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첫 번째, 서로에 대해 알아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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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첫 번째, 서로에 대해 알아 가기
2022.05.21.
문이 열리고 안으로 밀려들어 온 것은 스탠드 옷걸이 세 개였다.
스탠드 옷걸이는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브랜드의 옷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스탠드 옷걸이를 밀고 들어온 스타일리스트가 수희에게 알려 주었다.
“대단하죠. 이거 전부 ON 편집숍에서 협찬해 주신 거예요.”
서울에서 가장 큰 편집숍 중 하나였기에 처음 들어 보는 곳은 아니었다. 다만, 왜 자신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양의 옷을 협찬해 주는 건지가 궁금했다.
“거기서 왜?”
스타일리스트가 잔뜩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남자친구 편집숍이잖아요.”
편집숍 두 군데를 운영 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울에서 가장 큰 ON 편집숍일 줄은 몰랐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자 스타일리스트와 숍 직원의 따가운 눈빛이 이어졌다.
다물어져 있던 입술을 어색하게 벌린 수희가 말했다.
“아, 편집숍을 가지고 있다고만 들었거든.”
“이제 아셔야겠네. 자주 협찬해 주실 텐데.”
다행히 다른 사람들의 큰 의심을 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승조의 독단적인 행동에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쯤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거대한 꽃바구니 하나가 쳐들어왔다.
분홍색 꽃들이 빽빽이 박혀 있는 꽃바구니를 보며 수희는 저게 자신의 것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수희야, 이거 받아.”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저 큰 꽃바구니의 주인은 수희였다.
꽃바구니 뒤에 감춰져 있던 머리를 옆으로 빼꼼 내민 철용이 낑낑거렸다.
수희는 느닷없는 꽃바구니의 출처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꽃바구니를 받은 사람은 수희인데 스타일리스트와 숍 직원들이 되레 행복에 빠진 얼굴이었다.
“이제 공개 연애 한다고 사람들 눈 신경 안 쓰시려나 보다.”
두 손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꽃바구니는 승조가 보낸 것이었다.
꽃바구니 가운데에는 네모난 편지지가 꽂혀 있었다.
편지지에 적힌 글씨는 멀리 있는 사람의 눈에도 들어올 만큼 굵고 진했다.
[오늘 하루도 힘내요.]
짧은 글귀에는 별다른 의미가 담겨 있지 않았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다르게 와닿는 듯했다.
“수희 씨, 남자친구분 얼굴도 자상하시더니, 마음도 엄청 자상하시네요.”
“맞아. 바쁘실 텐데 이렇게 예쁜 꽃도 보내고.”
“힘내래. 이걸 보면 어떻게 힘이 안 나요.”
보여 주기식의 꽃이라는 걸 수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흔한 문구를 골라 굳이 편지를 꽂아 넣은 것이다.
아무리 공개 연애라 하더라도, 둘은 평범한 연인들과는 달랐다.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는 진짜 연인이 아닌, 이득을 위해 손을 잡은 협업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폭죽도 알고 있으면 덜 놀라는 법, 적어도 언질은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문이 열린 단독 룸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소란스러운 내부를 눈으로 흘깃거렸다.
‘이거 좀 억울하네.’
승조는 수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수희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수희는 승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아는 거라고는 그의 이름, 나이, FL그룹 외동아들에 현 스튜디오 그린 대표라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승조와 관련된 내용에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게 당연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승조와 관련된 주제를 꺼내며 대화를 유도할 것이다.
그때마다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해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를 만나 한승조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 가야 했다.
***
[우리 만나요.]
간단하고 직설적인 메시지에 승조는 별안간 웃음이 터졌다.
‘꽃바구니를 본 건가.’
승조는 오늘 아침, 차 비서에게 전해 받은 수희의 공식 일정들을 확인했다.
예정되어 있던 기사들이 터지는 날이니,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ON 편집숍에 연락을 취해 수희에게 옷을 협찬했고, 직접 꽃집으로 가 수희에게 줄 꽃바구니도 예약했다.
“문구는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원래 꽃바구니만 보낼 생각이었기에 승조는 갑작스러운 꽃집 주인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꼭 문구가 따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들어가면 선물 받으시는 여자분께서 훨씬 좋아하실 텐데요?”
‘훨씬’이라는 단어에 승조는 그 자리에 서서 30분을 고민했다.
고민의 시간에 10분을 더하려던 찰나, 차에서 대기하던 차 비서가 나타나 어쩔 수 없이 가장 무난한 말을 넣게 되었다.
내심 만족했던 승조는 수희에게도 마음이 전해져 곧바로 메시지가 왔다 생각했다.
흐뭇한 미소를 숨기지 못한 승조가 엄지를 움직여 휴대폰 액정을 두드렸다.
[안 그래도 계약서 때문에 만나려고 했습니다. 어디에서 보는 게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면 대표님 회사에서 보죠.]
수희는 승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답이 돌아왔다.
[그럼 7시에 스튜디오 그린에서 보는 걸로 하죠.]
[알겠어요.]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밀어 넣고 나서야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긴 테이블에는 FL 패션몰 팀장들이 붙어 앉아 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 회의 중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던 승조가 테이블 위에 있던 회의 자료를 들어 올렸다.
“회의 마저 하시죠.”
승조의 말이 떨어지자 잠시 중지되었던 회의가 재개되었다.
팀장들의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승조는 다시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머릿속이 이미 수희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시간은 12시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수희를 만나려면 일곱 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빨리 수희를 만나 옷은 잘 맞았는지, 꽃바구니는 어땠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보자고 할 걸 그랬나.
조급한 승조는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회의 중이던 팀장들의 이목이 승조의 손가락으로 쏠렸다.
움직이는 검지를 따라 팀장들의 눈이 바쁘게 위에서 아래로 흘러갔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희는 텅 빈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선글라스 때문에 제대로 못 보는 건가 싶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아래로 내렸다.
스튜디오 그린 로비도 한산하더니, 대표실이 있는 층수는 사람 한 명 찾아보기 힘들었다.
쓰고 온 선글라스가 머쓱해진 수희가 선글라스를 벗어 핸드백 안으로 밀어 넣었다.
대표실 앞에 선 수희는 예의상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를 빼꼼 안으로 밀어 넣었는데, 약속했던 승조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운 수희는 주인 없는 방에 선뜻 들어가지 못했다.
“약속했으면서 어딜 간 거야.”
“여기 있습니다.”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수희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깜짝이야.”
뒤로 돌아선 수희는 눈앞에 보이는 넓은 가슴팍에 시선을 끌어 올렸다.
목이 뻐근해질 만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승조와 눈이 마주쳤다.
긴장한 어깨를 내려놓는 수희를 지나쳐, 승조가 대표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들어가죠.”
수희는 대표실 밖을 눈으로 훑어보며 물었다.
“벌써 퇴근했을 시간이긴 한데, 건물에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오늘 창립 기념일이라 직원들 출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자고 한 거고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수희가 대표실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승조는 손에 들려 있던 종이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게 뭐예요?”
수희의 물음에 승조는 종이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초밥 세트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저녁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사 왔습니다.”
매번 건조하게 뱉어 내는 어조와는 달리 승조는 섬세하게 수희를 챙겼다.
테이블 위에 저녁을 준비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젓가락 종이 포장지의 윗부분을 뜯어 젓가락 끄트머리가 드러나게 해 두었다.
오른편에는 휴지와 물티슈를, 물과 포도 맛 음료는 쏟지 않게 왼편에 두었다.
사 온 초밥을 전부 세팅한 후에야 승조는 테이블을 눈짓했다.
“앉아요.”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나온 자리가 아니었지만, 손수 저녁을 준비해 주니 안 먹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먹을게요.”
자리에 앉은 수희는 건너편에 있는 승조를 보며 젓가락을 포장지에서 빼냈다.
“그런데 끼니를 굉장히 중요시하시네요.”
전에는 굳이 죽까지 손에 들려 주더니.
“일 때문에 밥 거르는 일이 많을 것 같아서요.”
결국에는 수희의 저녁을 챙겨 주기 위해 초밥을 사 왔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말이 조금이라도 친절했다면 수희는 승조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승조가 이 이상의 친절을 베푼다면, 지금 피어나고 있는 이 감정이 커지는 데 한몫을 할 것 같았으니까.
입 안에 새우초밥을 밀어 넣던 수희는 무심결에 승조의 초밥을 바라봤다.
반 정도가 새우 종류의 초밥인 수희와 달리, 정갈하게 놓인 승조의 초밥의 종류는 다양했다.
‘내가 새우초밥 좋아하는 거 알고 이걸로 주문해 온 건가?’
일부러 새우초밥을 사 온 거라 느낀 데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좋아하던 브랜드의 포도 맛 음료까지 준비해 줬기 때문이다.
한때 팬들이 수희에게 ‘포도송이’라는 애칭을 붙여 줬을 만큼 좋아하는 음료였다.
이런 세세한 취향을 아는 건 팬들밖에 없었다. 기껏 더해 봐야 매니저인 철용이 있을 것이다.
만약 승조가 수희의 취향을 알기 위해 철용에게 연락을 취했다면, 철용은 분명 그녀에게 승조에게서 연락이 왔었다고 이야기해 줬을 것이다.
‘진짜 내 팬이구나.’
승조가 잘해 주는 데에는 역시나 이유가 있었다.
팬이기 때문에 자신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 아닐까.
알고 나니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다만 의문이 해결된 것과 다르게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지금까지 나한테 잘해 준 게 팬이라서 그런 거잖아.’
조금의 사심도 없는 팬심. 수희는 내심 그게 서운해졌다.
밥알이 목에 걸린 것처럼 입에 있는 초밥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한승조 대표님이 나한테 마음이 없을 수도 있잖아. 왜 다른 마음이 있길 바란 것처럼 기분이 안 좋은 거지?’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스스로 하며 수희가 초밥을 깨작였다.
“입에 안 맞습니까?”
고작 새우초밥 세 개만 먹고 젓가락질이 느릿해진 수희를 보고 승조가 물었다.
사 온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 수희는 고개를 저으며 초밥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아뇨. 맛있네요.”
입맛을 잃은 수희는 꾸역꾸역 몇 피스를 더 먹고 젓가락을 내려 두었다.
마찬가지로 식사를 끝낸 승조가 입가를 냅킨으로 닦아 냈다.
“오늘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겁니까?”
승조를 만나러 온 목적을 잊어버렸던 수희는 순간 아차 싶었다.
“한승조 대표님은 저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시는데, 거기에 비해 제가 대표님에 대해 아는 건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대표님에 대해 알아야 실수 없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테니까요.”
승조가 자신의 인적 사항을 읊어 준다면 수희는 그 자리에서 외울 생각이었다.
배우가 직업이라 암기에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일리가 있다는 듯 승조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몇 마디 말로 수희의 의도가 전해진 듯했다.
“그럼 나에 대해 알아 가면 되겠네요.”
아주 다른 쪽으로 말이다.
“데이트하죠.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