가 된 승조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기적에 가까웠다. 수희도 자신에게 이런 초인적인 힘이 있을 줄은 몰랐다.
“여기 있다.”
재킷 안주머니에 있던 지갑 안에는 펜트하우스 키가 들어 있었다. 펜트하우스 키를 못 찾으면 수희는 승조의 뺨이라도 때려 깨울 생각이었다. 그러니 승조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펜트하우스 문을 연 수희는 다시 승조를 둘러업다시피 해서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힘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승조의 다리가 바닥에 질질 그어졌다.
“흐읍!”
마지막 힘을 짜낸 수희가 승조를 침대에 눕히는데. 문제는 수희의 몸도 아래로 딸려 갔다는 것이다. 털썩하고 승조의 몸이 폭신한 매트리스에 감기고, 수희가 승조의 가슴팍 위로 쓰러졌다. 졸지에 승조에게 안긴 꼴이 되어 버린 수희는 퍼뜩 상체를 들어 올렸다. 다행히 수희의 아래에 깔린 승조는 잠깐의 뒤척임만 보일 뿐, 눈을 뜨진 않았다. 곧바로 일어서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수희는 가만히 승조를 들여다봤다. 길게 찢어진 눈에는 검은색 속눈썹이 길게 뻗어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기다란 속눈썹이 참 신기하다 싶었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누군가 손가락으로 꾹꾹 짓누른 것처럼 핏기가 도는 입술이 보였다. 단정하게 닫혀 있던 입술이 서서히 벌어지며 숨이 흘러나왔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승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수희가 눈길을 끌어 올렸다. 승조가 반쯤 감긴 눈으로 자신을 덮친 수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그게.”
수희가 어버버거리는 사이, 승조는 제 가슴 위에 있는 수희의 손을 붙잡아 떼어 냈다.
“지금 내 몸 더듬거린 겁니까?”
따갑게 와 닿는 눈빛에 수희는 눈 한 번 깜박이지 못했다. 실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생쇼를 해 가며 승조를 집까지 옮겨 줬는데, 결국에는 추행범으로 몰리는 이 상황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한 손이 승조에게 붙잡혀 있었다.
“갑자기 쓰러진 사람이 누군데요. 그냥 두고 가려다가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거예요. 아, 안긴 건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갑자기 힘이 빠져서 쓰러진 거고요.”
구구절절하게 설명해 나가는 게 오히려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정까지는 내고 싶지 않았지만, 억울하니 감정이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순 정적에 휩싸인 침실 안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희는 뜬금없이 웃기 시작한 승조를 보고 얼이 빠졌다.
“장난이었는데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습니다.”
잠깐씩 미소를 띤 얼굴은 드문드문 본 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가지런한 이가 드러날 정도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에 수희는 한참 승조의 웃는 얼굴을 눈에 담았다. 여전히 그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정신이 팔렸다. 일어날 타이밍을 놓친 수희는 뒤늦게 승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다. 파동이 일어난 것처럼 수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귀에 붙어 있는 것처럼 쿵쿵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기울어져 있던 허리를 세우는데, 누워 있던 승조가 상체를 일으켰다. 수희의 몸이 뒤로 밀려나자,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느리게 상체를 들어 올리고 있던 수희는 금방이라도 승조와 입술이 부딪칠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승조를 빤히 보고 있었다고 해도, 키스하자는 신호를 보낸 건 아니었다. 서로 민망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수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뒤로 물러날 곳이 더는 없는데 승조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풍성하게 박혀 있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아랫배가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입술이 부딪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점차 몸을 뒤쪽으로 빼내던 수희는 한계에 도달했다. 승조가 끝도 없이 깊숙이 상체를 숙이자, 두 눈꺼풀을 질끈 닫고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많이 급하긴 했나 봅니다. 신발도 못 벗긴 거 보면.”
툭, 툭. 둔탁한 소리가 들리자 수희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승조의 손에 의해 벗겨진 구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수희와 키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고 있던 구두를 벗기 위해서 몸을 일으킨 것이었다. 민망해진 수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는 승조에게 등을 돌렸다.
“신발 벗길 틈이 어디 있었겠어요. 끌고 온다고 정신이 없었는데.”
수희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침실을 나가려 발걸음을 떼어 냈다.
“전 가 볼게요.”
“고마워요.”
다정하게 다가오는 그의 목소리에 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수희 씨 아니었으면 운전하다가 쓰러지거나, 집 앞에서 쓰러지거나 둘 중 하나는 했을 테니까.”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승조를 바닥에 버릴까, 수십 번 고민했던 게 미안해졌다. 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의 상태가 전보다는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몸조리 잘하세요.”
침실 문을 닫은 수희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지하 주차장에 내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희는 텅 빈 듯한 눈동자로 주차장에 서 있었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던 수희는 주머니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정신이 깨어났다. Rrrrr― 통화 버튼을 누른 뒤 귓가에 가져다 대자 철용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희야, 너 어디야? 나 지금 호텔 지하 주차장인데.]
“…….”
[수희야?]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수희가 운을 뗐다.
“오빠, 나 한승조 대표님이랑 연애해.”
잠시 소리가 멎는 듯하더니, 흥분한 철용이 말을 쏟아 냈다.
[연애한다니. 너 진짜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 맞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했잖아.]
벽에 등을 기댄 수희가 목 언저리를 긁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승조가 자신의 품에서 쓰러졌을 때,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었다. 그를 옮기기 위해 다리를 움직일 때도 승조의 입술이 제 목에 닿기도 했다.
“그땐 아니었는데…… 지금은 맞아.”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그때는 아니라니. 최근에 좋아졌다는 거야?]
좋아졌다. 정말 난 한승조가 좋아지기라도 한 걸까. 그 짧은 시간에? 그게 가능할까.
“가끔 같이 있으면 떨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펑 터질 것처럼.”
마치 연애 상담을 하듯 수희는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했다.
“그리고, 대표님이 나한테 닿으면…… 그게 또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나쁘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나한테 닿으면 기분이 안 나빠. 오히려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전화기 너머로 한동안 철용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수희가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쏟아 낸 감정들을 정리하려 할 때였다.
[……너 정말 좋아하는구나.]
“…….”
[한 대표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