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그 한승조가, 그 한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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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 한승조가, 그 한승조
2022.06.04.
“난 리허설 한 번밖에 안 하는 편인데, 한승조 씨는 더 필요한 거 아니죠?”
승조가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다 하더라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어떠한 암시도 없이 나타나 놀라게 하고, 예고 없이 품에 안아 덜컥 심장 떨리게 했으니까.
발꿈치를 바닥에 내려 둔 수희가 립스틱이 묻어 있는 승조의 볼을 바라봤다.
“잘 어울리네요.”
엄지로 그의 볼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 낸 수희가 만족스레 입술을 들어 올렸다.
승조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지만, 충격이 큰 건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리허설 운운하며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던 한승조는 어디 갔나 싶었다.
늘 여유로움이 흘러넘쳤던 승조의 얼굴에 당혹감이 흘러넘치는 것도 꽤 볼만했다.
“안 타실 거예요?”
인도 가까이 차를 세운 택시 기사의 물음에 수희가 몸을 틀었다.
“죄송해요. 지금 탈게요.”
상냥한 말씨에 택시 기사가 조수석 창문을 올리고 수희를 기다렸다.
수희는 승조 뒤로 보이는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승조의 볼에 입을 맞춘 효과 덕분인지 전보다 많은 사람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목적을 달성한 수희는 이왕이면 쐐기를 확실히 박아 두기 위해 승조 품으로 쏙 들어갔다.
“가 볼게요.”
그의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 낸 수희가 택시 뒷좌석에 올라탔다.
수희를 태운 택시가 비상등을 끄고 속도를 내 도로를 달렸다.
혼자 남겨진 승조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점차 작아지는 택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승조는 수희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손으로 짚었다.
“하.”
헛웃음이 터져 버린 승조는 과거에 수희가 훔쳐 갔던 키스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건 똑같다 싶었다.
손을 아래로 떨어트린 승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그때랑 좀 다른데.”
중학생 한승조라면 얼굴을 붉히며 어리숙하게 굴었을 테지만, 지금의 한승조는 자극에 대응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주는 대로 갚아 주기, 승조는 이대로 수희에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택시 뒷좌석에 올라탄 수희는 길게 숨을 몰아쉬며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안전띠 하셔야 해요.”
“아, 네.”
수희는 정신이 없어 안전띠를 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택시 기사가 액셀을 세게 밟기 전에 수희는 안전띠를 끌어와 착용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승조를 바라보느라 여러모로 바빴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며 수희는 두 눈을 감았다.
두근, 두근.
귓가에 울리는 건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니었다.
택시에 올라타기 전, 수희는 승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었다.
그때, 귀를 때리던 승조의 심장 박동이 머리에 새겨진 것처럼 잊히지 않았다.
조금은 빠르게 뛰어 대던 심장, 아주 잠깐 멎어 있던 숨.
승조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수희는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왜 긴장을 하고 그래.”
입술도 아니고 고작 볼이었는데.
그 정도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떨고 있었던 거야.
“괜히 나까지 떨리게.”
***
얕은 잠에 빠져 있던 수희는 어느새 꿈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오빠, 나 잊으면 안 돼. 약속해.”
“안 잊을게. 안 잊고 꼭 기억하고 있을게.”
물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시야 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이 점차 선명하게 들어왔다.
짐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배경으로 어린 수희와 남자아이가 서 있다.
“너 근데, 안 우네?”
장난스럽게 던지는 말에 어린 수희가 더욱 해맑게 웃어 보였다.
“왜 울어? 어차피 나중에 오빠 보러 올 건데.”
어린 수희가 오빠라고 부르는 남자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불분명하게 보였다.
종종 꿈속에 나타나던 한승조라는 남자아이와 헤어지게 된 걸까.
제삼자의 입장이 된 수희는 멀찍이서 두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사를 끝낸 어린 수희가 트럭에 올라타자 차는 바퀴를 굴리며 남자아이에게서 멀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트럭을 보던 남자아이가 힘없이 돌아서는데.
멀리서 트럭이 멈춰 서고 조수석 밖으로 어린 수희가 뛰쳐나왔다.
애란의 호통이 이어졌지만 어린 수희는 신경 쓰지 않고 남자아이에게 달려갔다.
애란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남자아이의 품으로 어린 수희가 날아들었다.
남자아이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어린 수희가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전했다.
“나랑 같이 놀아 줘서 고마웠어, 오빠.”
“…….”
“이 말 까먹어서 말해 주려고 왔어.”
뒤이어 트럭에서 내린 애란이 수희를 향해 소리쳤다.
“오수희! 어서 안 와?”
어쩔 수 없이 어린 수희가 남자아이에게서 떨어져 애란에게로 걸어갔다.
애란은 어린 수희의 팔을 붙잡아 다시 트럭에 태웠다.
어린 수희는 창문 밖으로 고갤 내밀어 승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듯 어린 수희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물러있었다.
덩그러니 남아 있던 남자아이는 눈물을 들킬까 얼른 눈가를 비벼냈다.
남자아이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자, 처음으로 남자아이의 얼굴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기다란 눈매에 박혀 있는 새까만 눈동자, 오뚝 솟아 있는 콧날.
빚어 놓은 것 같은 독보적인 이목구비가 낯설지 않았다.
침대에 눕기 몇 시간 전에도 이 아이와 닮은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똑같은 이름, 비슷한 외모, 같은 동네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한승조.”
꿈속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꾼 꿈에서 나온 남자아이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는 건 어린 수희의 곁을 늘 지키고 있던 건 한승조, 정말 그 사람이었던 걸까.
혼란에 휩싸인 수희는 먼 길을 떠나는 트럭을 바라보는 남자아이에게 다가섰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아이의 얼굴은 정말 그와 많이 닮아 있었다.
더는 보이지 않는 트럭에서 눈길을 떼어 낸 남자아이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서로의 시선이 맞닿는 순간 연기처럼 눈앞에서 남자아이가 사라졌다.
띠띠띠띠―
알람 소리가 울리기 전에 수희는 미리 두 눈을 뜨고 있었다.
휴대폰 알람을 끈 수희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알람 소리가 꺼진 방 안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고, 건조하게 바스락대는 이불 소리만 쌓였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수희의 두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다 이내 초점이 잡혔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꿈과 함께 잊고 있던 과거의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엄마, 나 친구들 보고 싶어. 부산 다시 가면 안 돼?”
“수희야. 그 친구들이 네 연기 인생에 도움이 돼?”
“…….”
“다 잊어. 너한테 필요 없는 것들이잖아.”
엄마가 나에게 잊으라고 했던 것들.
나에게 필요 없다고 억지로 주입시켰던 것들.
그것 중 하나가 한승조였다.
“진짜 그 한승조가, 그 한승조라고?”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려 보지만, 터져 나온 신음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하.”
어제 레스토랑에서 그와 했던 대화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해담중학교 나왔습니다.”
“사귀었던 친구는 여자아이,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오수희 씨 초등학교 시절은 어땠습니까.”
이제야 어제 승조가 했던 말들이 과거의 기억들과 짜깁기가 됐다.
특별한 의도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냥 평범하고, 어쩌면 따분한 질문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꺼내는 말 하나하나가 힌트였고, 답안이었다.
두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손끝이 얼음조각처럼 차가워졌다.
이제야 깨달았다. 승조가 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지. 그건 자신의 오래된 팬이어서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나 이제 어쩌지.”
과거의 업보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던가.
16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업보가 한승조를 등에 업고 나타났다.
***
“수희야. ……오수희!”
버럭 내지르는 최 사장의 목소리에 수희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수희가 허공을 보고 있던 눈길을 최 사장에게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몇 번을 부르는데도 못 들어.”
정신이 다른 곳에 빠져 있으니 최 사장이 부르는데도 못 듣는 게 당연했다.
“잠깐 다른 생각 했어요.”
그 꿈을 꾼 지 이틀이 지났는데도, 수희는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런 수희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최 사장은 신이 난 듯했다.
“왜 그래. 지금처럼 좋은 상황이 어디 있다고.”
최 사장은 테이블에 올려 둔 노트북을 수희 쪽으로 돌렸다.
“이틀 전에 한 대표하고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하는 사진이 인터넷에 쫙 깔렸어.”
최 사장은 직접 마우스로 스크롤을 내려 인터넷을 뒤덮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에서 샴페인을 부딪치는 사진.
스테이크를 썰어 자신의 접시와 바꿔 주는 승조의 사진.
그리고 건물 밖을 나와 수희가 승조의 뺨에 입을 맞추는 사진.
마치 파파라치가 붙은 것처럼 시간대별로 승조와 수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수희가 샴페인을 마시는 모습에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바뀌었다.
승조와의 데이트 사진이 인터넷을 장악한 후에야 그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승조는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임산부라면 마시지 않았을 샴페인을 시켜 수희와 함께 마셨다.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오수희는 임산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준 것이다.
“아주 반응이 뜨거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최 사장이 아래에 붙어 있는 네티즌들의 반응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수희야, 내가 말했지. 열애설 인정하면 임신 스캔들도 자연스럽게 묻힐 거라고.”
최 사장이 보여 주지 않아도 사람들의 반응은 진즉에 확인했었다.
[예전에 오수희 임신이라고 했던 사람들 어디 있냐?ㅋㅋㅋㅋ]
[난 처음부터 임신설 안 믿음ㅋㅋㅋ 제대로 된 증거가 없었잖아.]
[이럴 줄 알고 나는 중립 기어 박고 있었음.]
노트북 화면을 덮은 최 사장이 두꺼운 손으로 손뼉을 쳤다.
“자, 자, 이제 수희 복귀작만 정하면 임신설은 완전히 사라질 거야.”
“복귀 작품은 지금 고르고 있어요.”
승조가 보내 준 세 개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할 예정이었다.
세 작품 모두 완성도가 뛰어나 작품을 고르는 데 시일이 걸렸다.
“그래. 최대한 빨리 복귀작 정하고 기사 올리자.”
“……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 봐도 되죠?”
“피곤하지? 어서 들어가 봐.”
자리에서 일어선 수희가 철용과 함께 사장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수희는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냈다.
―한승조 대표님
수희에게 걱정을 한 아름 안겨 준 이가 귀신같이 전화를 걸어 왔다.
잠시 망설이던 수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른침을 삼킨 수희가 귓전에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오늘이나 내일 시간 됩니까?]
“무슨 일 있어요?”
[일 때문에 상의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일은 일정이 전부 잡혀 있어서 시간을 빼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은 승조의 얼굴을 보는 게 껄끄러웠지만, 일 문제라고 하니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늘, 시간 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수희는 대면하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 보는 걸로 하죠.]
승조의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흘러 들어왔지만, 수희는 대답하지 못한 채 휴대폰만 붙들고 있었다.
[오수희 씨, 듣고 있습니까?]
덧붙는 승조의 말에 수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당신이 친해지고 싶다던 그 여자 친구, 그거 나예요?’
가슴에 쿡 박혀 있는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한승조 씨.”
며칠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그 말을 승조에게 뱉기 직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