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세 번째, 계약 파기는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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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세 번째, 계약 파기는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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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세 번째, 계약 파기는 불가
2022.05.28.
다음 날, 오후 일정인 잡지 커버 촬영을 위해 수희가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파우더 룸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에서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수희가 의자에 앉자, 스타일리스트가 수희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수희는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승조에게 온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메시지 함을 들어가 보아도 승조가 보내온 메시지는 없었다.
일이 바빠 오늘 저녁 약속을 잊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조의 메시지를 기다리던 수희가 먼저 메시지를 작성해 보냈다.
[오늘 저녁 몇 시에 볼까요?]
전송 버튼을 막 눌렀을 무렵이었다.
문을 열고 잡지 촬영 스태프가 안으로 들어왔다.
“수희 씨, 촬영 들어갈게요.”
옷깃을 매만지던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떨어지자 수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살핀 수희가 파우더 룸을 막 나섰을 때.
딩동, 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반짝였지만 수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촬영은 막힘없이 순조로웠다.
사진작가가 일일이 요청하지 않아도 수희는 프로답게 포즈를 바꿨다.
철용은 모니터 화면에 뜬 수희의 사진을 확인하며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간이 수희에게 손짓으로 피드백을 보내던 철용이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몇 컷을 더 찍은 후에야 길었던 화보 촬영이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잡지사 에디터와의 인터뷰였다.
의자 두 개가 하얀색 크로마키 스크린 앞에 놓이고, 미리 질문지를 가져온 에디터가 의자에 앉았다.
불편했던 촬영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수희도 에디터 앞에 앉았다.
“실물로 만나 뵌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오늘 촬영 결과물 너무 멋진 것 같아요.”
“칭찬 감사합니다. 촬영 콘셉트가 좋아서 결과물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짧은 덕담이 오고 가고, 에디터가 질문지를 훑어보며 말문을 열었다.
“바쁘실 테니 인터뷰 바로 들어가도 될까요?”
“네, 좋아요.”
에디터가 싱긋 웃으며 휴대폰 녹음기를 켠 후 질문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금 가장 화젯거리인 게 오수희 씨께서 열애 중이라는 사실이잖아요. 남자친구분께서는 오수희 씨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미리 질문지를 읽었기에 수희는 자연스럽게 준비된 답을 꺼냈다.
“제, 버팀목이요.”
“오, 버팀목이요. 왜 버팀목으로 정의하신 걸까요?”
“제가 최근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그 사람으로 인해서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었어요. 만약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복귀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에디터는 굉장히 집중한 얼굴로 수희의 말을 경청했다.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건, 인터넷을 떠돌던 소문 때문일까요?”
수희가 잔잔한 미소를 띠자 에디터가 대충 알아들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임신 스캔들에 대해 언급한 건 수희의 계획안에 있는 일이었다.
어제 승조와 저녁을 먹은 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던 중. 승조가 수희에게 한 말이 있었다.
“혹시나 임신 스캔들에 대해 기자나 다른 사람들이 물었을 때, 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요?”
“회피는 사람들에게 좋은 망상 거리를 심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승조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수희는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어쩌면 괜히 제 입으로 임신 스캔들을 언급하는 것이 겨우 덮어 놓은 일을 들쑤시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승조와 손을 잡게 된 이상, 그를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오늘 인터뷰 수고하셨습니다.”
30분가량의 인터뷰가 끝이 나고, 에디터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이 허리를 숙였다.
수희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세우고는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갔다.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린 수희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뒤따라 들어온 철용이 수희에게 겉옷을 건네주며 물었다.
수희는 촬영 중에 한 번도 보지 않았던 휴대폰이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 있던 휴대폰을 가져온 수희가 시간부터 확인했다.
벌써 8시가 지나고 있었고, 액정에는 메시지 두 개가 들어와 있었다.
철용에게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수희가 승조의 이름이 떠 있는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7시에 보는 걸로 하죠.]
이건 세 시간 전에 온 메시지.
[다 끝나면 연락해요.]
그리고 마지막에 온 메시지는 불과 10분 전에 온 거였다.
마치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수희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 철용의 손에 있는 외투를 받아 들었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오빠 먼저 퇴근해.”
“약속 장소 어딘데. 데려다줄게.”
그러고 보니 승조와 약속 장소를 따로 정해 두지 않았다.
“잠시만.”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연락을 취하려는데, 갑자기 스타일리스트가 헐레벌떡 파우더 룸 안으로 들어왔다.
“언니! 얼른 밖으로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스타일리스트는 다급하게 수희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데.”
“일단 나와 봐요.”
설명은 제쳐 두고 스타일리스트가 수희를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희는 스타일리스트에게 이끌려 촬영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어두운 건물 앞에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커피 차가 보였다.
커피 차 앞에는 잡지사 스태프들이 옹기종기 서서 커피를 한 잔씩 손에 쥐고 있었다.
커피 차 근처로 다가간 수희가 트럭 위에 붙어 있는 현수막을 바라봤다.
[배우 오수희를 응원합니다]
흰 배경에 분홍색 글씨로 적힌 깔끔한 문구만으로는 누가 보냈는지 특정 지을 수 없었다.
수희는 뒤따라 나오는 철용을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 팬들이 커피 차 보내 주기로 했었어?”
철용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커피 차를 바라보며 눈을 껌벅거렸다.
가끔 익명으로 커피 차를 보내는 이들이 있었기에, 수희는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라 여겼다.
커피 차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스태프들이 수희의 등장에 뒤를 돌아보았다.
“수희 씨, 잘 마실게요.”
“배우님, 커피 맛있게 잘 마시겠습니다.”
스태프들이 감사 인사를 전하자 수희는 얼떨떨해하며 묵례만 했다.
그때, 스태프들이 옆으로 돌아서고 나서야 중심에 서 있던 남자가 보였다.
“이제 나왔습니까?”
마치 임무를 마쳤다는 듯 뿌듯한 표정으로 스타일리스트가 팔짱을 풀어 주었다.
“왜…… 여기 있어요?”
한승조, 이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듯 수희와 승조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 같이 저녁 먹기로 했었잖아요.”
“오오오.”
환호를 내지르는 건 승조의 주변을 빙 둘러싼 스태프들이었다.
저녁을 먹기로 한 건 맞지만, 촬영장에서 보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수희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놀란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랬죠. 그런데 이런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해 줄 줄은 몰랐네요.”
연애 한번 요란스럽게 하는 스타일인 줄은 더더욱 몰랐고.
다른 이들은 낭만적인 상황에 취해 수희의 마음을 읽지 못했지만, 승조만은 수희가 어떤 의도로 꺼낸 말인지 알 수 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승조가 수희의 앞으로 걸어왔다.
“이 정도는 이벤트 축에도 못 끼는데.”
그러고는 수희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는다.
어머, 어머. 사람들은 입으로 손을 가리며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앞으로 많이 놀라겠네.”
한승조는 알고 있었다. 여자들이 무엇에 환호하고, 무엇을 동경하는지.
따스한 눈빛은 정말 수희를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수희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돌았다.
이 정도 스킨십에 가슴 떨려 한 건 어제뿐이다.
수희는 승조의 허리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가슴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다음에도 기대할게요.”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퇴근하는 것도 잊은 듯했다.
수희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철용에게 말했다.
“오빠,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승조의 등장에 어리벙벙해 있던 철용이 뒤늦게 손을 크게 앞뒤로 휘저어 보였다.
“어! 그래, 들어가 봐. 내일 일정 없으니까 푹 쉬고.”
“응.”
승조는 수희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내고, 건물 앞 주차장에 세워진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매너 좋게 조수석 문을 연 승조는 수희에게 안으로 타라고 눈짓했다.
부러운 사람들의 눈길을 뒤로하고 수희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곧이어 승조가 운전석에 몸을 실었고, 차는 사람들을 등지고 도로로 합류했다.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수희가 한마디 했다.
“연애를 굉장히 떠들썩하게 하는 걸 즐기시나 봐요.”
정면을 주시하던 승조가 옆에 앉아 있는 수희를 눈으로 흘겼다.
“이것도 계획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둬요. 우리가 시끄럽게 연애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도무지 그의 정확한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그 관심 제대로 한번 받아 보죠.”
탐탁지 않은 수희의 답에 승조가 물었다.
“지금이라도 계약을 무르고 싶습니까?”
“무르고 싶다고 하면, 없던 걸로 해 주시나요?”
작게 지어 보이는 그의 미소가 벗어날 수 없다고 알려 주는 것만 같았다.
“아뇨. 한번 한 계약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는 파기되지 않으니까요.”
한승조는 수희와의 계약을 파기하지 않을 거라는 말과도 같았다.
그의 계획이 어떻든 수희 역시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없었다.
함께 배를 탄 이상 구명조끼도 없이 바다에 다시 뛰어들 마음은 없었으니까.
***
승조가 수희를 데려온 곳은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한 레스토랑이었다.
예약해 둔 야외 테라스에 앉은 두 사람의 곁으로 지배인이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승조는 보고 있던 메뉴판을 덮었다.
“디너 코스로 주문할게요.”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루이 로드레 크리스털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끄덕이는 승조의 고갯짓에 지배인이 메뉴판을 거두어 갔다.
수희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남산을 바라보았다.
“대표님은 이런 곳을 잘 알고 계셨네요.”
“나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럼 차 비서님께서 예약해 주신 거예요?”
“오수희 씨랑 오려고 찾아봤습니다.”
직접 승조가 찾아봤다는 말에 수희는 의외라고 느꼈다.
그가 대표로 있는 회사만 해도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승조가 직접 나서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혹시 지난번에 보냈던 꽃바구니도 직접 꽃집에 들러 고른 게 아닐까.
“샴페인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수희가 승조에게 물음을 달기 전에, 지배인이 샴페인과 유리잔을 들고 왔다.
유리잔을 두 사람 앞에 놓아 준 지배인이 샴페인을 열어 잔에 따라 주었다.
남은 샴페인을 은색 아이스 버킷 안에 넣은 지배인이 사라지자 승조가 잔의 기둥을 붙잡았다.
“한잔하죠.”
저녁을 먹으며 샴페인 한 잔 정도야 괜찮을 것 같아 수희가 잔을 들어 올렸다.
챙-
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테이블 위로 경쾌하게 내려앉았다.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수희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맛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맛있네요.”
“맛있다고 많이 마시면 취할 수도 있습니다.”
“대표님은 아직 절 잘 모르시네요. 한 잔 정도로는 잘 안 취해요.”
오히려 분위기에 취하는 편이기에 수희는 걱정 없이 한 모금 더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데 승조가 가만히 수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으로 보여 수희도 승조를 바라봤다.
“호칭부터 바꿔야겠네요.”
“호칭요?”
“연인 사이에 대표님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수희는 고민에 빠졌다.
뭐가 좋을까 생각하다가 난데없이 장난기가 샘솟았다.
“오빠?”
“…….”
“…….”
웃어 넘겨 줄 줄 알았건만, 이토록 무반응일 줄이야.
멋쩍어진 수희는 승조와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장난이에요.”
“좋네요.”
“네?”
반쯤 내려앉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린 수희의 눈에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는 승조의 입술이 들어찼다.
“오빠라는 말 마음에 든다고요.”
……아, 아니. 좋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지금 불러 봐요, 오빠라고.”
당장 불러 보라고 할 줄은 더 몰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