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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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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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첫 만남
2022.05.14.
충섭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짤막한 말만 던졌다.
“어, 응. 그래. 알겠다.”
현관에 멀뚱히 서 있던 승조는 충섭이 전화를 끊자마자 물었다.
“아빠가 뭐라고 하세요?”
“오늘 오겠대. 공항에 밤 9시쯤 도착한다는구나.”
병호가 친가로 온다는 말에 승조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행복해했다.
1년 만에 보는 환하게 웃는 승조의 얼굴에 충섭과 영숙은 적잖게 놀랐다.
승조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승조를 보고 충섭과 영순이 따라 들어왔다.
승조는 오래된 옷장 옆에 두었던 캐리어를 꺼내 그 안에 자신의 옷가지들을 마구 구겨 넣었다.
지켜보던 영순은 엉뚱한 승조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가방은 왜 싸는 거야?”
“아빠 오신다면서요. 미리 짐 싸 놔야죠.”
영순이 승조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데, 충섭이 영순의 팔을 붙잡아 끌고 나왔다.
충섭은 승조의 방문을 닫아 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병호가 말하게 놔둬.”
“애가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놔둬. 나라도 말을 해 줘야지.”
다시 승조 방 안으로 들어가려는 영순을 충섭이 온 힘을 다해 붙잡아 말렸다.
“우리가 말하면 더 상처받을 거야. 애 생각도 해야지.”
“애 생각을 해서 내가 이러는 거 아니야.”
답답하다는 듯 영순이 자신의 마른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그때, 문이 열리고 미리 캐리어에 짐을 싸 둔 승조가 나왔다.
영순은 막상 미소를 띠고 있는 승조를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너무나 어리게만 느껴지는 승조가 실망을 감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일찍 올게요.”
자신을 친가에 맡긴 아버지가 처음으로 오는 날이니 승조는 들뜰 수밖에 없었다.
집을 나서는 승조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고 충섭과 영순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승조가 복도를 지나가자 여학생들은 남몰래 뒤에서 바라만 봤다.
다가서고 싶어도 승조는 매번 가까이 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승조는 남학생들에게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2학년 2반에서 나온 세 명의 남자 무리 중 한 명이 승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양아치 무리였다.
“야. 오늘 우리 반 여자애들이랑 노래방 가기로 했는데, 같이 고고?”
평소에 인사도 하지 않는 사이인데 친한 척을 해 오자 승조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내가 네 팔걸이야?”
냉담한 승조의 반응에 남학생은 주변에 있는 여학생들을 살폈다.
여학생들이 작게 “꺄꺄!” 하며 승조를 보고 있자, 남학생은 으스대며 승조에게 더 가까이 밀착했다.
“오늘부터 네가 하면 되겠네, 내 팔걸이.”
“싫은데.”
단답형으로 톡 쏜 승조가 제 어깨에 있는 남학생의 팔을 던지듯 치웠다.
그러고는 남학생이 말을 더 붙이기도 전에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남은 무리는 여학생들의 비웃음에 이를 갈았다.
“재수 없는 왕따 새끼. 놀아 주니까 내가 우습지?”
가슴을 활짝 편 남학생이 승조에게 들으라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귀가 아플 정도로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도 승조는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한승조 멋있다니까.”
“그러니까. 왕따를 당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애들을 따돌리는 거잖아.”
“서울에서 온 왕자님이 바다에서 사는 생물들이랑 놀려니까 물이 안 맞는 거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자신의 앞담화에 무리는 언짢은 표정으로 승조를 바라봤다.
저 반반하기만 한 얼굴 때문에 여학생들에게 칭송을 받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승조가 아니면 같이 놀아 주지 않겠다는 여학생들 때문에 더욱 화가 난 상태였다.
하교 시간만 기다리고 있던 승조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가방을 메고 집으로 향했다.
뛰다시피 해서 집에 도착하자 미리 저녁 준비 중이던 영순이 승조를 맞이했다.
“일찍 왔네.”
“오늘 6교시만 해서요. 아빠는 아직 안 오셨죠?”
벽에 붙어 있는 뻐꾸기시계를 본 영순이 답했다.
“아직 네 시간 넘게 남았지.”
“아, 그럼 뭐 하고 있어야 하지.”
“일단 씻어야지.”
영순이 대신 답을 알려 주자 승조가 방으로 들어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가지고 나왔다.
욕실로 들어가는 승조를 보며 영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좋나.”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 주기 위해 영순과 충섭은 부단히 노력을 했었다.
무뚝뚝한 승조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매일 따뜻한 밥으로 사랑을 주려 했다.
그럼에도 부모가 주는 사랑보다는 못한 건지, 승조의 온 신경은 병호에게만 쏠려 있었다.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여겼다.
다만, 저 아이에게 행복과 함께 올 실의가 눈에 선해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밤 10시가 돼서야 본가에 병호가 도착했다.
병호는 작은 가방 하나만 손에 쥔 채로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거실에서 졸고 있던 승조는 쇠문이 열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아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승조가 병호에게로 달려갔다.
차마 낯간지러워 안기지는 못하고 승조가 제자리걸음을 했다.
1년 만에 보는 아버지는 예전과는 달리 잔주름 몇 개가 늘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이라든지, 반듯한 와이셔츠만 봐도 여전히 자신의 멋진 아버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존재였다. 업무로 인해 자신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는데도 아버지가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기보다는 감사함이 먼저였다.
자신이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건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니 사랑은 나중에, 아버지에게 여유라는 것이 생겼을 때 받아야겠다고 미뤄 뒀었다.
“잘 있었어?”
병호가 승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훑자 승조는 드디어 안식처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녁은 먹은 게냐?”
소파에 앉아 있던 충섭이 일어서며 묻자, 병호가 승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비행기 안에서 챙겨 먹었어요.”
승조는 옆에 서 있는 아버지를 우러러봤다.
“오늘은 자고 내일 출발하는 거죠?”
“응. 내일 새벽 5시 비행기라 여기서 자고 중국으로 갈 거야.”
중국으로 간다는 말에 승조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승조가 물어본 말의 의미는 자신과 함께 서울로 가냐는 거였다.
목 위에 누군가 돌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막 안방에서 나온 영순과 병호가 대화를 나누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병호의 목소리도 먹먹한 귓가에선 그저 웅웅댈 뿐이었다.
“중국…… 중국을 왜 가요?”
겨우 꺼내 물은 말에 충섭과 영순, 병호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나 데리러 온 거 아니었어요?”
“……오늘은 오랜만에 시간 나서 잠시 너 보러 온 거였어.”
잠시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병호는 자신을 데리고 서울로 갈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피곤한 듯 병호가 승조의 눈길을 거부했다.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1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리움으로 보내서일 것이다.
“나 아빠랑 갈래요. 중국이든, 서울이든, 나 아빠랑 있을래요.”
아빠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열네 살, 아빠가 자신을 두고 떠났을 때부터 쭉 해 왔었다.
그러나 오늘도 참게 된다면 영영 자신의 마음 따위 아빠가 이해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왜 안 부리던 어리광을 부려.”
아들이 부리는 외로움의 몸부림을 병호는 어리광이라 치부했다.
“아빠 피곤하니까 그만하자.”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 낸 병호가 승조에게 등을 보였다.
온 세상에 혼자만 남은 듯한 기분. 승조는 고작 열세 살에 절망이라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다음 날 새벽, 병호는 정말 승조를 두고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
또다시 혼자 남은 승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교로 향했다.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또 수업을 들었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담아 두지 않았다.
아빠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떠올리지도 않았다.
“모두 주말 잘 보내고, 게임 늦게까지 하지 말고. 반장 인사.”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에 승조는 벌써 학교가 끝마쳤다는 걸 깨달았다.
담임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 어제 승조에게 말을 걸었던 일진 무리가 다가왔다.
“야, 한승조. 우리랑 이야기 좀 하자.”
건들거리는 남학생의 말에 승조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며 일어섰다.
“너랑 말할 기분 아니야.”
“야! 나랑 말할 기분은 뭔데!”
뒤에서 무리의 목소리가 들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교실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등 뒤를 힘껏 치더니,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았다.
승조의 양옆에 붙은 건 일진 무리 중 두 아이였다.
“이거 안 놔?”
승조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은 일진들은 운동장의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로 그를 끌고 갔다.
쾨쾨한 곰팡이가 피어오른 창가 안으로 승조를 집어던진 일진들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쓰러진 승조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일진들이 비웃음을 날렸다.
“부모도 없는 새끼랑 어울려 주려고 했는데, 급이 안 맞아서 도저히 못 놀아 주겠다.”
부모가 없다는 말에 승조의 눈시울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부모가 없어!”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일진들은 킥킥거리며 웃어 댔다.
“있으면 왜 운동회도, 학예회도, 입학식에도 안 오셨는데?”
중심에 있던 우두머리의 말에 옆에 붙어 있던 마른 체형의 남자아이가 합세해 비아냥댔다.
“야, 야. 얘 입학식 때 할머니, 할아버지 오셨어.”
“그럼 왜 운동회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 안 오셨대? 우리 손자 외롭게?”
“무릎 나가면 돈이 얼만데. 집에서 푸우우욱 쉬셔야지.”
빈정대는 일진 무리의 말에 승조가 더는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던 찰나였다.
일진 무리가 녹이 슨 쇠문을 밀어 닫아 버렸다.
순간 암흑이 되어 버린 창고 안에서 승조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
“아들이 집에 안 돌아오면 엄마, 아빠가 찾으러 와 주시겠지. 내일도 거기 있으면 우리가 꺼내 주고.”
실컷 빈정거리던 아이들이 멀어지자 승조는 그제야 자신이 갇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쇠문에 바짝 붙어 선 승조가 주먹으로 문을 내리쳤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뼈가 울릴 정도로 손이 아픈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주먹 쥔 손에 멍이 들 정도로 문을 두들겨 봤건만, 운동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창고를 지나가는 사람 자체가 없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월요일이 돼서야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웠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려운 이곳에서 며칠이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숨소리는 점차 얕아지고, 그와 반대로 심장은 떨어질 것처럼 크게 뛰어 댔다.
몸 안에 있는 피가 바짝 마르는 느낌과 함께 눈앞에 있는 문이 멀게만 느껴졌다.
주춤거리던 승조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고, 늪으로 빠지는 것처럼 몸이 점점 뒤로 기울었다.
바닥에 쓰러진 승조는 얼마 가지 못해 정신을 잃고 말았다.
차가운 흙바닥에서 눈을 뜬 건 두 시간이 훌쩍 지나서였다.
교복이 흙투성이가 된 승조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거미줄이 쳐져 있는 천장이었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운 승조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휴대폰을 들었다.
넘어지면서 휴대폰이 떨어져 망가진 건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다시금 몰려오자 승조는 손이 덜덜 떨려 왔다.
“후우, 후우.”
길게 숨을 쉬려 애쓰던 승조가 문으로 기어가 손으로 두드려 소리를 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절로 살려 달라는 말이 나왔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아서였다.
“여기 사람 있어요! 살려 주세요!”
마지막 발악을 하던 승조가 힘껏 주먹으로 문을 때렸다.
힘이 빠져 버린 승조가 뒤로 나가떨어진 순간이었다.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쇠문의 틈이 벌어지더니 노을빛이 새어 들어왔다.
두 손으로 바닥을 밀어낸 승조가 상체를 일으켜 세워 고개를 들자, 축구공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낀 여자아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살려 주면 돼요?”
그날이 수희를 처음 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