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두 번째, 스킨십은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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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두 번째, 스킨십은 필수
2022.05.24.
“데이트하죠. 내일.”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괏값 도출에 수희는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긴 침묵을 이어 가던 수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왜 끝이 데이트가 되는 거예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서로를 알아 가는 데 유익한 건 없죠.”
뭔가 옳은 말만 하고 있는데, 묘하게 틀린 말 같기도 했다.
“그거 말고 다른 방법도 있을 텐데요.”
“이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단정을 내리는 그에게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길어 봤자 일주일이면 열애설에 관한 관심은 사그라들 겁니다.”
“…….”
“오수희가 복귀하기 전까지는 꾸준히 우리 연애에 대해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도 좋겠죠.”
수희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공개 데이트를 한다면 좀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열애설을 더 뜨겁게 달굴 수 있는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알겠어요. 해요, 데이트.”
까짓것 하지 뭐, 데이트.
어려울 거 없을 것이다. 보통 연인들처럼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집에 데려다주면 될 테니까.
데이트를 해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펼치던 연기와 크게 다를 거 없었다.
어차피 승조와 하는 이 연애도 연극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승조는 테이블 위에 있는 초밥 접시를 한쪽에 치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있는 결재판을 가져와 수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임의로 작성한 계약섭니다. 필요한 사항들 있으면 추가하도록 해요.”
수희가 손을 뻗자 승조가 물었다.
“읽을 수 있습니까?”
“괜찮아요. 대본만 아니면 읽을 수 있어요.”
펼쳐진 결재판이 손에 들어오자 수희는 종이 위에 적힌 조항들을 확인했다.
1. 한승조와 오수희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짜 열애에 열의를 다한다.
2. 결별 기사 발표는 오수희가 무사히 복귀를 끝마친 이후로 설정해 둔다.
3. 결별 기사가 나온 후에도 한승조는 오수희가 원할 때까지 서포트를 계속한다.
4. 계약서에 관한 내용은 모든 이들에게 비밀에 부친다.
군더더기 없는 계약서라 수희가 수정을 할 건 없어 보였다.
대신 추가할 게 하나 있었다. 결재판 위에 끼워진 펜을 든 수희가 아래에 숫자 하나를 추가했다.
이어 거침없이 쓱쓱 적어 내려간 수희가 승조에게 추가로 적은 내용을 보여 주었다.
“이 조항도 들어갔으면 좋겠는데요.”
바른 글씨로 적힌 추가 사항에 승조의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5. 상황에 따라 신체 접촉을 허용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에 승조는 계약서와 수희를 번갈아 봤다.
“이 조항이 들어가도 괜찮은 겁니까?”
“카메라가 없다 뿐이지, 대표님이랑 연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한승조가 상대 배우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을 것도 없었다.
연애를 인정해 놓고 사람들 앞에서 거리를 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필요하다면 손도 잡아야 할 것이고, 팔짱도 껴야 할 것이다.
가끔 승조에게 두근거리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다고 이 연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연기는 완벽하게 하고 싶거든요.”
승조는 수희가 적은 마지막 조항을 눈여겨보는 듯했다.
그제야 수희는 승조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수희는 배우지만, 승조는 비연예인이었다.
연인 사이도 아닌 그녀와의 스킨십이 불편할 수도 있었다.
자기 생각만 한 것 같아 수희가 제안을 거둬들이려고 했을 때였다.
“좋습니다.”
짧은 고민을 끝마치고 승조가 수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된다면 굳이 마지막 조항은 넣지 않아도 돼요.”
무를 필요 없다는 듯 승조가 결재판을 덮었다.
“아뇨, 이렇게 계약서 수정하도록 하죠.”
스킨십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승조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오수희 씨 의견대로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려면 스킨십은 필요할 것 같네요.”
오히려 사무적인 태도에 수희는 내심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구태여 티 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팬이라고 하더라도 승조에게 수희는, 굳이 따지자면 ‘사’보다는 ‘공’에 가까울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승조가 컴퓨터 앞에 앉아 계약서를 수정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승조는 책상 위에 있던 프린터에서 계약서 두 부를 인쇄했다.
계약서 내용을 눈으로 한 번 훑은 승조가 테이블 위에 펜과 계약서를 내려 두었다.
“읽어 보고 사인해요.”
조금 전에도 읽었던 계약서인데 수희는 몇 번이나 더 내용을 확인했다.
오른쪽 구석에 있는 서명란에 사인을 마치면 정말 이 계약이 성사될 것만 같아서였다.
펜을 든 수희가 서명란에 펜촉을 가져다 댔다.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이내 종이 위를 시원하게 갈겼다.
이로써 승조와의 계약이 성사됐다.
***
스튜디오 그린 지하 주차장에 내려온 수희가 옆에 서 있는 승조에게 몸을 틀었다.
각자 자신의 차를 타고 왔기에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수희는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차를 바라봤다.
“가 볼게요.”
“내일 보죠.”
수희는 승조와의 데이트를 아주 잠깐 잊고 있었다.
오늘도 보고, 내일도 보고. 이러다가 매일 보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남몰래 설레는 마음을 고이 접어 넣은 수희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내일, 봬요.”
수희가 자신의 차로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승조가 수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반쯤 틀어졌던 몸을 다시금 승조에게 돌린 수희가 큰 눈을 깜박였다.
왜 그러냐고 물을 틈도 없이 승조는 수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머뭇대던 수희는 승조를 밀어내지 못하고 그의 품에 폭 안기고 말았다.
그는 수희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단단한 팔로 허리를 감쌌다.
그가 바짝 밀착해 오자 수희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졌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수희가 승조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허리를 숙인 승조가 수희의 귓가에 바짝 얼굴을 가져다 댔다.
“직원들이 보고 있어서요.”
수희는 눈동자를 굴려 옆을 보려고 했다.
시야 끝에 차 안에 앉아 수희와 승조를 보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닌 걸 확인한 수희는 공중에 떠 있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안은 이유가 직원들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자 밀어낼 수가 없었다.
“손, 너무 어색한 거 아닙니까?”
승조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수희의 손을 눈짓했다.
귀를 스칠 듯 말 듯 간질이는 승조의 입술 때문에 머리가 하얘져 손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수희가 긴 숨을 내쉬며 소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했다.
‘프로답게 하자. 연기나 다를 거 없어.’
어려울 거 없었다. 그저 승조의 허리를 감싸면 될 일이었다.
손가락을 펼친 수희가 승조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승조가 수희를 좀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자신을 덮치는 승조의 묵직한 향수 냄새와 포근한 온기에 수희의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이런 애드리브는 상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배우는 수희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승조가 배우처럼 능숙하게 보였다.
얼굴이 새빨개진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승조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적잖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수희의 모습에 승조가 여유로운 어조로 말을 흘렸다.
“상황에 따라 신체 접촉을 허용한다,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싶습니까?”
자신이 추가해 둔 조항이 이렇게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수희의 예제 속에 있던 스킨십은 손잡기, 팔짱 끼기 정도였다.
이렇게 애틋한 포옹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고작 포옹 한 번에 굳어 버린 수희는 괜히 오기 같은 게 생겼다.
“아뇨. 전혀요.”
고개를 짧게 저은 수희가 승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쿵쾅, 쿵쾅. 북소리 같은 게 수희의 귓가에 울렸다.
이게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승조의 심장 소리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수희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자연스럽게 차 안에 있는 직원들을 바라봤다.
시동이 걸린 차는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좌석에 앉아 있는 직원들은 기대에 잔뜩 찬 얼굴로 승조와 수희를 관람할 뿐이었다.
“왜 직원들은 안 가고 계속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속삭거리는 수희의 목소리에 승조가 답했다.
“다른 게 더 보고 싶은가 보죠.”
퍼뜩,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거라면…….”
설마.
키, 키, 키스?
수희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차마 입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가 승조에 의해 점차 잡아먹히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승조의 얼굴에 수희는 피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승조의 숨결이 수희의 입술 위를 간질이자, 수희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까지 하려는 건데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승조의 한쪽 입술이 씩 올라갔다.
“글쎄, 우리가 어디까지 할지는 안 정해 뒀잖습니까?”
억울하게도 이 계약의 갑은 수희가 아닌 승조인 듯했다.
수희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승조의 오른손이 어느새 뺨 위로 올라왔다.
보드라운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만 같아 수희는 숨을 터트리지 못한 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서로의 코끝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가자 수희가 결국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희가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이미 뒤로 얼굴을 물린 승조가 말했다.
“오늘은 리허설 정도로 해 두죠.”
리허설이라니.
다음에는 정말 입이라도 맞추겠다는 거야?
스르르 벌어진 턱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승조는 참으로도 친절하게 수희의 턱을 손으로 올려 닫아 주었다.
“잘 가요.”
먼저 돌아선 승조가 차에 올라타자, 두 사람을 지켜보던 차가 그제야 출발했다.
잔잔한 엔진 소리가 주차장에 울리고, 승조의 차가 수희를 지나쳐 유유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휘청이려는 다리를 겨우 붙잡은 수희는 얼이 빠진 얼굴로 한탄했다.
“한승조, 뭐야?”
나랑 진짜 키스를 하겠다고?
남들 속이기 위해서는 물불 안 가리겠다 이거야?
승조가 간과한 게 있었다. 수희가 배우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유달리 강했던 열등감과 지는 걸 싫어하는 승부욕 때문이었다.
상대 배우가 자신보다 연기를 더 잘할수록 수희는 그 배우를 뛰어넘기 위해 밤잠도 미루고 연습에 매진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배우인 자신보다 연기에 더욱 진심인 승조를 보자 참을 수 없는 열등감에 빠졌다.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운 수희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이렇게 끌려만 다니고 있지는 않지.”
나, 오수희야.
지하 주차장에 남아 있는 수희를 사이드미러로 보던 승조가 눈길을 떼어 냈다.
시선은 앞쪽으로 가져왔지만, 정신은 온통 수희에게 쏠려 있었다.
수희를 안은 건 의도된 행동이었다. 직원들이 수희와 자신을 목격하고 회사 내에 파다하게 소문을 퍼뜨리길 원해 한 포옹이었다.
그러나 수희에게 입을 맞출 뻔했던 건,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수희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작은 먼지를 떼어 주려 했었다.
그런데 눈을 감는 수희를 보니 허락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장난스럽게 수희에게 말을 던지려고 했는데, 시선이 긴장한 채로 다물린 수희의 입술로 향했다.
과즙이 새어 나올 것처럼 빨갛고 반질거리는 수희의 입술을 보니 욕구 하나가 솟아났었다.
키스, 하고 싶다.
“하아,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말을 다 잇지도 못한 승조는 얼마 가지 못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운전석에 머리를 기댄 승조의 귓가는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시동만 켜진 차의 비상등이 한참 동안 깜빡이기만 했다.
5. 상황에 따라 신체 접촉을 허용한다.
뒤늦게 추가한 이 조항은 이후 두 사람에게 커다란 변화를 안겨 주리라는 걸 이때까지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