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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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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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건 사랑 때문이 아니다
2022.06.07.
“한승조 씨.”
이름은 불렀는데 뒤이어 나와야 할 말이 수희의 입 밖에서 달아나 버렸다.
어차피 오늘 만날 테니 통화가 아닌,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요?”
[우리 집에서 보겠습니까? 밖에서 할 이야기들은 아니라서요.]
예전과 달리 수희는 집으로 부르는 승조에게 방어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간다고 해도 불순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부도덕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수희와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7시까지 갈게요.”
[나도 맞춰서 가겠습니다.]
“네, 나중에 봬요.”
묻고 싶었던 말은 잠시 미뤄 둔 수희가 전화를 끊었다.
철용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자, 수희가 안으로 몸을 실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올라탄 철용이 수희의 표정을 살폈다.
“연애하는 애가 표정이 왜 그렇게 죽상이야.”
아침에 만나 일정을 가면서도 정신은 다른 곳으로 가출해 있었고, 최 사장이 이름을 불러도 내내 다른 생각 중이었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수희는 철용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따지고 보면 승조와 예전에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은 철용에게 숨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나 초등학생 때,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였던 거 있지.”
제대로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는 건지 철용이 다시 확인했다.
“한승조 대표님이랑?”
“응.”
잔뜩 들뜬 철용은 질문이 많아졌다.
“대표님이랑 같은 학교를 나온 거야?”
“아니. 내가 초등학생일 때, 한승조 씨는 중학생이었어.”
“그럼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겠네?”
“아니. 엄청, 엄청 친한 사이였어.”
기억이 나는 건 꿈속의 일들이 전부이기에 “아마도.”라고 자그맣게 덧붙였다.
“완전 운명이네!”
한 편의 로맨스 드라마를 관람하듯 철용의 눈에서 설렘이 쏟아져 내렸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기에 수희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하아. 문제는 내가 어릴 때 한승조 씨한테 한 말이 있다는 거지.”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으아.
수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며 쓸어 올렸다.
“뭔데 그래.”
궁금해 죽겠다는 듯 철용이 보채자 수희가 머뭇대다가 운을 뗐다.
“내가 어릴 때 일은 잘 기억이 안 나서 모르고 있었거든.”
“너무 어릴 때 일이면 그러기도 하지.”
공감 능력이 뛰어난 철용이 수희의 말에 동조했다.
헛바람을 삼킨 수희가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철용에게 가장 먼저 꺼냈다.
“내가 결혼하자고 했다? 한승조 씨한테.”
살짝 놀라는 듯하더니 철용이 웃으며 넘기려 했다.
“에이, 그때는 그런 말 장난처럼 많이 하잖아.”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수희가 감정을 덜어 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뽀뽀도 했었다?”
“한 대표님이?!”
아무리 어렸을 때 일이라도 입을 맞췄다는 말에 철용이 버럭 소리를 냈다.
“초등학생한테 뽀뽀했다고? 둘 다 어렸어도 뽀뽀는 선 넘는 거지!”
금방이라도 화를 터트릴 것 같은 철용의 벌건 얼굴에 수희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니, 내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철용이 목을 앞으로 쭉 뺐다.
“……어?”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희의 뒤로 철용이 바짝 따라왔다.
“네가 결혼도 하자고 하고, 뽀뽀도 했었다고? 한 대표님한테?”
“쉬이이잇!”
수희는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회사 직원들을 보고는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바람이 세차게 잇새를 빠져나가는 소리에 철용이 두꺼운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한 철용은 당장 수희에게 답을 듣고 싶었지만 듣는 귀가 너무나 많았다.
밴에 올라탈 때까지 입을 꾹 누르고 있던 철용은 뒷좌석에 올라탄 수희에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결혼이라도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듯 수희가 손을 훠이훠이 저어 냈다.
“기억도 안 나는 일인데 결혼을 어떻게 해. 그냥, 그렇다는 거야. 내가 어릴 때 그런 허무맹랑한 짓을 했었다고.”
“정말 맹랑하긴 하다. 얼마나 한 대표님이 좋았으면 결혼하자는 소리를 해?”
“어린애가 뭘 알겠어.”
어려서 부릴 수 있었던 객기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어린애가 뭘 알고 입술부터 들이댔겠는가.
단편의 기억이 떠오른 것뿐이지 그날의 감정까지 되살아난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승조에게 느꼈던 감정은 보잘것없는 솜털처럼 가벼울 거라 여겼다.
“그렇게 친분이 있는 사이면서 어떻게 너랑 한 대표님은 <침수> 회식 자리에서 처음 본 것처럼 굴었어?”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철용이 의문을 품었다.
“나처럼 바로 기억이 안 난 거 아닐까?”
어제 대화로 미루어 봤을 때, 승조는 중학교 때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하고많은 과거 중 초등학교 일을 콕 집어 물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선 그런 대답을 했던 걸까.
“만난 적 없습니다. 오수희 씨랑 만난 건 <침수> 회식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냐는 물음에 승조는 <침수> 회식 때가 처음이라고 했다.
승조도 그녀를 만난 이후에 과거의 기억이 돌아온 걸까.
“오수희 너를 잊는다고? 네 이름이 어디 흔해? 얼굴이 어디 평범해?”
철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음표를 연신 다는데, 어째서인지 수희의 콧대가 쑥 올라가 있었다.
“그렇긴 하지? 내가 평범하지는 않잖아.”
어디 하나 특별하지 않은 곳이 없는 자신을 잊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러니 궁금증은 자꾸만 늘어 가고, 커지기만 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 대표님 만나서 이야기해 보게?”
“이야기해 봐야지. 묻고 싶은 것도 있고.”
한승조, 당신도 나처럼 과거를 잊고 있다가 날 만난 이후에서야 떠오른 건지.
그리고…….
“꿈이 아니라면 그 터무니없는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 터무니없는 약속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었던 건 아닌지.
***
“유튜버 황 씨가 조금 전에 활동 중단 영상 올렸습니다.”
차 비서가 태블릿으로 영상을 틀어 책상 앞에 올려 두었다.
한때 수희의 임신 스캔들을 터트렸던 황 씨는 검은색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검은색 선글라스와 검은색 모자를 쓴 황 씨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려고 합니다.]
선글라스에 가려 눈동자가 굴러가는 건 보이지 않았지만, 황 씨의 말투는 마치 책을 읽는 듯 단조로웠다.
[제가 지금까지 올렸던 영상들은 들리는 루머들을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사실인 양 퍼트려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 점 죄송합니다.]
허리를 깊게 숙인 황 씨는 머리에 쓴 모자가 벗겨질까 봐 손으로 꾹 눌렀다.
숙였던 상체를 세운 황 씨는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목소리를 떨었다.
[더불어 잘못된 소문으로 소란을 일으킨 점에 대해서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함께해 주신 여러분에게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3분 정도 남아 있는 영상을 보고 승조가 태블릿을 검지로 두드렸다. 툭툭 치는 손길이 신경질적이었다.
“변명이 많네. 차 비서가 직접 대본 피드백한 거 맞아?”
“A4 용지 세 장이었는데 저것도 설득해서 줄인 거예요.”
찬 바람이 쌩하고 불 정도로 냉담한 승조가 대꾸했다.
“설득을 왜 하지? 강제로 시키면 될 텐데.”
“한순간에 150만 유튜브 계정을 잃는 건데, 저 정도 자비는 주세요.”
영 탐탁지 않았지만 이미 올라온 영상을 다시 내리게 할 수도 없었다.
이미 한 시간 만에 조회 수는 50만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 일은 수고했어.”
영상을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승조가 태블릿을 책상 위에 덮었다.
한 달 전, 승조는 차 비서를 통해 황 씨의 신상을 낱낱이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일전에 수희의 임신설을 흘린 정보책의 신상을 알아내지 못했던 일을 만회하듯, 차 비서는 승조의 손에 황 씨의 신상을 빠짐없이 손에 쥐여 주었다.
남의 추문을 입에 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뒤 역시 구릴 거라는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음주 운전 상습범에, 자신의 미성년자 팬을 성추행한 혐의까지 있었다.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와 극적으로 합의를 해 조용히 묻힌 사건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마약상과 연락을 취해 거래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그 후, 차 비서가 직접 만나 몇 마디 나누자 황 씨는 저자세로 나오며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황 씨가 경찰서를 드나든 일들을 부모님께 알리겠다고 한 것이 통한 듯했다.
다행히 황 씨가 극진한 효자라 가능했던 협상이었다.
차 비서는 이번에 황 씨를 보며 느낀 것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모시는 상사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승조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순간이었다.
“저는 평생 대표님 편 하겠습니다.”
“그럼, 내 편 해야지.”
승조는 뜬금없이 당연한 말을 하는 차 비서에게 시선을 툭 던졌다.
“마약상이랑 거래한 정보는 한 달 뒤에 경찰에 넘겨.”
이대로 묻어 둘 줄 알았던 차 비서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냥 안 넘어가시고요?”
“이게 내가 넘어가고 말고의 문젠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잖아.”
“그래도 저희랑 딜을 한 게 죄를 알리지 않는다는 거였는데요.”
“우리가 마약상이랑 거래하고 있다는 정보로 합의 본 건 아니잖아?”
승조의 말대로 마약이 아닌 음주 운전과 성추행 혐의였다.
차 비서가 황 씨를 만나러 갈 때, 승조는 처음부터 마약에 대해 입에 담지 말라고 했었다.
이런 상황을 전부 대비해서 승조는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워후.”
존경의 의미와 두려움의 의미가 담긴 감탄을 지른 차 비서가 말을 이었다.
“대표님, 오수희 씨를 정말 사랑하시나 봅니다. 스튜디오 그린 때문에 바쁘신데 오수희 씨 일에 직접 나서기까지 하시고.”
그놈의 사랑 타령.
승조의 매서운 눈이 차 비서에게 닿자, 차 비서가 눈동자를 구석 쪽으로 쓱 돌렸다.
애초부터 수희에게 임신 스캔들을 완전히 덮어 주겠다 제안했었다.
그 약속을 지켜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사랑 때문이 아니다.
승조는 자신에게 그렇게 답을 내렸다.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결재 서류는 내일 전부 처리할 거고.”
의자를 밀고 일어선 승조가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걸쳤다.
“오수희 씨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지금 딱 좋으실 때죠. 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금방 가시죠?”
수희와 연애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 차 비서는 싱글벙글하였다.
작게 숨을 뱉어 낸 승조가 무미건조한 투로 읊조렸다.
“차 비서는 다 좋은데, 말이 너무 많아. 일이라도 못했으면 바로 잘라 버렸을 텐데.”
“어쩐지 아쉽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제대로 들었네.”
승조가 보고 있던 보고서를 서류 가방 안에 밀어 넣던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대표실 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