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리허설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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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리허설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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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리허설은 끝났다
2022.05.31.
“지금 불러 봐요, 오빠라고.”
왜 내심 기대하고 있는 얼굴인 건데?
꼭 불러 줘야 할 것처럼 승조는 수희의 입술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샴페인 잔마저 내려 두고 승조가 수희에게 집중했다.
“오, 오.”
“…….”
“오빠라고 부를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오빠인가.
승조를 외면한 수희가 절대 오빠라고 부를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한쪽 입술 끝을 들어 올린 승조가 내려 두었던 잔을 다시 들어 올렸다.
“오수희 씨는 싱거운 장난을 좋아하나 봅니다.”
“대표님이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신 거죠.”
승조는 투덜거리는 수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빠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부터 농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 수희는 오빠라고 부르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었다.
그 시절 그녀가 불러 주었던 호칭을 다시 한번 들어 보고 싶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정 그러면 이름을 부르는 걸로 하죠.”
승조의 제안에 수희는 잠깐 고민하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연인 사이에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건 어울리지 않았다.
“음. 알겠어요. 이름 부르는 걸로 할게요.”
뭐든 오빠보다야 낫겠다 싶어 수희가 승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합의가 끝나자마자 지배인이 애피타이저 접시를 가지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희 레스토랑에서 직접 만든 리코타 치즈를 사용해 만든 샐러드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신선한 채소 위에 식용 꽃이 장식되어 있어 눈으로도 즐길 수 있었다.
지배인이 물러가고, 적당한 크기의 치즈와 채소를 입에 넣은 수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음, 맛있네요.”
사르르 입에 녹는 치즈와 아삭한 채소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거기에 샴페인 한 모금을 더하니 입 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이어 나오는 요리들을 맛보던 수희는 어제처럼 승조와 자연스레 저녁을 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의 목적을 잠시 잊고 있던 수희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오늘 보자고 한 거, 대표님에 대해 더 알아 가려고 한 거였는데,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요.”
“나에 대해 궁금한 거 없습니까?”
“물으면 다 답해 주는 건가요?”
“곤란한 질문만 아니라면요.”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내려놓은 수희가 기본적인 것부터 물었다.
“경영 일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예요?”
“스물여덟부터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4년쨉니다.”
“운영하는 회사는 몇 개나 돼요?”
“FL 패션몰, 스튜디오 그린, 압구정하고 청담에 편집숍 하나씩, 그리고 부산에도 곧 편집숍 하나 더 운영할 생각입니다.”
승조는 경청하고 있는 수희에게 되레 궁금증이 생겼다.
“오수희 씨라면 사업 쪽은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요.”
“맞아요. 그런데 주변에서 대표님에 대해 물어볼 때 대답은 해야 하니까요.”
“대표님 말고, 한승조. 이름 불러요.”
입에 붙지 않으니 수희는 자꾸 알면서도 대표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 승조 씨.”
어렵사리 이름을 부르자 승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잘했어요.”
무심결에 승조를 보고 있던 수희는 심장이 ‘쿵’ 하고 갈비뼈를 찧는 것 같았다.
저 미소가 사람을 무방비하게 만들곤 했다.
샴페인 잔 기둥을 만지작거리던 수희가 다시 물음을 달았다.
“대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한국대학교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는요?”
“한국고등학교요.”
진부할 수도 있는 질문들인데 승조는 꾸준히 답을 해 주었다.
“그럼 중학교는 어디 나왔어요?”
그런데 중학교 이야기에 승조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나온 중학교를 잊을 리도 없기에, 수희는 침묵이 길어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나 중학생 시절에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이 주제를 잘못 꺼낸 것만 같아 수희가 말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해담중학교 나왔습니다.”
한참 뒤에야 나온 승조의 답에 수희는 잠시 얼어 버리고 말았다.
수희가 놀란 건 자신이 4학년 때까지 다닌 곳이 해담중학교 옆에 있는 해담초등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신기하네요! 저 해담초등학교 다녔거든요.”
의외의 접점을 찾은 수희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한국대학교랑 한국고등학교는 서울에 있는 학교잖아요. 왜 중학교는 부산에서 다니신 거예요?”
“친할머니, 할아버지 댁이 부산이었습니다. 아버지 일 때문에 부득이하게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죠.”
승조는 말을 꺼내 놓으면서 수희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렇구나. 부산에서 서울 올라올 때 많이 아쉬웠겠네요.”
너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너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네 추억 속에서 나라는 사람은 완전히 도려내진 걸까.
“왜 아쉬울 거라고 생각합니까?”
“부산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을 텐데, 서울로 올라왔을 때 슬프지 않았어요?”
더 많은 힌트를 준다고 하더라도 수희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사귀었던 친구는 여자아이,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무뚝뚝한 성격 때문에 친구를 많이 사귀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오직 한 명밖에 없었다는 뜻일까.
사춘기가 올 만한 시기에 남자가 아닌, 여자와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는 게 의외긴 했다.
수희는 문득 승조의 중학교 시절이 궁금해졌다.
“어떤 친구였어요?”
“말 안 듣고, 고집 세고, 막무가내인 친구였죠.”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수희가 경악했다.
“그런 분이랑 왜 친구를 한 거예요?”
자신의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수희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즐거웠으니까요.”
편안하게 지어 보이는 그의 미소가 수희에게 답을 주는 듯했다.
과거를 추억하는 승조를 보며 수희는 그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이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걸까.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별안간 파리에서 승조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수희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아 주던 승조는 누군가 떠올라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했다.
혹시 그 사람이 승조가 지금 말하고 있는 친구가 아닐까.
“지금도 그분이랑 연락해요?”
무심결에 맞춘 승조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에 가득 담긴 애정은 그 사람을 향해 있는 것만 같았다.
“아직도 연락합니다. 가끔 만나기도 하고.”
“지금도 많이 친한가 봐요.”
“더 친해지고 싶어서 노력 중이죠.”
수희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부러워지려 했다.
어떤 사람이기에 승조가 친해지고 싶어 노력까지 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혹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승조의 말만 들었을 땐 보통 친한 사이가 아닌 듯했다.
더 묻는 건 승조에게도 그 사람에게도 실례가 될 것 같아 질문을 멈췄다.
“더 물을 건 없습니까?”
이어진 승조의 물음에 수희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없어요.”
“그럼 내가 오수희 씨한테 궁금한 걸 물어도 됩니까?”
승조는 자신에게 궁금한 게 전혀 없을 줄 알았다.
웬만한 건 말하지 않아도 승조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어보세요.”
“오수희 씨 초등학교 시절은 어땠습니까.”
수희는 승조가 자신의 어렸을 때를 궁금해할 줄은 몰랐다.
잠시 잊고 있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던 수희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종이가 까맣게 타 버린 것처럼 그 시절의 자신이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갓 서울로 상경한 뒤의 일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한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끝끝내 되살아나지 않는 과거에 수희는 생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은 저한테 중요한 기억들이 아닌가 봐요.”
“…….”
“연기를 시작했던 열세 살부터의 기억은 선명한데, 그 전의 일들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안 나거든요.”
반쯤 식은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며 수희가 승조를 건너보았다.
승조는 말없이 식기를 내려놓고 샴페인만 마시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승조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식사를 마친 수희가 얼마 남지 않은 샴페인 잔을 비웠다.
뒤이어 냅킨을 식탁 위에 올려 둔 승조가 일어서자, 수희도 핸드백을 챙겨 의자를 뒤로 밀어냈다.
야외 테라스를 나온 수희는 먼저 계산대에 서 있는 승조를 발견했다.
몇 번이나 승조에게 신세를 졌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계산하려고 했었다.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낸 수희가 승조의 옆에 섰지만, 이미 승조의 손에는 카드와 함께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제가 사려고 했는데.”
이미 결제가 끝났기에 무를 수도 없었다.
“다음 주에는 오수희 씨가 사요.”
승조는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자연스레 다음 약속을 잡았다.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수희는 레스토랑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다음 주요?”
“일주일에 못해도 한 번, 같이 저녁 식사 하는 걸로 하죠.”
“사람들 앞에서 떠들썩하게 연애하는 모습을 더 보여 줘야 하는 건가요?”
엘리베이터 앞에 우뚝 멈춰 선 승조가 동그란 눈을 한 수희를 내려다봤다.
“아뇨, 내가 아직 오수희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것 같아서요.”
단순히 나에 대한 궁금증인 걸까, 그게 아니면 나에 대해 더 알아 가고 싶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한승조는 내게 이성적 관심이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나를 안을 수 있을 리 없다.
어쩌면 이편이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괜히 사적인 감정이 쌓였다가는, 서로에게 닿는 게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수희와 승조가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어서인지, 거리 위는 한산하기만 했다.
승조는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차를 눈짓했다.
“대리 기사 불렀습니다. 집까지 같이 타고 가죠.”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
여기서 집까지 차로 10분 안팎이었지만 수희는 승조의 호의를 거절했다.
승조의 빌라가 수희의 아파트 근처긴 했지만, 내일 출근해야 할 그의 시간을 굳이 잡아먹고 싶지 않았다.
“택시 잡아 줄게요.”
승조는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수희를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도로 위로 승조가 팔을 뻗었다.
간간이 택시가 지나가긴 했지만 이미 뒷좌석에는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승조 옆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던 수희는 점차 늘어나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다.
어느새 수희를 알아본 사람들이 근처를 배회하며 눈으로 흘기고 있었다.
옆에 승조까지 있으니 차마 다가와 말은 걸지 못하고 사람들은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가만히 승조를 바라보던 수희의 귓가에 문득 그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맴돌았다.
“이것도 계획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 둬요. 우리가 시끄럽게 연애할수록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하고 수희가 생각했다.
때마침 도로 끝에서 빈 택시가 달려오고, 승조가 손을 뻗자 택시가 점차 속도를 줄였다.
멀리서부터 비상등을 켠 택시가 인도 가까이 정차하기 전이었다.
“도착하면 메시지 남겨요.”
승조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 수희는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더는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 수희가 발꿈치를 들어 올리고 반쯤 눈꺼풀을 닫았다.
어깨에 닿는 수희의 손에 승조가 고개를 돌리던 순간이었다.
촉.
젤리처럼 말캉거리는 수희의 입술이 승조의 볼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마치 방청객들을 포섭한 것처럼 사람들의 탄성 비스름한 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
찰나에 벌어진 일에 승조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그녀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달곰한 냄새가 진동했다.
“리허설은 어제 충분히 했잖아요.”
오수희, 너는 정말. 날 가지고 노는구나.
“난 리허설 한 번밖에 안 하는 편인데, 한승조 씨는 더 필요한 거 아니죠?”
난 또 그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