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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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실수
2022.06.11.
열린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병호였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듯 승조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마저 서류 가방을 챙겼다.
“또 무슨 일로 갑자기 찾아오신 겁니까?”
병호는 자신과 눈도 맞추지 않는 승조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 전화 안 받은 건 승조, 너야.”
“오시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게.”
승조를 찾아오기 전만 해도 오늘은 싸우지 않으려 했지만, 막상 냉랭한 승조의 태도를 보니 절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뻗쳐오르는 열을 가라앉혀 보려 병호가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다 불똥이 튈까 멀찍이 서 있는 차 비서와 시선이 부딪쳤다.
병호는 어금니를 꽉 짓눌러 깨물며 차 비서에게 손가락질했다.
“내가 승조 일정 보고하라고 했더니, 왜 6시 이후 일정은 쏙 빼놓고 보낸 거냐.”
“제가 퇴근은 칼같이 하는 편이라 퇴근하기 전까지의 일정을 공유해 드렸습니다.”
병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차 비서는 순순히 그걸 병호 손에 쥐여 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차 비서는 항상 승조의 곁을 지키기에 승조가 수희와 만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조가 언제 어디서 수희를 만나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병호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의 월급을 챙겨 주는 건 회장인 병호가 아니라 대표인 승조였기 때문이다.
병호가 손쉽게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변함없지만, 승조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병호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화살이 왜 그쪽으로 돌아갑니까?”
승조는 제 사람이 꾸지람을 듣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네 직원이라고 싸고도는 거냐.”
“차 비서, 퇴근해.”
불편한 자리에 오래 남고 싶지 않았기에, 차 비서는 넙죽 승조와 병호에게 인사했다.
“퇴근해 보겠습니다, 대표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발소리도 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온 차 비서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돌아서는데 비서실 신입이 찻잔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회장님 오셨길래 차 내왔는데…….”
차 비서는 신입의 손에 들린 쟁반을 가져갔다.
“다른 직원들 대표실에 올라오지 말라고 하고, 오늘 일찍 퇴근하라고 해요.”
“네, 알겠습니다.”
신입이 돌아서자 차 비서가 문을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승조는 완전히 인기척이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차 비서를 회유하는 것보다는 포기하는 게 더 빠르실 겁니다. 차 비서가 일 하나는 참 잘해서요.”
병호는 회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사람 하나 마음대로 부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요새 아무리 위아래 없이 허물없이 대한다고 하더라도 감히 회사 회장 말을 거역해?”
꿈틀거리는 송충이 같은 눈썹이 비틀린 심기를 나타냈다.
승조는 분노가 인 병호를 향해 경고했다.
“자르실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럼 저까지 잃으실 테니까요.”
싫다는 승조를 대표 자리에 앉혀 놓은 건 병호였다.
자신의 피와 살을 바쳐 만든 회사였기에 피도 섞이지 않은 남에게 경영권을 승계해 줄 마음은 없었다.
회사를 이을 혈육은 승조밖에 없었기에, 힘들게 설득해 대표 자리를 내주었다.
차라리 다른 자식이 있었다면 승조를 당장 대표 자리에서 내쳤을지도 모른다.
하나 자신이 낳은 자식은 오직 승조밖에 없었기에 강하게 나올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넌 매번 그런 식으로 아비를 겁주는구나.”
“아버지도 겁이라는 걸 먹으십니까? 믿을 수가 없네요.”
설핏 웃음을 내비쳤던 승조가 금방 미소를 지었다.
“제 연애 사업 때문에 오신 거면 헛걸음하신 겁니다. 지금도 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거 안다. 지금이라도 헤어져.”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말은 승조에게 작은 동요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원하시면 저랑 연이라도 끊으시면 됩니다. 겸사겸사 회사도 그만둘 수 있고, 좋네요.”
감정이 쌀 한 톨만큼 들어가지 않은 승조의 목소리는 가슴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절연을 입에 담는 승조를 보고 병호는 내심 상처를 받았다.
“너, 여자 때문에 이 아버지랑 연을 끊겠다고 하는 거냐?”
“뭐 어떻습니까. 줄곧 남처럼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절연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있습니까?”
지겹다는 듯이 승조가 뱉어 내는 말들은 건조하기만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승조는 병호와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름진 손을 힘껏 움켜쥔 병호가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데, 이렇게 버릇없이 큰 거냐?”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뭐?”
따분하다는 눈빛으로 승조가 과거를 떠올렸다.
“절 키운 건 할아버지, 할머니나 마찬가집니다. 아버지 손에 큰 기억은 없습니다.”
병호가 이혼하기 전까지 육아는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매번 저녁 느지막이 집에 들어온 병호는 승조의 잠든 얼굴만 보기 일쑤였다.
모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돈 때문이라 이유를 붙이며 승조와 함께 시간을 가진 적은 드물었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나면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 여겼건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후에는 채워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 시간의 문은 이미 닫힌 지 오래였다.
“내가, 이 회사를 이만큼 키운 게 다 널 위해서라는 걸 모르는 거냐?”
병호는 쓰라린 속에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모두 다 절 위해서라고 말씀하시지 마세요. 제가 원한 적도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승조는 대표실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병호는 승조가 이대로 대표실을 나가게 두지 않았다.
“다른 애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임신했다고 소문이 떠도는 애를 뭐가 좋다고 만나.”
한때 임신 스캔들로 떠들썩했던 수희가 병호의 마음에 찰 리 없었다.
“제 연애삽니다. 아버지께서 간섭할 영역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승조에게 병호는 배신감을 느꼈다.
“내가 널 낳고 키웠는데 그 정도 간섭도 못 한다는 거야?”
“그 아이를 만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뭐 때문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잠시 멈칫했던 병호의 숨이 점차 불규칙해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처럼 병호의 얼굴에 점차 열이 올라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치미 떼어 봤자 승조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승조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병호의 모습에 연민조차 들지 않았다.
“즐겨 만나고 다니시는 여자들 전부 아버지가 말하는 딴따라인 거 알고 있습니다.”
승조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보다 더 상처가 됐던 건 인터넷에서 본 병호의 파파라치 사진이었다.
중국에서 한국 여가수와 데이트를 즐기는 사진이 인터넷에 파다하게 퍼졌었다.
병호가 이혼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밝혀지기 전이었다.
사람들은 대놓고 불륜을 즐긴다며 손가락질했고, 이후에 이혼 후 진지하게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직 아버지의 연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승조에게는 단 한 번의 귀띔조차 준 적이 없었다.
일이 바쁘다며 1년에 두 번 한국에 들어오던 병호였으니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여가수와 만난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이번에는 여배우와의 열애설이 터졌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여자들을 갈아치우는데, 대다수가 연예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뭘 하고 다니시길래 아들은 그 딴따라를 만나는 걸 질색하시는 겁니까.”
“……그만.”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병호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병호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승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인터넷만 조금 찾아봐도 알 수 있긴 하네요. 아버지가 얼마나 재미있게 노시는지.”
짜악!
대번에 찢어지는 소리가 대표실 안을 울렸다.
반쯤 돌아간 고개를 바로 돌린 승조는 한껏 눈을 키운 병호를 바라봤다.
맞은 건 승조인데 되레 병호가 놀란 것처럼 보였다.
금세 붉게 달아오른 뺨이 시큰거렸지만 아픔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충격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그것도 훈육이 아닌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해 날린 손이었다.
“미……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아래로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날카롭게 치켜뜬 승조가 병호를 쏘아보았다.
“설마, 어머니한테도 이렇게 손대셨습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병호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한 번도 그랬던 적 없어!”
“그 말 믿겠습니다. 그래야 제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으니까요.”
어머니와 연락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달리 진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한참 머뭇거리던 병호가 손을 들어 올려 벌겋게 달아오른 승조의 얼굴에 가져다 대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은 승조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병호의 손을 옆으로 치워 낸 승조가 이전보다 더욱 싸늘해진 눈빛을 보냈다.
“직접 때리시고 달래 주시려는 겁니까?”
“내가 진짜 잘못했다. 너한테 손을 올리다니.”
괴로움에 구겨지는 얼굴에도 승조는 냉정했다.
“죄책감은 혼자 느끼세요. 나누려고 하지 마시고.”
잘못한 게 있으니 이번에는 돌아서는 승조를 잡지 못했다.
대표실 밖으로 나온 승조는 넥타이의 매듭을 끌어 내리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승조가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 마주한 거울에 입가에 빨갛게 피가 맺힌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엄지로 아무렇게나 피를 닦아 낸 승조가 엘리베이터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아버지에게 맞은 뺨보다 심장이 더욱 시큰거리며 아파 가슴이 답답했다.
***
문이 열린 빌라 출입구를 지나 수희의 차가 펜트하우스로 가는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전 속도를 줄이는데, 그때 마침 승조가 전화를 걸어 왔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뜬 통화 버튼을 누른 수희가 입술을 뗐다.
“여보세요.”
[혹시 지금 어딥니까.]
“저, 지금 한승조 씨 집 근처예요.”
[미안하지만 오늘 약속은 없던 걸로 하죠.]
수희는 순간 브레이크를 콱 밟을 뻔했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취소하는 게 어디 있어요.”
갑자기 약속을 잡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취소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회사 일이 바빠서 퇴근이 늦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금방 오시는 거면 기다릴게요.”
[오래 걸릴 겁니다. 다음에 만나죠.]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승조에게 대답을 하기 전이었다.
이미 지하 주차장 안으로 들어와 버린 수희는 저 멀리 보이는 사람에게 시선이 꽂혔다.
190cm에 가까운 키에 벌어진 어깨가 한승조와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라면 지금 집이 아니라 회사에 있어야 했다.
잘못 본 거겠지 싶어 차를 돌리려는데, 막 전화를 끊은 남자의 얼굴이 너무나 익숙했다.
절로 브레이크에 얹은 발에 힘이 실린 수희는 차를 세우고 안전띠를 풀어냈다.
그가 문이 열린 공동 현관 입구로 들어서기 전, 수희가 그를 놓칠까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한승조 씨!”
수희의 부름에 역시나 승조가 몸을 틀었다.
회사에 있어야 할 그가 버젓이 자신의 빌라에 있는 걸 보자 화가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매번 약속을 잡을 때마다 쉽게 승낙하는 자신을 우습게 본 건가 싶었다.
수희가 큰 보폭으로 걸어가 승조의 팔을 붙잡아 돌렸다.
“집이면서 지금 약속 취소한 거였어요?”
승조의 몸이 돌려지자마자 수희는 깜짝 놀라 눈을 키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승조의 왼쪽 볼은 벌게져 있었고, 입술 끝에는 상처가 난 것처럼 빨갛게 피가 묻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모습에 수희가 그의 얼굴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손에 들어온 승조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상처 난 곳을 살폈다.
“얼굴 다쳤잖아요. 누가 이런 거예요?”
“아아.”
붙잡힌 뺨이 아렸던 건지 승조가 앓는 소리를 내자 수희가 얼른 손을 떼어 냈다.
속상한 마음에 수희는 승조를 다그쳤다.
“어렸을 때도 그러더니 나이 들어서도 싸우고 다녀요?”
잠자코 있던 승조가 수희의 말을 곱씹으며 입으로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도?”
아차, 실수하고 말았다.
한승조는 아직 그녀가 과거의 기억 중 일부가 되살아난 걸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