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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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좋아해요
2022.06.28.
오가는 승조와 준영의 눈빛에 주변까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파지직, 일순 튀어 오르는 스파크에도 수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왜 저렇게 손을 오래 잡고 있지.’
맞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릴 때쯤,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놓았다.
얼마나 억세게 쥐고 있던 건지 두 사람의 손에는 서로의 손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준영은 보란 듯 승조에게 등을 보이고 서서는 수희에게 말을 건넸다.
“누나, 이번에 드라마 <패밀리> 들어간다는 거 들었어요.”
“아, 기사 봤어?”
“기사 뜨기 전에 알았어요. <패밀리> 대본 들어왔을 때, 사장님이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이 작품 여자 주인공 누나로 확정됐다고.”
승조는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그 예감은 틀린 게 아닌지 준영이 승조를 눈으로 흘겼다.
“그 작품 저도 하기로 했어요.”
“정말? 무슨 역인데?”
소리 없이 준영이 웃어 보였다.
“구은도 역요.”
배역의 이름을 듣자마자 승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승조는 가장 먼저 수희의 표정을 살폈다. 시야 안으로 다채롭게 급변하는 수희의 얼굴이 들어찼다.
“남자 주인공 역이잖아.”
수희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 준영이 성공했다는 듯 밝은 목소리를 냈다.
“잘됐죠? 누나랑 꼭 다시 연기해 보고 싶었거든요.”
다시 연기해 보고 싶었다는 말에 승조는 준영이 누구인지 확실히 떠올랐다.
승조는 수희가 서울로 떠나고 난 후부터, 수희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꼭 챙겨 봤었다.
수희가 빛을 보기 시작했던 작품 <떠오르는 태양처럼>에 준영과 함께 출연했었다.
“그럼 이제 자주 볼 수 있겠네?”
준영은 수희와 함께 일하는 것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는 듯했다.
분명 차준영은 수희에게 남매간의 애정 같은 걸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건 수희를 바라보는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수희를 보는 눈에서 그야말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수희가 저렇게 기뻐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하얀 이까지 드러날 정도로 밝게 웃어 주는 걸까. 그것도 아주 예쁘게.
“준영.”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테이블에서 누군가 준영을 불렀다.
준영이 못 들은 것 같아 보이자, 승조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저쪽에서 차준영 씨를 부르네요.”
“아, 그래요?”
준영의 얼굴에서 이대로 떠나기엔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가 보셔야죠.”
승조가 등을 떠밀듯 힘주어 말했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서 가라고 강조하는 듯했다.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느끼지 못한 수희가 준영의 팔을 가볍게 떠밀었다.
“너 바쁜데 내가 오래 붙잡아 뒀네. 어서 가 봐.”
아쉬움에 준영의 발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멈칫거리던 준영이 발을 떼어 내었다가 도로 제자리로 가져왔다.
‘안 가고 뭐 해.’
미간을 한껏 구긴 승조가 준영의 뒤통수에 따가운 눈빛을 쏘아 댔다.
“누나 번호 안 바뀌었죠? 010-1294-3XXX.”
“내 번호 외우고 있어?”
“저 원래 숫자 잘 외우잖아요.”
“아, 맞다. 너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상도 받았었지?”
훈훈하게 생긴 얼굴에 똑똑한 두뇌까지.
승조는 준영을 좋게 보려고 해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곧 대본 리딩도 할 텐데 미리 만나서 대사 맞춰 보는 게 어때요?”
그만하고 이제 가 줘도 될 것 같은데.
승조는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니, 당장 두 사람을 파티장 끝에서 끝으로 떼어 놓고 싶었다.
“좋아. 나중에 너 시간 날 때 연락해 줘.”
“연락할게요.”
다시 만날 약속을 잡고 나서야 준영은 다른 테이블로 발길을 돌렸다.
수희는 샴페인 잔을 쟁반에 들고 온 파티 도우미에게 한발 다가갔다.
샴페인 잔 두 개를 가져온 수희가 잔 하나를 승조에게 내밀었다.
“마실래요?”
수희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든 승조는 단박에 샴페인을 비웠다.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김없이 샴페인을 들이켜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샴페인을 물 마시듯이 마셔요?”
“안이 덥네요.”
덥나? 전혀 못 느꼈는데.
주위를 둘러보지만 사람들 모두 옷 한 겹 벗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마시면 나중에 취기가 올라서 더 덥지 않을까요?”
“꽤 일리 있는 말을 하네요.”
“그럼요. 저도 머리라는 게 있는걸요?”
승조는 다 마신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패밀리> 말고 다른 작품도 재밌게 보지 않았습니까?”
“한승조 씨가 추천해 준 건 다 재밌었죠. 왜요?”
“다른 작품으로 출연 변경하고 싶으면 지금 바꿔도 늦지 않습니다.”
이미 기사까지 다 나온 마당에 굳이?
너무나 뜬금없는 말에 수희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아뇨. 전 그 작품이 좋았어요.”
“아쉽네요.”
뭐가 아쉽다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도 준영이 다녀간 뒤로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도 했다.
승조는 수희의 곁으로 조금씩 모여드는 남자들을 의식하느라 예민해진 상태였다.
국적을 불문하고 다들 수희에게 말 한마디 걸고 싶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승조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또 수희의 옆자리를 뺏길지도 몰랐다.
어쩌면 겨우 쫓아낸 준영이 다시 수희의 곁으로 올 수도 있었다.
애가 타니 목까지 타올랐다. 승조는 제 옆을 지나가던 파티 도우미에게 샴페인 한 잔을 다시 건네받았다.
도무지 마음 놓고 수희와 대화하는 게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경쟁자들을 피해 수희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곳이 필요했다.
“밖에 나가서 이야기 나누죠.”
승조가 테라스로 눈짓하기에 수희는 당연히 그가 더위를 느껴서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을 독점하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수희는 순순히 승조를 따라 테라스로 향했다.
승조가 테라스 문을 열자 시원한 밤공기가 수희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파티가 한창인 마당에 테라스로 나온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무심결에 승조에게 고개를 돌렸던 수희는 재킷 깃을 감싸 쥔 그를 말렸다.
“안 추워요. 옷은 안 벗어 줘도 돼요.”
“…….”
가만히 수희를 바라보던 승조가 깃을 정리하던 손을 아래로 내려 재킷 단추를 곱게 여몄다.
옷매무새를 정돈하던 거였는데 자신에게 옷을 벗어 주려는 거라고 착각하고 말았다.
민망해진 수희가 허공에 올라섰던 손을 거둬들이며 괜스레 머릿결을 정리했다.
“……보통은 옷 벗어 주지 않나.”
볼멘소리를 내던 수희에게 승조가 재킷을 벗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벗어 줄게요.”
“아뇨, 아뇨! 엎드려 절 받는 거 정말 싫어요.”
가볍게 웃음을 흩뿌린 승조가 구겨진 재킷을 손으로 훌훌 털어 냈다.
승조는 사람들이 없는 테라스로 나오자 마음에 여유가 생겨나는 듯했다.
떠들썩한 장내와 대비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망친 테라스는 고요하기만 했다.
“회사 일도 바쁠 텐데 멀리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잔잔하게 떠도는 바람결 위로 수희의 말이 실렸다.
“지금은 일보다는 우리가 한 계약이 우선이니까요.”
곧장 돌아오는 답이 수희는 조금 서운했다.
그래도 걱정돼서 왔다고 해 주면 기쁠 것 같았는데.
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아 자조적인 웃음이 튀어나왔다.
“왜 웃어요?”
속마음을 알려 줄 수는 없었기에 수희는 대충 둘러댔다.
“그냥,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분위기만 맞추기 위해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던 수희가 문득 떠오른 주제를 꺼냈다.
“오늘 입은 옷 한승조 씨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원래 정장이 잘 어울리긴 하지만요.”
“갑자기 칭찬입니까?”
“제가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라서요.”
작게 미소 짓는 수희를 바라보던 승조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입술이 벌어졌다.
“오수희 씨도 예쁩니다.”
“저 엎드려 절 받는 거 싫다고 했잖아요.”
“절 같은 거 안 합니다, 나는.”
단정한 그의 입매가 초승달처럼 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예뻐요, 오늘.”
그만 말해도 되는데…….
머릿속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질리도록 들어 온 말이건만, 그가 꺼낸 예쁘다는 말에 심장이 쿵덕쿵덕 방아를 찧어 댔다.
“알고 있어요, 저 예쁜 거.”
괜히 농담처럼 그의 말을 넘기며, 수희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피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8시가 지나자 빽빽하게 세워진 건물들이 기다렸다는 듯 찬란하게 빛을 뿜어냈다.
바다와 하늘을 향해 선명한 불빛을 쏟아 내는 건물에 말간 수희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홍콩의 야경을 처음 눈에 담는 것처럼 새롭게만 느껴졌다.
펑.
그때, 높다란 건물 위로 커다란 폭죽 하나가 터져 올랐다.
“와, 예쁘다.”
별빛처럼 반짝이며 쏟아지는 폭죽에 수희는 샴페인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난간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정신이 얼얼할 만큼 폭죽 소리가 대단했지만, 관람을 하는 데 큰 방해 요소는 아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불꽃놀이야.”
일정에 치여 바쁘게 살다 보니 시간 내서 여행 한 번 떠나는 게 어려웠다.
그러니 이런 불꽃놀이를 즐길 시간 따위는 가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수희 씨는 어렸을 때도 불꽃놀이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도 변한 게 없네요.”
잔뜩 신이 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수희가 되물었다.
“제가요?”
“운동장에서 5백 원짜리 폭죽 한가득 사서 나랑 같이 놀았던 거, 기억 안 납니까?”
전혀 기억 안 난다는 얼굴에, 승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넘겼다.
“폭죽 소리 듣고 나타난 경비원 아저씨를 피해서 도망쳤었죠. 물론, 나 혼자 놔두고요.”
“저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니에요.”
사람 잘못 봤다는 듯 수희가 잔뜩 억울함을 토로했다.
“치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열한 살 그때는.”
기억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수희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아름다운 폭죽의 빛깔에 따라 두 사람의 눈동자도 색색으로 빛났다.
“그날 밤이랑 지금이랑 똑같은 표정이었습니다.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
똑같은 건 표정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옆에 있어 준 건 승조였다.
지금 이 순간이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건 모두 그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아무래도 승조와 거리를 두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이렇게 함께 있으면 설레고 좋은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좋아한다.’
방금 그렇게 생각했다. 한승조를 좋아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순간, 수희는 심장부터 배꼽까지 간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하늘 위에 그려지는 불꽃을 바라보던 승조가 수희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돌렸다.
“무슨 할 말 있습니까?”
내가…… 한승조 씨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간질거려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것도, 떨려서 미칠 것 같은 것도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모두 다 저 남자, 한승조 때문이었다.
차라리 무뚝뚝하지. 왜 가끔 다정하게 굴어서 사람 마음을 헤집어 놓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웃어 주지 말지. 한 번씩 왜 날 보고 웃어 줘서 두근거리게 하는 걸까.
좋아하는 감정을 만들어 준 건 다 한승조 책임이었다.
그러니 한승조는 책임져야 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이다.
펑. 펑.
온몸이 진동하는 게 천공을 수놓는 저 불꽃 때문인 걸까.
그게 아니면 심장의 울림 때문인 걸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는 숨처럼, 부푼 마음이 터져 버렸다.
“좋아해.”
펑, 하고.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