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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터무니없는 약속 (40/118)


40. 터무니없는 약속
2022.06.18.



 


“수희가 초등학교 때, 한 대표님이랑 많이 친했었다고 하던데요.”

수희에게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승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수희는 열세 살 이전의 기억은 없다고 했었다.

그러니 철용이 방금 말한 것은 승조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달랐다.


“오수희 씨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하하. 우리 수희 어릴 때도 맹랑했죠?”

철용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수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일까.

굳이? 어째서?


“오수희 씨가 많이 친했다고만 하던가요?”

살짝 떠보는 것도 모르고 철용이 넙죽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장난이라도 결혼하자고 말했으면 친한 거 그 이상이죠.”

만약 수희가 듣고 있었다면 철용의 입을 틀어막고 도망쳤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 자리에 수희가 없었기에 철용의 입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수희가 타이밍을 잡지 못해 이실직고하지 못했던 과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우리 수희가 어렸을 때부터 눈이 높았나 봐요. 대표님이랑 결혼하겠다고 한 거 보면.”

“……그랬었죠. 한때는.”

다 기억이 났네, 너는.

어제 네가 얼굴을 붉혔던 이유가 이제야 좀 감이 잡혔다.


“입술도 찢어졌는데, 이것도 치료해 줄 겁니까?”

내가 장난스럽게 던졌던 말을 듣고 넌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났을 것이다.

내게 입을 맞췄던, 그때가.

그래서 넌 날 피해 도망친 게 아닐까.


“내 정신 좀 봐. 저 빨리 가 봐야 해서, 다음에 뵐게요.”

“뭐 하나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가져갔던 발을 도로 가져온 철용이 뭐든 들어줄 것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면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저 만난 거 오수희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연락했었다고 전해 달라고 하신 건…….”

“그것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저 입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의 모습만 봤을 때는 참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철용을 보던 승조가 차에 올라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 비서가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오수희 씨는 숍에 안 계신가 봐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승조는 차 비서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룸미러를 눈으로 흘긴 차 비서는 다른 때와 달리 조용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

사인회가 열리는 백화점 앞에는 수희가 타고 있는 밴이 세워져 있었다.


“수희야, 휴대폰 가져왔어.”

밴에 올라탄 철용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수희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차 타고 같이 가자니까.”

“일정도 남았으니까 겸사겸사 뛰어갔다 오는 거지.”

숍에서 차를 타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희는 휴대폰을 놓고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차를 돌리자고 했더니 요즘 다이어트를 하는 철용이 뛰어갔다 오겠다고 한 것이다.

운전석으로 상체를 숙여 휴대폰을 받아 든 수희를 철용이 주시했다.

그대로 휴대폰을 핸드백 안에 넣어 두려는데 철용이 손을 뻗으며 급하게 말렸다.


“휴대폰 확인 안 해봐? 전화 왔을 수도 있잖아.”

도로 휴대폰을 꺼낸 수희가 휴대폰 액정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철용의 말대로 부재중 두 통이 쌓여 있었다. 모두 승조에게서 온 전화라 수희는 잠시 멈칫했다.

아마 어제 일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으니 다시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승조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러나 협력해야 하는 관계니 마음대로 연락을 피할 수도 없었다.

머뭇거리던 수희는 승조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조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피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휴대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전화하셨길래 연락했어요.”

[어제 못 한 일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 수희가 눈을 반짝였다.


“통화로 가능한가요?”

[아뇨, 보죠. 최대한 빨리.]

아쉽게도 연락을 한 건 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시간을 잡기 위해서였다.

한순간에 목소리가 가라앉은 수희가 자신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더듬었다.


“내일이나 3일 뒤에 가능해요. 갑자기 일정 잡은 거니까, 3일 뒤에 볼까요?”

[내일 퇴근 후에 일정 없습니다. 저녁에 보는 걸로 하죠.]

처음부터 이번 주에는 시간이 안 날 것 같다고 해야 했나.

어림도 없다는 듯 그가 당장 내일로 약속을 잡았다.


“알겠어요. 내일 한승조 씨 집으로 갈게요.”

[수고해요.]

전화를 끊은 수희는 한숨을 삼키며 좌석에 머리를 기댔다.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라도 해야 하는데, 도무지 흥이 나질 않았다.

이토록 걱정이 되는 건 승조에게 또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싶어서였다.

수희는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토닥였다.


‘심장아, 또 주인 허락 없이 나대지 마라.’

과연, 버릇없는 이 심장이 말을 들을지 의문이었다.

***

끝나지 않길 바라던 하루가 지나가고, 승조를 만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수희가 승조의 펜트하우스로 걸어갔다.

오늘은 주인 말을 잘 들은 예정인 건지, 평소 승조를 만날 때와는 달리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었다.

수희가 손을 들어 승조의 현관문을 똑똑 두드렸다. 소리가 작아서 듣지 못한 건지 승조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시 문을 두드리려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현관에 가져다 대려던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승조가 밖으로 나왔다.


“초인종 고장 났습니까?”

인사를 하려는데 승조가 벽에 붙어 있던 초인종을 바라봤다.

그제야 수희는 버젓이 달린 초인종을 두고 문을 두드린 걸 알아차렸다.

전혀 긴장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아아.”

작게 신음한 수희가 괜스레 제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가끔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좋잖아요.”

나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민망해진 수희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며 승조를 지나쳐 안으로 슥 들어섰다.

복도를 지나간 수희가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희가 소파에 앉자 승조가 냉장고에서 물을 가져오며 물었다.


“밥은 먹었습니까?”

“먹고 왔어요.”

혹여 승조가 저녁을 준비할까 싶어 수희가 냉큼 대답했다.

승조가 식사를 거르는 걸 무척 신경 쓰니, 진즉에 저녁을 먹고 출발했었다.

가져온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승조가 수희의 옆에 앉았다.

수희는 긴장을 풀려 노력하며 승조가 내려놓은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것 좀 보겠습니까?”

물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희는 승조가 내민 태블릿을 바라봤다.

평범한 녹음 앱인가 싶었는데 화면 상단에 작품명과 편수, 오른편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래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지문을 읽는 승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른쪽에 있는 등장인물 이름을 누르면 해당 인물들의 대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인물의 이름을 누르자 해당 인물이 등장하는 신들이 목록처럼 형성됐다.


“아래에 있는 버튼들로 이전 지문이나 다음 지문으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승조의 설명에 수희는 두 귀를 활짝 열고 경청했다.

대본을 녹음해 편리하게 들을 수 있는 앱이 존재했다니. 좀 더 빨리 이 앱을 알았더라면 복귀를 서둘렀을 것이다.

설명이 끝나자 수희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런 앱이 원래 있었나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작게 웃음을 지은 승조가 말을 이었다.


“촬영 들어가게 되면 틈틈이 대본을 봐야 할 텐데, 매번 녹음 앱으로 자기 대사 찾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요. 좀 더 효율적으로 대본을 들을 방법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럼 한승조 씨가 이걸 만들었다는 건가요?”

“급하게 만든 거라 완벽하진 않지만 쓸 만할 겁니다.”

능숙하게 앱을 이용하며 사용법을 알려 줬던 건 전부 승조가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경영에만 뛰어난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양한 방면으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승조에게 태블릿을 건네받은 수희는 혼자서 이것저것 눌러 보았다.

급조했다고 보기에는 흔한 에러 한 번 없이 잘 작동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데요?”

잔뜩 들떠 있는 수희의 목소리는 승조까지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걸 만들 줄 알았던 거예요?”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취미로 코딩을 했었어요.”

“취미로요? 독학했다는 거예요?”

“취미로 하는 건데 굳이 학원까지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요.”

마치 스승을 우러러보듯이 수희의 눈빛에는 존경이 묻어 나왔다.

승조가 나타난 이후, 어두웠던 수희의 삶에 조금이나마 햇살이 들어오는 듯했다.


“진짜 한승조 씨 없었으면 제가 복귀를 할 수 있었을까요?”

코딩의 ‘ㅋ’도 모르지만 앱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관리하는 회사의 일만 해도 하루가 빠듯할 텐데, 시간을 내 이렇게까지 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든 결과물이 보여 주는 건 수희를 향한 애정과도 같았다.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줘서 고마워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수희의 미소에 승조는 별안간 심장이 찌르르 저렸다.

복부까지 전해지는 떨림에 승조는 수희의 눈을 피하며 공연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꼭 오수희 씨 때문만은 아닙니다.”

“알아요. 반항, 뭐 그거 하려고 저랑 계약했으니까 최선을 다하시는 거겠죠.”

“…….”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그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수희에게 큰 도움이 됐다.

어찌 됐건 승조가 수희의 은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거 하나는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는 승조의 눈길에 수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등장인물 이름을 누르면 녹음 구간에 아이콘이 뜨는 거예요. 구간에 있는 아이콘을 누르면 해당 등장인물의 대사로 바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신이 나 아이디어를 내는 수희를 보자 승조의 한쪽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꽤 손이 많이 가는 걸 주문하네요.”

“이참에 좀 더 공부한다 생각해요.”

 

 
입 속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수희가 소리 내 웃었다.

아이처럼 웃는 수희의 얼굴 위로 열한 살 그때가 겹쳐 보였다.

문득, 입매에 미소를 지운 그를 보고 수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뇌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승조는 한참 수희의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들여다봤다.


“오수희 씨.”

나직하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수희의 입매에 걸려 있던 미소도 모습을 감췄다.

승조의 입에서 나올 말은 자신을 뒤흔들 만큼 거대하리라 짐작했다.


“그 꿈, 또 꾼 적 있습니까? 나랑 이름이 똑같은 아이가 나오던 꿈.”

수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를 만나 전부 물을 작정이었다.

내가 꾼 꿈처럼 과거에 우리가 정말 친했던 사이인 건지.

그걸 당신도 알고 있는 건지.

그런데 막상 승조와 마주하자 그 말이 바닥에 박힌 돌멩이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주해야 하는 진실 앞에서 빙글빙글 맴돌기만 하던 수희가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 전에도 꿨어요.”

“그러면 나한테 물을 말이 있을 텐데요.”

단정 지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수희의 입가가 굳었다.

자신이 궁금한 것이 무엇인지 승조는 전부 알고 있는 듯했다.

묻지 않아도 이미 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닫혀 있던 입술을 떨어트린 수희가 목에 걸려 있던 말을 뱉어 냈다.


“전에 그랬었죠. <침수> 회식 자리에서 만난 게 처음이라고. 정말…… 그때가 처음이에요?”

망설이던 게 무색할 만큼 승조는 너무나 쉽게 답을 내줬다.


“궁금한 게 그게 아닐 텐데.”

“…….”

“오수희 씨가 어릴 적에 나한테 했던 약속, 그 터무니없는 약속을 아직도 가슴에 품고 사는지가 궁금한 거 아닙니까?”

단단히 붙들고 있던 게 무색하게도 마음이 덜컥, 아래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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