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들켜 버리다
(39/118)
39. 들켜 버리다
(39/118)
39. 들켜 버리다
2022.06.14.
“……어렸을 때도?”
고요한 정적이 둘 사이를 빙글 돌았다. 말문이 막혔던 수희는 급하게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어, 어렸을 때 보통 치고받고 많이 싸우잖아요.”
“그런 뜻이었습니까?”
불안함에 꼼지락대던 손가락을 등 뒤로 가져간 수희가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꺼내 놓았다.
“네, 그런 뜻이었죠.”
승조가 더 파고들까 싶어 수희가 이미 넘어간 주제를 다시 가지고 왔다.
“정말 누구랑 싸우기라도 한 거예요?”
“어쩌다 보니까 다친 겁니다.”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답에 수희가 캐물었다.
“어떻게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한쪽 뺨만 다쳐요? 가로등이랑 볼이라도 맞댔어요?”
그냥 다친 거라면 약속을 취소할 리가 없었다.
숨기고 싶기에 부러 일이 바쁘다며 핑계를 댔던 거다.
질문을 피해 몸을 돌린 승조가 공동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유리문이 열리자 승조가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올라가서 이야기하죠.”
누구랑 싸우고 왔길래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거지.
문이 닫히려는 공동 현관 안으로 들어선 수희가 승조와 함께 펜트하우스로 올라왔다.
집 안으로 들어온 승조가 재킷을 벗어 소파에 얹어 놓았다.
“앉아 있어요. 마실 거라도 가져올 테니까.”
거실로 가는 승조를 바라보던 수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너무 과할 정도로 승조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예전이야 친구 사이로 지냈다지만, 지금은 친구도, 그렇다고 애인 사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건드리고 있는 건가 싶었다.
승조가 걱정돼서 자신도 모르게 무례하게 굴고 말았다.
포도주스를 잔에 따르고 있는 승조의 곁으로 걸어간 수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투명 비닐봉지 있어요?”
“그쪽에 있습니다.”
승조가 수희가 서 있는 아일랜드 식탁 아래를 눈짓했다.
서랍을 연 수희가 비닐봉지 하나를 뜯어 식탁 위에 있던 정수기에서 얼음을 내렸다.
입구를 단단히 묶은 수희는 이대로는 차가울 것 같아 욕실로 가 수건으로 봉지를 감쌌다.
주스를 내온 승조가 소파에 앉자 수희가 그 옆에 앉으며 만든 얼음주머니를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뺨 부었어요. 이거 대고 있어요.”
받아 든 승조가 왼쪽 뺨에 얼음주머니를 가져다 댔지만, 그 모습이 영 수희의 마음에 차지를 않았다.
승조는 성의를 봐서 대강 하는 척만 하듯 건성으로 제 볼을 문질렀다.
얼마 대지도 않고 얼음주머니를 떼어 내자, 지켜보다 못한 수희가 얼음주머니를 가져갔다.
“이 부분은 하나도 안 닿았어요.”
좀 더 가까이 승조에게 다가가 얼음주머니를 조심스레 대 주었다.
수희는 그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빠진 부분 없이 꼼꼼하게 문질렀다.
그런 다음 승조의 턱 끝을 부드럽게 받쳐 좀 더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승조는 피하지 않고 수희의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잔뜩 집중한 얼굴로 부어오른 제 볼을 바라보는 수희에게서 승조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수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자신을 돌보고 있었다.
네가 이렇게 걱정할까 싶어 약속을 취소하려고 했던 건데, 내 마음과는 달리 네게서 걱정을 받고 싶었나 보다.
‘그래도 컸다고 옛날이랑은 반응이 다르네.’
침 바르면 낫는다며 갑자기 입맞춤해 오던 너였다.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발등을 찧는 줄 알았다.
내 처음을 가져가 버린 너는 짓궂게 웃었고, 네 살이나 많은 나는 벌건 해처럼 달아올랐었지.
첫 키스를 훔쳐 놓고 너무나 평화로웠던 수희가 떠올라 입꼬리가 위쪽으로 비집고 올라갔다.
흩어지는 승조의 웃음소리에 한껏 진지하던 수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웃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뭐 때문에 웃는 건지 궁금했지만 승조는 알려 주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승조는 턱 끝을 살짝 까딱이며 제 얼굴을 좀 더 가까이 내어 주었다.
“계속해요. 시원하고, 기분 좋으니까.”
상체를 잠시 뒤로 물렸던 수희가 다시 몸을 기울이고는 손을 움직였다.
얼음주머니 안에 들어 있던 얼음들이 서로서로 마찰하며 달각달각 소리를 냈다.
열기가 가라앉은 승조의 볼을 보고 있는데, 눈가에 계속해서 그의 시선이 닿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눈빛이 닿는 얼굴이 따끔거렸다.
얼마 가지 못해 분주히 움직이던 수희의 손이 멈췄다. 자신의 손등을 감싼 승조의 손바닥 때문이었다.
뚝뚝 끊어진 테이프처럼 수희의 눈길이 멈칫거리다 승조에게 옮겨 갔다.
승조의 시선은 어느새 손끝이 빨갛게 얼어 있는 수희의 손을 향해 있었다.
“손, 나 때문에 차가워졌네.”
따듯한 승조의 손이 장밋빛으로 물든 것 같은 수희의 손끝을 감싸 잡았다.
찬찬히 승조의 눈이 수희에게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손끝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전율이 온몸을 침범했다.
여전히 손을 감싸 잡은 그는 끈질기게 수희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어색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승조가 깨트렸다.
“입술도 찢어졌는데, 이것도 치료해 줄 겁니까?”
자연스레 수희의 눈동자가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순간 잠깐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 하나가 빠르게 재생됐다.
“이렇게 하면 금방 나을걸?”
“너! 진짜! 여자애가 남자한테 막 뽀뽀하고 그래도 돼?”
16년 전에 입술이 다친 승조를 낫게 해 준다는 말도 안 되는 명목으로 그에게 입맞춤한 적이 있었다.
잊고 있던 자신의 흑역사가 떠올라 수희의 얼굴이 한순간에 화르르 달아올랐다.
승조가 쥐고 있던 손을 아래로 빼낸 수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쉬세요.”
“어디 갑니까?”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아래를 내려다보면 빨개진 얼굴을 들킬 것 같았다.
“몸도 안 좋은데 쉬셔야 할 거 같아서요.”
괜스레 딴청을 피우며 눈을 피하던 수희가 급하게 승조를 지나치려던 때였다.
뒤이어 일어선 승조가 수희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내가 귀찮게 해서 그런 겁니까?”
제발, 제발 이대로 가게 놔둬.
수희는 속으로 그렇게 빌며 승조가 잡은 손을 놓아주기를 바랐다.
“놔주세요.”
꽤 단호한 수희의 말에 승조가 군말 없이 붙잡고 있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완전히 몸을 튼 수희가 한 발을 마저 내디디려는데, 승조의 말이 이번에는 수희의 발목을 붙잡았다.
“핸드백 가져가야죠.”
그제야 수희는 자신이 챙겨 왔던 핸드백을 소파 위에 올려 두었던 게 떠올랐다.
몸을 튼 수희가 핸드백을 가져가려 손을 뻗는데, 핸드백 끈을 쥐고 있는 그와 시선이 정면에서 맞부딪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파도를 집어삼킨 것처럼 가슴속이 일렁거렸다.
저도 모르게 먼저 눈을 피해 버린 수희가 그의 손에 들린 핸드백을 가져갔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승조의 집을 빠져나갔다.
수희가 나간 현관문이 닫혔는데도 승조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공중에 올려진 손을 뒤늦게 아래로 떨군 승조는 조금 전 급히 나가던 수희의 얼굴을 회상했다.
흰 얼굴에 유독 뺨만 붉게 상기된 그녀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니 동공이 크게 뒤흔들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가슴 떨려 하고 있었다.
다만 표정은 너무나 쉽게 읽을 수 있었으나, 그 이유만큼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를 느껴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 너무나 많았다.
어떤 이유에서 그녀가 얼굴을 붉혔는지보다는, 어째서 자신에게 떨림을 느낀 건지 알고 싶었다.
수희에게 자신의 존재는 성공적인 복귀를 위한 파트너일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지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 수희가 자신에게 호감이 생겼을 리 없다고 확신했다.
‘왜.’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녀가 홍조 띤 얼굴로 자신을 본 걸까.
승조는 얼음주머니가 축축하게 소파를 적시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사색에 잠겨 있었다.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수희는 조급하게 운전석에 올라탔다.
안전띠를 끌어당겨 고리를 잠금장치에 여러 번 버벅거리다가 끼웠다.
마치 숨 쉬는 걸 잊은 것처럼 수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핸들을 손에 쥐었다.
운전해야 하는데 심장이 떨려 도저히 페달을 밟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차를 몰았다가는 사고가 날 것 같아 수희가 핸들에 이마를 콩콩 쥐어박았다.
“들킨 거 아니겠지.”
잔뜩 설레는 얼굴로 승조를 보고 있었던 걸 들킨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정면에서 얼굴을 마주했는데 모를 수가 있을까.
“이제 어떻게 봐.”
볼 수나 있을까. 잠깐 닿는 것만으로도,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심장이 쪼여 오는데.
핸들에서 머리를 떼어 낸 수희가 심장을 손바닥으로 다독였다.
한동안은 한승조를 피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만나지 말자. 잠깐 떨어져 있으면 이 두근거림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을 것이다.
***
이튿날, 스튜디오 그린을 빠져나온 차가 압구정 ON 편집숍으로 향했다.
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승조는 전화가 오지 않는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막상 해야 할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못해, 다시 약속을 잡기 위해 연락을 취했었다.
그러나 신호음만 갈 뿐 수희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혹시 어제 집에 돌아가면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오늘 오수희 씨한테 협찬 간 옷들은 잘 도착했어?”
“네, 잘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일정은 무리 없이 소화하는 듯한데, 일이 생긴 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피하는 건가.
고개를 들어 올린 차 비서가 룸미러로 승조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오수희 씨한테서 연락이 안 와서.”
승조가 휴대폰을 흔들자 차 비서가 자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직접 찾아가 보시면 되죠.”
“직접?”
승조가 설핏 눈가를 찌푸리자 차 비서가 룸미러를 통해 눈을 맞췄다.
“이 근처가 오수희 씨가 다니는 숍이에요. 들러서 이야기라도 하고 오시죠.”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만나야 하나 싶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으니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럼 잠깐 들르지.”
“네.”
혹시나 두 사람이 어긋날까 싶어 차 비서는 좀 더 속도를 올렸다.
숍 앞에 차가 도착하자 뒷좌석에 있던 승조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한 대표님!”
때마침 숍에서 나오던 철용이 계단을 두 칸씩 뛰며 훌쩍 내려왔다.
승조가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자 철용이 묻지도 않은 말들을 떠들어 댔다.
“수희 10분 전에 팬 사인회 때문에 이동했는데.”
“아, 그렇습니까.”
차 비서가 엇갈리지 않도록 열심히 차를 몰았지만, 아쉽게도 수희는 숍을 이미 떠난 후였다.
철용은 손에 쥐고 있던 수희의 휴대폰을 보여 줬다.
“저는 수희가 휴대폰을 숍에 놓고 가서 잠깐 들렀거든요. 급한 일이면 저랑 같이 가시죠. 여기서 수희 팬 사인회장 가깝거든요.”
숍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분명 연락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전화를 받지 않은 데엔 다른 이유가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닙니다. 제가 연락했었다고 전해 주세요.”
수희가 숍에 없다고 하니 굳이 여기서 시간을 버릴 필요가 없었다.
편집숍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승조가 돌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나저나, 수희한테 어제 들었습니다.”
수다를 좋아하는 철용이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수희가 초등학교 때, 한 대표님이랑 많이 친했었다고 하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