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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무개의 등장 (42/118)


42. 아무개의 등장
2022.06.25.



“제가 매달렸습니다, 오수희 씨한테.”

“…….”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말이에요.”

홍콩에 갑자기 나타난 승조에 한 번 놀라고, 전혀 합의되지 않은 발언에 또 한 번 놀랐다.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수희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한순간에 논란을 잠재운 승조가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셔도 됩니다. 몇 번이라도 답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에게 꽂히는 시선은 서슬이 퍼런 칼날과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 앞에서 못 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않는 게 맞는 거겠죠.”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던 눈길이 마지막으로 은채에게 닿았다.

마치 날이 선 칼끝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은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하하. 그렇죠. 앞에서 못 할 말은 뒤에서도 하면 안 되는 건데.”

“두 사람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우리가 괜히 오지랖 부렸네.”

“우리가 눈치가 없네요.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경솔했던 행동에 대해 변명할 여지도 없기에 사람들은 낯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다른 테이블로 후다닥 도망쳤다.

자존심에 꿋꿋이 남아 있으려 했던 은채의 팔을 무리 중 하나가 잡아끌었다.


“우리가 방해하면 안 되지. 가자, 가자.”

거의 반강제로 은채가 끌려가고, 테이블에는 수희와 승조만 남게 되었다.

어깨에 감겨 있던 승조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수희는 그제야 품고 있던 의문을 꺼냈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오히려 내가 여기에 있어야 맞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수희가 승조의 초대장까지 받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최 사장님이 직접 연락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몰랐을 거예요.”

오전에 최 사장에게 온 연락을 받고 승조는 곧장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봤다.

촉박하게 예약하는 바람에 이코노미석밖에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왜 나한테 같이 오자고 말 안 했습니까.”

“……일 바쁘잖아요. 굳이 중요한 일정도 아닌데 같이 올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나마 댈 수 있는 게 일 핑계였다.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불편하다고 느끼는 건 자신뿐인 것 같아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가짜 연애에 열의를 다한다, 우리가 쓴 계약서 잊었습니까?”

수희는 혹여 다른 사람에게 목소리가 들릴까 노심초사했다.

승조의 팔을 붙잡아 당긴 수희가 뒤꿈치를 들어 올렸다.


“조용히 해요. 다른 사람들 들으면 어떡해요.”

갑자기 확 줄어든 눈높이에 승조의 시야 안으로 수희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수희의 입술은 칵테일 위에 올려진 체리처럼 촉촉하게 물들어 있었다.

일순간 잠잠했던 승조의 검은색 눈동자가 격하게 동요했다.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욱 애태우게 만들고 싶어졌다.

주변을 한껏 의식하며 수희가 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계약서에 관한 내용은 모든 이들에게 비밀에 부친다, 이건 기억 안 나는 거 아니겠죠?”

“다음부터는 중요한 자리가 아니라도 같이 움직이죠.”

수희의 눈이 똥그래졌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내듯 승조의 한쪽 눈썹이 산처럼 올라섰다.


“나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 들켰다.

수희의 침묵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편할 리 없다는 거 잘 압니다.”

“…….”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홀로서기에 빨리 성공해야겠네요.”

불편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명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수희의 곁으로 R사 디자이너가 다가왔고, 승조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다른 테이블로 향하는 승조를 곁눈질하던 수희는 디자이너와 인사를 나눴다.

눈으로는 승조를 좇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놓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수희!”

어설픈 한국어에 수희는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라이언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남자친구는 안 보이네? 성조? 선조?」

승조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건지 라이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조요.」

깨달음을 얻은 라이언이 손바닥 위에 주먹을 내리쳤다.


「그래. 승조, 그 이름이었어.」

「아까까지 옆에 있었는데, 잠시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아요.」

수희가 파티장에 도착한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파티장 내부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이리 많으니 승조를 찾는 데 꽤 난항을 겪을 듯했다.


「이렇게 예쁜 레이디를 혼자 뒀다가 큰일 나려고.」

진심이 담긴 말이었지만, 수희는 농담처럼 넘겼다.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꼭 그래 줘. 수희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보고 싶으니까.」

대화가 끝나 갈 때쯤, 라이언은 누군가를 발견한 건지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어깨 너머로 넘어간 시선에 수희가 뒤쪽으로 몸을 틀었다.


「내 새로운 뮤즈 왔네.」

라이언의 손짓에 수희의 테이블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인파에 둘러싸여 있던 남자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 남자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수희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차준영.”

 

 
준영은 라이언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수희에게 옮겼다.


“누나.”

얼마나 반가웠던 건지 한달음에 수희에게 걸어왔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본 라이언이 입꼬리를 씩 들어 올리며 뒷걸음질 쳤다.


「난 다른 손님들이랑도 인사하러 가 볼게.」

라이언이 알아서 자리를 비켜 주자, 수희가 편하게 준영을 대했다.


“언제 제대한 거야? 난 왜 몰랐지?”

“누나 기사에 전부 묻혔으니 모르실 수밖에 없죠.”

서서히 거리를 두며 멀어지던 라이언이 뒤늦게 승조의 걱정을 했다.


「선조. 빨리 와야 할 텐데.」

근심이 담긴 말과는 달리 라이언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난 사랑싸움이 재밌긴 하니까 상관없지만.」

신이 난 라이언이 휘파람을 불며 자신을 부르는 테이블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희는 근 2년 만에 준영과 재회하게 되었다.

처음 준영을 만난 건 수희가 열아홉 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최고 시청률 32%를 기록한 주말 드라마에 함께 출연했었다.

당시 준영은 열여섯 살,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첫 데뷔라 수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발성부터 호흡까지 기본적인 연기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기도 했고, 지루한 대기 시간을 함께 보내는 친구이기도 했다.

촬영장에 같은 나이 또래는 둘뿐이어서 촬영 기간 내내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됐었다.

바쁜 와중에도 간간이 안부를 전하던 둘은, 고등학교로 올라간 준영이 학업에 열중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불과 3년 전, 휴대폰 광고 모델로 함께 발탁되며 연락처를 주고받게 되었던 것이다.


“기특하다, 기특해. 네가 벌써 군대를 다녀오고.”

“남들 다 갔다 오는 군댄데요, 뭐.”

준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수희의 눈에는 아직 준영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아직 준영의 중학생 시절이 기억에 남아 있어서인 듯했다.


“젊은 나이에 군대 다녀오는 게 얼마나 대단해. 게다가 해병대였잖아.”

“기억하고 있었네요?”

수희가 기억을 해 줬다는 것에 준영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종종 해병대에서 생활하는 사진도 뉴스에서 봤는걸?”

“어떤 사진요?”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나? 동기들하고 같이 찍은 거 봤었어.”

“아, 그 사진 봤어요? 그 사진 못 나왔는데.”

햇볕에 그을어 까맣게 탄 얼굴에 까까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쓱해진 준영이 아직 많이 기르지 못한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어쩐지, 전보다 많이 탄 거 같다? 그래도 하얗긴 하지만.”

들어 올려진 수희의 손이 준영의 뺨에 닿았다.

사춘기 때부터 지겹도록 붙어 다녀서인지,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수희뿐만인 듯했다. 알게 모르게 얼굴을 붉힌 준영의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궈졌다.

부끄럼을 타면서도 준영은 수희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제대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으니까요.”

“그러게. 예전에는 나보다 피부가 하얬잖아.”

“에이. 그건 아니에요, 누나. 누나보다 하야면 눈사람이게요?”

그동안 쌓았던 회포를 풀듯, 두 사람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두 손에 샴페인 잔을 쥔 승조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수희에게 줄 샴페인을 가져오는 틈에 옆자리를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뺏기고 말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하는지, 하하 호호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게다가 수희의 손이 아무개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콰광. 콰광.

날이 좋았던 터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도 아닐 텐데 머리 위에 천둥이 내려앉았다.

설핏 미간에 주름이 잡힌 승조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지금 여유롭게 샴페인이나 들 때가 아니었다.

터벅터벅. 큰 보폭으로 단숨에 수희의 앞으로 걸어갔다.

승조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수희는 준영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드리워지는 승조의 그림자를 먼저 알아차린 준영이 고개를 틀었다.

미소를 띠고 있던 수희는 준영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안 보이던데,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수희의 물음에도 승조의 시선은 준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는 얼굴이 보여서 잠깐 인사 나누고 왔습니다.”

“그랬구나.”

자그마하게 중얼거린 수희는 승조의 눈빛을 따라 준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준영 역시 승조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음.”

순식간에 주변을 맴도는 숨 막히는 기류에 수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핑퐁을 하듯 승조와 준영은 시선을 주고받기만 했다.

잠깐의 고요 속에서 두 남자는 서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이 자리가 너무 불편한데, 나만 그래요?”

삐질, 비지땀을 흘린 수희의 물음에 준영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이분이 누나 남자친구분이시죠?”

요 며칠 떠들썩하게 기사가 난 터라 승조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다.

승조는 준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척이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건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다.

다정한 말씨보다 거슬리는 ‘누나’라는 호칭 때문이었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기에 친근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승조는 저 아무개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작은 얼굴에 올망졸망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살짝 그을리긴 했어도 남자치고는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쌍꺼풀진 커다란 눈에 뽀얀 얼굴은 착하고 선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일면식이라도 있는 건지 얼굴이 낯익었다. 그런데 어디서 만난 건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차준영이라고 합니다. 누나가 어떤 남자분을 만나실지 궁금했는데……. 직접 만나 뵙게 되니 반갑네요.”

그걸 왜 당신이 궁금해하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렇다고 유치하게 악수를 청해 오는 손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나 얼굴처럼 하얀 손을 움켜잡은 승조가 입술을 떨어트렸다.


“한승조라고 합니다. 수희 씨한테 이렇게 큰, 동생이 있는지는 몰랐네요.”

조금 전까지 유치하게 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준영의 손을 붙잡은 승조의 손에 점차 힘이 실렸다.

커다란 손등에 핏대가 서자, 붙잡힌 흰 손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날카롭게 뻗은 승조의 눈매가 번뜩이며 빛을 냈지만, 혈기 왕성한 준영의 기세를 꺾지는 못했다.


“누나가 잘, 키워 준 덕분에 많이 컸습니다.”

남자들은 동물적인 감각이 무척이나 뛰어났다.

두 사람은 서로가 적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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