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매달린 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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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매달린 건, 나
2022.06.21.
힘없이 벌어진 수희의 입술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승조는 수희의 속내를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침묵 속에서 수희의 눈동자만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고…… 있었네요?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거.”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승조는 굳이 철용에게서 힌트를 얻었다고 알려 주지 않았다.
그건 두 사람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아래로 시선을 떨어트린 수희의 얼굴에 혼동이 자리 잡았다.
“기억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제가 어렸을 때 한승조 씨랑 그런 사이였다는 거.”
“그런 사이라뇨.”
바닥에 붙어 있던 눈길을 끌어 올린 수희는 단조로운 승조의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방금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었던 게 모두 허상같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서먹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 수희가 장난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한승조 씨 책임지겠다고 했으면, 보통 사이는 아니었던 거잖아요.”
“아.”
이제야 수희의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 승조가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오수희 씨가 열한 살 때 일입니다. 그 약속에 큰 의미 부여한 적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책임진다는 말을 믿고 수희를 기다리는 건 이미 오래전에 했던 일이다.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더라면 자신이 찾기 전에 수희가 먼저 눈앞에 나타났을 것이다.
기별 없이 멀어진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 그건, 수희의 인생에서 자신은 그다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기 때문일 테고.
“다…… 다행이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수희는 입가가 굳어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따금 꾸었던 꿈속에서 자신과 승조는 퍽 애틋해 보였다.
어쩌면 승조가 어렸을 적 한 약속을 마음에 품고 있을 수도 있겠다 여겼었다.
그래야 자신의 복귀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게 이해가 됐으니까.
한데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던 듯했다.
“오수희 씨와 했던 약속, 나도 잊고 살았었습니다.”
이건 명백한 거짓이었다.
“어렸을 적에 한 사소한 약속을 전부 기억해 두진 않으니까요.”
이것도 거짓.
뱉는 말마다 거짓인 건 수희를 위해서였다.
수희와 했던 약속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순수했던 그 시절에 한 약속 때문에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해서였다.
승조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수희의 복귀였다.
괜히 과거의 일을 들먹여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걸 수희도 바랄 거라 여겼다. 분명 이 모든 게 수희를 위한 일이었다. 하지만 수희는 도리어 승조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아릿한 숨을 내쉰 수희가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저는 혹시나 한승조 씨가 그 약속 때문에 결혼도 못 하고 살고 있는 거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게요. 진짜 쓸데없는 걱정 했네요.”
그동안 아등바등했던 시간이 허무해졌다.
한승조는 자신과 한 약속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것도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더 친해지고 싶어 노력 중이라고 한 것도, 어쩌면 일로 가까워지고 싶다는 의미 아닐까.
한순간에 의욕을 잃어버린 수희는 기운이 쭉 빨려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와서 어색하게 굴 거 없어요.”
“…….”
“지금처럼 적당히 거리 유지하면서 지내고 싶은 거잖아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지금보다 우리의 거리가 아주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좁혀졌으면 했다.
승조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신을 괴롭혀 오던 사고마저 잊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그랬다.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엄마의 바람을 잠시나마 지울 수 있었다.
내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처.
내가 유일하게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승조는 어느새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선을 긋고, 벽을 세우고, 견고한 열쇠까지 걸어 잠글 줄은 몰랐다.
싫었다. 자꾸만 밀어내는 것 같은 그의 어투가.
이렇다 할 감정 없이 바라보는 눈이.
“적당한 거리, 좋죠, 그거.”
승조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승조의 말이 우리 사이가 다른 관계들과 다를 게 없다는 것같이 들려왔다.
주변을 에워싸는 고요가 바늘이 되어 수희의 몸을 쿡쿡 찔러 대는 것 같았다.
여기 더 있다가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수희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태블릿은 좀 빌려 갈게요,”
급하게 자리를 뜨는 수희를 보고 승조도 따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더 물을 건 없습니까?”
잠시 멈칫한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옛날 일에 대해서요?”
그가 짧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애플리케이션 구동하는 데 더 물을 건 없냐는 뜻이었습니다.”
난 또 뭐라고.
걱정은 넣어 두라는 듯 수희가 입술만 들어 올려 미소를 만들었다.
“한승조 씨 바쁠 텐데 귀찮게 안 할게요.”
“…….”
“제가 계속 폐 끼칠 순 없잖아요.”
핸드백을 어깨에 멘 수희가 현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가 볼게요.”
승조가 혹여 배웅이라도 할까, 수희가 빠른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닫고 나온 수희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옅은 미소가 한순간에 가셨다.
힘없이 엘리베이터로 터덜터덜 걸어간 수희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희가 안으로 몸을 실었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가자 수희가 참고 있던 탄식을 흩뿌렸다.
“하아아.”
콩. 콩. 콩.
수희는 엘리베이터 벽에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물먹은 솜이 가슴속에 가득 들어찬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오수희 씨와 했던 약속, 나도 잊고 살았었습니다.”
이미 16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때 한 약속을 잊은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약속을 잊고 산 건 수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승조에게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없었다.
16년 동안 네가 한 약속 때문에 결혼도 못 했으니 책임지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분명…… 다행인 건 맞는데.”
왜 섭섭하고 서운한 걸까.
***
그 일이 있고 나서 이틀이 지났다.
수희를 태운 검은색 밴이 별처럼 빛나는 홍콩 도로를 가로질렀다.
“정말 한 대표님은 안 오시는 거야?”
건네 오는 철용의 물음에도 수희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한 대표님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야.”
사실 승조를 만나러 갔을 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며칠 전, R 브랜드 앰배서더인 수희는 홍콩에서 펼쳐지는 부티크 오픈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승조와 함께.
최 사장은 승조와 파트너로 다녀오길 원했지만, 승조에게 따로 연락을 넣지 않았다.
차라리 싸웠더라면 이렇게 껄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조와 유지해야 할 적당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 대표님이랑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R사에서 홍콩에서 제일 좋은 호텔로 잡아 줬잖아.”
“큰 호텔 방에서 혼자 자면 더 좋지.”
“이럴 때 데이트하면 좋다 이거지. 곧 드라마 들어가면 얼굴 볼 시간도 없을 텐데.”
아무리 철용이 아쉬워해 봤자, 이미 수희를 파티 장소에 내려 주기 직전이었다.
지금 당장 승조를 부른다고 하더라도 서울에서 홍콩까지 비행기로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도착했을 시점에 파티는 끝이 날 것이다.
밴이 파티장 앞에 세워지자 수희는 블랙 튜브톱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가 볼게.”
“끝나면 연락해.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
밴의 문을 열자마자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밴 밖으로 긴 다리를 내리고, 허리를 세우며 직각 어깨를 활짝 펼쳤다.
심플한 드레스라도 수희의 이목구비가 화려하니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블루 카펫을 밟은 수희가 포토월에 서자 너 나 할 것 없이 셔터를 눌러 댔다.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수희가 포즈를 취했다.
뒤이어 다른 연예인을 태운 밴이 도착하자, 수희가 기자들을 뒤로하고 포토월을 떠났다.
굳게 닫혀 있는 파티장 앞에는 경비원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연예인뿐만 아니라 유명 인사들까지 찾아오는 자리니 그럴 만도 했다.
얼굴을 알아본 경비원이 문을 열어 주자 수희가 발걸음을 떼어 냈다.
파티가 펼쳐지는 건물은 높은 천장이 시선을 압도했다. 잔잔하게 깔린 재즈 음악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공명했다.
수희가 안으로 들어서자 각국의 유명 인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어 왔다.
「반가워, 수희. 이번에 영화 봤어.」
「나 오래전부터 네 팬이었어. 나중에 사인해 줄 거지?」
「오늘 입고 온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린다.」
일일이 대답해 줄 틈도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수희가 눈인사만 건넸다.
수희의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멀찍이 떨어져 수희를 주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오수희 혼자 왔네? 남자친구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나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오수희랑 한승조 스폰 관계였다며? 오수희가 한승조 약점 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열애 인정한 거라던데.”
“은채 너는 뭐 들은 거 있어?”
금수저 집안 어린 자제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제삼자의 연애사였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던 은채가 귓바퀴 너머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저도 사촌 오빠한테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은데, 떠도는 말로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스폰이라고?”
“네.”
“어쩐지 요새 연예 뉴스에 오수희 이야기밖에 없더라.”
언론사를 가지고 있는 사촌 오빠를 들먹이자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이번에 오수희, 김시운 작가 드라마로 복귀한다던데. 작품 이름이 <패밀리>였나?”
“오수희랑 김시운 작가랑 만난다고 하니까 벌써 광고들이 줄을 섰다던데?”
김시운 작가 이야기가 나오자 은채의 어금니가 으드득 갈렸다.
한 달 전, 은채에게도 드라마 <패밀리>의 출연 제안이 들어왔었다.
주조연 자리라 거절하려 했지만, 작품이 워낙 마음에 들어 출연을 확정 지었다.
그런데 얼마 전, 자신이 눈독 들이던 여자 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수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재수 없어, 오수희.’
수희를 처음부터 밉게 본 건 아니었다.
한때는 자신과 똑같은 나이에 이미 성공한 배우로 인정받는 수희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면서 은채에게는 자부심이 생겼다.
난 오수희에게 밀리지 않는다. 내가 오수희보다 못한 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수희보다는 매번 아래에 있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건 자신이 하고 싶은 역을 매번 빼앗아 가는 수희 때문이었다.
이번에 500만을 돌파한 영화 <침수>만 해도 그랬다. 진즉 소속사를 통해 여자 주인공 자리를 맡고 싶다고 했지만, 이미 수희가 검토 중이라는 말만 돌아와 포기해야 했다.
모두에게 기회는 동등해야 하건만 수희에게만은 달랐다.
게다가 승조와의 열애설로 세간의 관심사가 되니 한층 더 수희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오수희 온다. 웃어, 웃어.”
은채는 제 옆구리를 찌르는 손가락에 굳어져 있던 얼굴을 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수희의 흉을 보던 사람들은 금세 새로운 가면을 썼다.
“수희 씨!”
“이쪽으로 와요.”
은채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상냥한 얼굴을 하고 수희를 불러들였다.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희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주 오래전, 작품으로도 만난 적 있는 은채를 보고 수희가 반갑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은채 씨. 여기서 보네요.”
증오를 잠시 묻어 둔 은채가 다른 사람들처럼 방실거렸다.
“우리 그때 말 놓기로 했었는데.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잊었어?”
“아, 그랬었지. 미안해, 내가 요새 정신이 없어서.”
‘거봐, 너한테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1 정도네.’
자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듯한 수희의 발언이 신경에 거슬렸다.
은채의 속을 알지 못하는 수희는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당사자의 뒷담화를 하고 있었는데 사실대로 말할 간 큰 인간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적당히 눈빛을 교환하다가 대충 둘러대려던 순간이었다.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
단조로운 음성 하나가 끼어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턱을 들어 올려야 할 정도로 큰 키, 다른 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빛나는 얼굴.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이름을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수희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제 어깨 위로 남자의 손이 올라왔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손의 주인은 한승조였다.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의 등장에 수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입을 벌렸다.
“우리 연애사가 많이들 궁금하신가 봅니다.”
승조가 전부 들었다는 생각에 사람들의 얼굴이 한순간에 붉어졌다.
옅게 머금고 있는 미소와는 달리, 승조의 눈빛은 고압적이기까지 했다.
“궁금하면 알려 드려야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했을 때.
승조는 수희를 내려다보며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매달렸습니다, 오수희 씨한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말이에요.”
수희는 착각이 들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정말 날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