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아침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 (46/118)


46. 아침에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
2022.07.09.



 
푸른빛의 새벽이 물러가고, 희미해진 달이 이내 모습을 감췄다.

흰 구름을 가른 해가 높다랗게 떠오르며 또 하루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아침 8시. 보통 승조는 6시가 되자마자 잠에서 깨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때와는 달리 원래 일어나는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지나 눈이 떠졌다.

더군다나 낯선 곳에서 이렇게 오래 잠을 청한 적은 없었다.

느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승조의 시야에 무언가 가득 들어찬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코끝이 부딪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수희가 누워 있었다.

승조는 아직 꿈이라고 생각해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어떻게 꿔도 이런 꿈을 꾸지.’

잠들기 전까지 수희를 떠올린 탓에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설정은 신혼부부가 아닐까.

신혼부부라니.

피식, 작게 웃음을 뱉어 낸 입술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

감고 있던 눈을 뜬 승조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형상에 의문을 가졌다.

눈앞에 그려진 장면은 너무나도 현실감이 넘쳐흘렀다.

승조의 시선이 반달처럼 둥근 수희의 이마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자를 가져다 대고 빚은 듯 직선으로 우뚝 솟아난 콧대.

아기처럼 모공 하나 없이 뽀얗고 맑은 피부.

그리고 밤새 딸기라도 훔쳐 먹은 듯 빨간 입술.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눈길을 겨우 떼어 내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종이처럼 얇은 슬립 한 장을 본 순간 정신이 확 깨어났다.

누군가 뒷머리를 세게 내려친 것만 같았다.

이건 꿈이어야 했다. 다시 눈을 감고 어서 이 꿈에서 깨어나길 바랐다.

눈을 감고 있으니 슬립을 입고 있던 그 하얀 몸이 더욱 선명해졌다.

움푹 파인 쇄골, 그 아래에 머물러 있는 살덩이.

눈을 뜨면 수희가 보였고, 눈을 감아도 수희가 보였다.

한순간에 잠이 달아난 건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게 가슴에 와닿았다.


‘왜 오수희가 여기 있지.’

분명 각자의 방에서 각자 자기로 했었다.

이렇게 한 침대에서 같이 붙어 자기로 한 게 아니었다.

수희가 왜 여기 있는 건지 고민하는 건 멈추기로 했다. 답을 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온통 아기 살결처럼 말랑하고 솜털 같은 이 여자와 하룻밤을 잔 것이다.

간밤에 자신이 실수한 건 없길 바라지만,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었다.

마치 연인과 함께 잠이 든 것처럼 자신의 팔 하나는 수희의 머리 아래, 다른 팔 하나는 수희의 허리에 감겨 있었다.


‘일단 일어나자.’

그림자를 그릴 만큼 긴 속눈썹이 빽빽이 박힌 눈은 아직 닫혀 있었다.

수희가 일어나기 전에 이 방을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일단 수희의 허리 언저리에서 팔을 떨어트려 놓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수희의 머리 아래에 깔린 팔이었다.

조심히 머리를 들어 올린 승조가 팔을 빼내려는데.


“으음.”

수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승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톡, 수희의 이마가 자신의 심장 부근에 닿자 모든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설상가상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껏 인지하지 못했던 수희의 팔이 허리에 좀 더 강하게 감겨 왔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건 승조뿐만이 아니었다. 수희 역시 승조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승조의 뒤척임이 수희가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도록 부추기는 꼴이 되어 버린 셈이다.


“하.”

내쉬던 숨이 다 나오지도 못하고 토막 나 버렸다.

차라리 수희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것이다.

입으나 마나 한 슬립까지 걸치고 있으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남자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실험이 아니었다. 이건 고문에 가까웠다.

하다못해 자신이 위에 티셔츠라도 걸치고 있었다면 이렇게 당혹스럽진 않았을 거다.

깊은 V 자로 파진 슬립과 맨몸이 비벼지자 시각과 촉각이 예민하리만큼 곤두섰다.

차라리 이 순간만큼은 모든 오감이 마비되었으면 싶었다.

이미 애국가는 4절까지 부른 상태였다. 아는 노래들을 다 동원하던 승조가 마저 상체를 세우다 멈칫했다.

조금 문제가 생기려 했다. 승조에게는 아침마다 맞이하는 아주 자연스러운 섭리였지만, 오늘만은 그 섭리를 좀 거슬렀으면 했다.

하지만 건강하기만 한 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깨어나려고 했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몸의 한 곳이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조는 무조건 이 접촉 사고를 막아야 했다.

단잠에 빠져 있는 수희의 머리 아래에서 팔을 빼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뒤로 물렸다.

섬세하게 짜인 근육들이 부피를 키우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허리를 세우자 승조의 몸에 둘린 수희의 팔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머리 위에 빨간 경고등이 뜬 승조는 본능적으로 수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작은 소음마저 들리지 않는 침실 안, 아무런 미동이 없던 눈꺼풀이 움찔대며 떨려 왔다.

승조가 마저 몸을 일으켜 세울 틈도 없이 수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새하얀 천장도, 푸른 하늘을 담은 창문도 아니었다.

살색, 온통 살색의 향연이었다.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가 뜬 수희는 시선을 점차 위로 끌어 올렸다.

위쪽으로 턱 끝을 들어 올린 수희가 입술을 스르르 벌렸다.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자신의 시야 안으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한승조였다.

지난 꿈들이 수희가 겪었던 과거였다면, 지금 이 꿈은 이후에 펼쳐질 미래 같은 걸까.

윗옷이 어디 간 건지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한승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릴 때 했던 약속처럼 우리가 결혼이라도 한 건가.

그래서 나는 당신을 껴안고 있고, 당신은 날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가.

자세히 보니 사랑하는 것보다는 조금 당황한 눈빛에 가까웠다.


“내가 청혼이라도 한 건가? 우리가 결혼하고.”

아니면 한승조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져 버려 이런 망상이 펼쳐진 걸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 수희가 다시 눈을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감싸 쥐고 있던 수희의 손목을 놓아준 승조가 입술을 떼어 냈다.


“꿈 아닙니다.”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흐릿했던 잠을 앗아 가고 의식을 또렷하게 깨웠다.

번쩍 떠진 눈이 여전히 자신의 앞에 있는 승조를 훑어 내렸다.


“왜 한승조 씨가 제 방에 있어요?”

흥분한 수희의 목소리에도 승조는 차분하게 사실을 알렸다.


“오수희 씨가 내 방에 있는 겁니다.”

내가 왜 한승조 씨 방에…….

수희가 몸을 비틀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젯밤에 눈을 감기 전에 봤던 자신의 방과 인테리어는 비슷했으나 구조가 달랐다.

승조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나왔다가 승조의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진짜 꿈이 아니네.”

넓은 어깨 아래로 펼쳐진 탄탄한 가슴팍도, 조각처럼 박혀 있는 복근도 모두 진짜였다.

차마 만져 볼 수가 없으니 승조의 가슴팍 위에 띄워진 손이 이리저리 방황했다.

수희의 움직임에 승조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눈썹을 격하게 구부러트렸다.


“오수희 씨.”

“네?!”

“더 파고들면 곤란합니다.”

수희는 그제야 자신이 입고 있는 얄팍한 슬립이 눈에 들어왔다.

헐벗은 건 승조뿐만이 아니었다.


“일어났으면 나가 주겠습니까.”

상체를 일으켜 세운 승조가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겪은 듯 승조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 있는 것도 같았다.

그가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수희가 머뭇대다가 가슴께를 손으로 가리며 침대를 나왔다.


“미……안해요.”

실수를 한 건 자신이니 사과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문을 연 수희가 얼른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수희가 다시 방 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여전히 그는 수희에게 가벼운 시선 한 번 던져 주지 않았다.


‘나랑 같이 잔 게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수희가 승조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등 뒤에서 닫힌 문에 등을 기댄 수희가 자신의 발치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기분 나쁠 수도 있겠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한 침대에서 눈떴으면.

이 세상에 자신과 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 남자는 승조뿐일 것이다.

어딜 가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수희는 승조의 무관심이 낯설기만 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고 승조도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승조의 방문 앞에 머물러 있던 수희는 자신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희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승조가 그제야 이불을 걷었다.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피부 위로 두꺼운 핏줄이 솟아올라 왔다.


“후.”

더운 숨을 내뱉은 승조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낸 승조가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샤워기 레버를 올렸다.

레버를 오른쪽으로 몰아붙이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왔다.


 

***

샤워를 마치고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수희가 거실로 나왔다.

언제 호텔 직원이 다녀간 건지 접이식 테이블 위에는 조식이 차려져 있었다.

이미 한 자리 차지하고 앉은 승조는 흰 냅킨을 펼쳐 허벅지 위에 얹어 놓았다.


“와서 앉아요.”

마침 시장했던 차이기에 수희가 승조의 건너편에 앉았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브런치가 수희는 마음에 들었다.

잘 구워진 빵을 손에 든 수희가 나이프로 버터를 펴 발랐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빵이 입 안에서 바삭거리며 소리를 냈다.

아침에 벌어진 불상사 때문인지 테이블 위에는 말소리 하나 오고 가지 않았다.

신경 쓰지 않는 척 노력해 보려 해도 수희는 목구멍에 빵이 턱턱 걸리는 것만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어제 누나라고 부르던데, 차준영 씨가.”

잔잔하게 떠도는 공기 위로 승조의 말이 실렸다.

수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이 나왔다.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리니까요. 그러니까 누나죠.”

그도 어색해서 공통된 주제 하나를 꺼낸 걸까.


“선배님이라는 좋은 호칭이 있을 텐데요.”

고개를 살랑살랑 저은 수희가 반박했다.


“누나가 더 정감 있고 듣기 좋은데요? 제가 남동생이 있어서, 누나라는 말을 좋아해요.”

“차준영 씨가 남동생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지.”

뭐랄까, 지금 엄청 꼬투리 잡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

이번에도 착각이 아니라면 준영이랑 친한 게 엄청 싫은 것처럼 보인달까.

수희는 승조와의 말싸움에서 질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지금 안 어울리게 질투라도 하는 건 아니죠?”

자신이 말하고 나서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수희가 쿡쿡 소리 내 웃었다.


“한승조 씨가 나한테 질투라니. 제가 말해 놓고 좀 웃기긴 하네요.”

그런데 승조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혼자 웃고 있던 게 민망해져 끌어 올린 입꼬리를 슬쩍 내렸다.


“사람 되게 민망하게 만드네요. 농담이니까 표정 좀 풀어요.”

손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식빵을 입에 밀어 넣으며 승조의 눈치를 봤다.

장난스럽게 넘겨 보려고 하는데도 침묵만 차곡차곡 쌓였다.

정지 화면처럼 굳어 버린 수희를 두고 승조가 태연스레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내가 차준영 씨 때문에 질투를 하나 봅니다.”

“…….”

“안 어울리게요.”

툭.

수희가 입에 물고 있던 식빵의 끄트머리가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뭔가 올해 들어 가장 충격적인 말을 들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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