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뜨거운 밤
(4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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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뜨거운 밤
2022.07.05.
「아뇨. 방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이거 지금 내가 제대로 해석한 게 맞지?
하지만 수희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승조가 방은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리고 보란 듯 자신의 방 키를 들고 있었다.
굳어 버린 수희와는 달리 승조에게서는 전혀 어색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황한 수희는 방 키와 승조를 번갈아 보는 통에 준영의 표정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희와 달리 승조는 시시각각 바뀌는 준영의 낯빛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수희를 보고 올라서 있던 준영의 입술은 어느샌가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승조는 발길을 돌리며 엘리베이터를 눈짓했다.
“피곤한데 빨리 올라가서 씻죠.”
씨, 씻어?
한승조, 이 남자. 파티장에서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
아까 샴페인을 세 잔 정도 마시는 것 같더니 그 때문에 취한 건가.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정신을 차린 수희가 진지한 어투로 승조에게 물었다.
“혹시…… 어디 아파요?”
“오늘처럼 정신이 멀쩡한 날은 또 없을 겁니다.”
더없이 또렷한 눈길이 수희에게 닿았다.
눈을 보나, 말투로 보나 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더 당혹스러울 수밖에.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는 뜻이 될 테니 말이다.
“방으로 가죠.”
얼음 동상처럼 꽁꽁 얼어 버린 수희를 두고 승조가 먼저 발길을 옮겼다.
멈칫거리던 수희는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떼어 낼 수밖에 없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승조의 옆으로 수희가 금세 따라붙었다.
공교롭게도 준영 역시 체크인을 마친 매니저에게 방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승조와 수희가 몸을 실었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직전, 엘리베이터 안으로 준영이 올라탔다.
원래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이대로 정말 같이 방에 올라갈 거냐며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준영이 있으니 나와야 할 말이 도로 들어가고 말았다.
작은 소음도 일으키지 않는 엘리베이터가 고층을 향해 올라갔다.
현재 층수를 표시하는 엘리베이터 숫자가 27을 그리자 승조와 수희가 밖으로 내렸다.
R 브랜드에서 제공해 준 호텔 방은 모두 27층인 건지 준영 역시 함께 내렸다.
“누나도 같은 층이었네요.”
승조에게 온통 신경이 쏠린 수희가 딱딱한 입매를 들어 올렸다.
“하하, 그러게.”
등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 문이 덜컹 닫히고, 승조가 방 키에 적힌 룸으로 향했다.
결국 승조와 호텔 방까지 올라오고 만 것이다.
‘정말 같이 방을 쓰겠다는 거야?’
2701호에 멈춰 선 승조가 방 키를 도어 록에 가져다 댔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열리자 문을 승조가 끌어당겼다.
문이 열리자 수희가 승조를 빤히 바라봤다.
‘들어간다고요? 같이? 잔다고요? 같이? 우리 둘이? 이 방에서?’
눈으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승조에게는 조금도 닿지 못한 듯했다.
“오늘 많이 피곤할 텐데 일찍 자죠.”
“…….”
“같이.”
아픈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니면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그러는 사이 옆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영의 방이 수희의 바로 옆방이었다.
“잘 자, 준영아.”
“누나도 잘 자요.”
우물쭈물하던 수희는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승조가 수희의 뒤에 섰고, 두터운 문이 바로 뒤에서 닫혔다.
문이 닫히길 기다렸던 수희가 곧장 승조에게 돌아섰다.
한마디 뱉어 내려는데 승조가 검지를 들어 올려 제 입술의 중심을 눌렀다.
“아직 옆방에 사람 안 들어갔습니다.”
벌어졌던 수희의 입술이 꾹 닫혔다.
두 사람의 귀는 문밖에 있는 준영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수희의 눈이 바쁘게 굴러다녔다.
덜컹.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자그맣게 흘러들어 오자 수희가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수희는 별안간 승조가 이상한 행동을 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전부 승조와 자신이 연애한다고 알고 있는 준영을 의식해 한 행동이었다.
괜히 승조가 함께 자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미리 입이라도 맞췄으면 당황할 일도 없었을 텐데.’
뒤늦게 말 하나하나에 과하게 반응했던 것만 같아 민망해졌다.
‘같이 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
승조는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꺼내는 말들이 편하고, 행동들이 자연스러운 것일 거다.
차분하게 생각을 더 하던 수희가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방 두 개에 욕실 하나, 공용 거실도 딸린 큰 룸이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수희가 뒤를 돌아보았다.
승조가 몸을 틀기 전, 수희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어디 가요?”
“난 가볼 테니까 쉬어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수희가 뒤편을 눈으로 훑었다.
“방도 두 개고, 같이 자도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
“욕실이 하나긴 하지만요.”
현관 문고리를 붙잡은 승조의 손에 찰나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승조가 크게 동요했다.
“나랑 같이 자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엄연히 따지면 같이 자는 건 아니죠.”
수희가 붙어 있는 두 개의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 자는 거죠.”
“그러니까, 오수희 씨는 상관없다는 거죠.”
갑자기 왜 깐깐하게 구는 걸까.
충분히 상관없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아까 프런트에서 방도 하나 남아 있다고 했잖아요. 기적적으로 아직도 빈방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한방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던 승조는 이윽고 현관문을 닫았다.
승조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거실로 들어서자 수희가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러자 벗겨진 동그란 어깨가 드러났다.
오랜 시간 파티장에 있었던 탓인지 뒤늦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 먼저 씻어도 되죠?”
나른한 어투로 수희가 승조에게 의견을 물었다.
잠시 그가 말을 잃은 듯하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수희가 소파 위에 재킷을 올려 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거실에 홀로 남은 승조의 귓가에 욕실 안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거실 안이 물줄기가 바닥에 흩뿌려지는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이내 수희가 샤워를 하는 건지 물줄기가 무언가의 방해로 인해 사방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적나라케 들려오는 소리에 승조는 방문이 열린 방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오늘 한 번도 답답하다 느껴 본 적 없는 넥타이가 갑자기 거슬렸다.
넥타이 매듭을 붙잡고 끌어 내린 승조가 가장 위 단추마저 풀어냈다.
“저 먼저 씻어도 되죠?”
자신도 수희와 비슷한 말을 뱉었었다.
수희가 몇 배로 부풀려 돌려줄 줄은 몰랐다.
쉴 새 없이 몰아붙여 오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왜 이렇게 더워.”
몸이 달아오르는 건 호텔 방의 온도 때문이라 여겼다.
재킷을 벗어 내던 수희의 몸짓이 여전히 눈가에 아른거리던 승조가 눈꺼풀을 감았다.
뭔가 크게 후회할 일을 스스로 만든 것만 같았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수희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아 올리고, 입고 있는 샤워 가운을 좀 더 꼼꼼히 여몄다.
안에 슬립을 입고 있었지만 승조가 있으니 샤워 가운을 걸칠 수밖에 없었다.
막 호텔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방 하나의 문은 닫혀 있었다.
아마 승조가 방을 쓰고 있는 듯 보였다.
조용한 걸 보니 혹시 자는 걸까.
그래도 씻어야 할 테니 수희가 승조의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욕실 다 썼어요.”
잠든 건 아니었던 건지 곧바로 승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수희는 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종종걸음으로 비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 가운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일까 싶어서였다.
수희의 방문이 닫힌 직후에 승조가 문을 열고 나왔다.
터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넘어 있었다.
“피곤하네.”
비행에 파티에 거기에다가 승조와 호텔까지 오게 되다니.
감당하기 벅찰 만큼 하루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수면 유도제를 복용하지 않아도 오늘은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고 있던 샤워 가운을 벗어 내자 슬립의 얇은 어깨끈이 아래로 내려갔다.
수희의 살결처럼 뽀얀 슬립이 높게 솟은 가슴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샤워 가운을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벽에 달린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에 있던 불이 꺼지고 어둠이 방 안을 덮쳤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고 있었던 탓인지 몸이 아래로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졸려.”
침대에 몸을 뉜 수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푹신한 솜사탕 위에 쓰러진 것처럼 매트리스가 온몸을 감쌌다.
아래에 깔린 시트 속으로 들어간 수희가 보드라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잠자리에 들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 깜짝할 새 달곰한 수면 상태에 빠져들었다.
***
수희가 일어난 건 새벽 3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이겨 내지 못한 수희가 닫혀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승조가 잠든 방과는 달리 수희의 방에는 냉장고가 딸려 있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수희는 이불을 걷고 방 밖으로 나왔다.
잠이 덜 깬 탓인지 몸은 무겁고, 고개는 자꾸만 앞으로 꾸벅였다.
어찌어찌 거실로 나온 수희가 미니바를 찾아 열었다.
환한 불빛에 눈이 부셔 눈썹을 찡그리는 것도 잠시, 수희는 물을 찾아 손을 뻗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 건지 500㎖ 페트병의 물을 쉬지도 않고 들이켰다.
미니바 문을 닫은 수희가 반쯤 남은 물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방으로 들어갔다.
작은 창문 틈으로 푸른 달빛이 흘러들어 오고 있었지만, 그 빛으로 방 안을 비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에 반쯤 취한 수희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이불을 들어 올렸다.
침대로 몸을 밀어 넣은 수희가 포근한 이불 속에서 몸을 바로 뉘었다.
금방 잠에 빠져들 것처럼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했다.
몸을 모로 돌린 수희가 머리를 베개에 비비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흐음.”
다시 잠을 청하는데 수희의 뺨을 여린 바람이 간질이고 지나갔다.
바람결에 따라 머리카락이 뺨 위에서 팔랑거렸다.
창문이 열리기라도 한 걸까.
평소라면 열린 문을 닫았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다른 때와는 달리 수면 유도제 없이도 잠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단잠에 불어오는 바람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불 속이 따듯하니까 감기는 안 걸리겠지.’
방 온도가 그다지 높지도 않을 텐데도 이불 안의 온기가 수희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 왠지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바스락.
수희의 움직임에 어깨에 얹어진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이불이 내려가자 수희가 쌀쌀한 한기를 느끼며 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못된 손은 주인이 잠든 틈을 타 그것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곰 인형이라고 보기엔 털은 존재하지 않았고, 베개라고 보기에는 따끈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잠결에 뭘 못 하랴. 탄력 있고 보드라운 촉감에 수희의 손이 바삐 움직이다 이내 그것을 꽉 끌어안았다.
잠시 끌어안은 것뿐인데 그것엔 금세 후끈 열이 몰렸다.
그것이 곰 인형도, 베개도 아닌, 한승조인 건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