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한승조는 질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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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승조는 질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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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승조는 질투 중
2022.07.12.
자신에게 사심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저 계약으로 엮인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승조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걸까.
질투하고 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희의 마음속이 어수선해졌다.
허벅지에 떨어진 식빵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가출해 버렸다.
“아.”
문득 수희는 저 혼자서 깨달음을 얻었다.
“제가 장난 좀 쳤다고 그러는 거예요?”
하마터면 승조의 장난에 진지하게 대꾸할 뻔했다.
민망한 상황에 빠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뒤늦게 허벅지 위에 떨어진 식빵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희가 샐러드를 포크로 쿡 찍었다.
“완전 속을 뻔한 거 알아요?”
“…….”
“절 놀라게 하려고 한 거면 성공했어요.”
다시 평정을 되찾은 수희가 샐러드 접시를 손으로 가리켰다.
“샐러드 신선하고 맛있네요.”
“……많이 먹어요.”
여전히 승조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수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포크를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이프로 핫케이크를 조각내던 승조의 손이 멈췄다.
‘질투, 내가 정말 질투하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은 당혹감을 몰고 오기 충분했다.
질투라는 감정을 알아차리자마자 찾아온 물음은 ‘왜?’였다.
‘왜 내가 질투를 하는 거지.’
두 사람은 그저 친한 누나 동생 사이였다.
승조는 한때 수희와 절친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인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었다.
단순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시샘 같은 걸까.
어린애들이나 갖는 유치한 감정이라 치부하며 승조가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일찍이 회사로 출근한 승조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TV를 틀었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차 비서가 승조가 벗은 재킷을 받아 주었다.
수희를 다시 만나기 전부터 승조는 종종 수희가 나오는 드라마를 시청했었다.
그때의 습관이 남아 있던 건지 승조가 익숙하게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무미건조하게 리모컨을 누르던 승조가 한 곳에 채널을 고정했다.
흰색 정장을 입은 준영의 손에는 얼마 전 파티를 열었던 R 브랜드의 향수가 들려 있었다.
“차준영 씨 얼마 전에 제대했다는 기사 봤는데, 벌써 향수 CF를 찍었네요.”
승조는 자리에 앉으며 TV를 턱짓했다.
“차준영이 그렇게 유명한가?”
차 비서는 커다란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입을 쩍 벌렸다.
“차준영 씨가 군대 가기 전에 찍은 드라마 대박 나서 지금 제대로 몸값 올리고 있잖아요. 그 드라마 수출까지 해서 일본, 중국 할 거 없이 인기가 엄청나더라고요. 일본에서는 제2의 욘사마라고 불리던데요. 거기다가.”
“거기까지만 들을 테니까, 그만해.”
얼마나 유명한지 이 정도만 들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차 비서는 꼭 해야 하는 말이 남은 듯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똥이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승조의 신경을 더 거슬렀다.
인상을 찌푸린 승조가 고개를 돌리자 차 비서가 검지를 들어 올렸다.
“이건 꼭 말하고 싶은데, 말하면 안 될까요?”
“주말 내내 입 다물고 살았어?”
“네. 그래서 입이 좀 근질근질합니다.”
입씨름하는 게 더 귀찮았던 승조가 마저 하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차준영 씨, 대표님이랑 같은 대학교 나왔잖아요.”
승조는 별것도 아닌 정보에 왜 호들갑을 떠는 건가 싶었다.
깊게 팔짱을 끼워 넣은 승조가 차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차 비서의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대표님, 혹시 기억 안 나십니까?”
“뭘 말이야.”
“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표님께서 차준영 씨한테 장학금 전달하셨잖아요. 그 전달식에 저도 참여해서 기억하고 있거든요.”
차준영을 파티장에서 만났을 때 기시감이 들었던 게 이 이유 때문이었다.
차 비서의 말을 듣고 나니 승조는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깨어났다.
3년 전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한 남성이 행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었다.
남성은 미처 피하지 못한 여학생을 인질로 잡았고,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칫하면 많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준영이 조심스레 남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남성의 주의를 끄는 순간 남성을 덮쳤다.
한차례 몸싸움이 일어나고, 준영은 여학생이 도망치자마자 남성의 칼을 빼앗아 들었다.
칼을 빼앗긴 남성이 도망치려 하는 걸 준영이 경찰이 올 때까지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FL 그룹은 큰 사고를 막은 준영에게 대학교 4년 치 장학금을 지원한 적이 있었다.
“이제 기억나시죠?”
기억나고말고.
승조는 카메라 앞에서 준영과 손을 잡으며 꽃다발도 전달했었다.
“누나가 잘, 키워 준 덕분에 많이 컸습니다.”
수희가 아니라 승조가 키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대학교 시절뿐이지만 말이다.
준영의 생각을 하니 방금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차 비서는 짙게 주름이 잡힌 승조의 미간을 놓치지 않았다.
“홍콩에서는 별다른 일 없으셨습니까?”
눈썹 사이를 검지로 문지른 승조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차 비서는 누구에게 질투를 느껴 본 적이 있나?”
“그럼요.”
“누구한테.”
“대표님요. 대표님이 다른 직원들 더 챙겨 주면 되게 서운하거든요.”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니었던 승조가 매섭게 눈매를 빛냈다.
능청스러운 차 비서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꺼내 놓았다.
“꼭 좋아하는 사람한테 질투심을 느껴야 하나요? 친구, 가족, 동료 사이에서도 느끼는 게 질투죠.”
질투라는 감정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했던 걸까.
차 비서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준영에게 느꼈던 감정이 별거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어렸을 적부터 수희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너무 오랫동안 수희를 기다려 왔기에, 수희와 보내는 시간을 준영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연인 사이가 아니라도 충분히 질투할 수 있다 이 말이지, 차 비서 말은.”
“친구들끼리도 그런 거 있잖아요. 나랑만 놀았으면 좋겠고, 나랑 제일 친했으면 좋겠는.”
친구 사이에 느끼는 질투처럼 단순하고 싱거운 감정이겠지.
그제야 내내 답답했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전혀 잘못 짚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승조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이틀이 더 흘렀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이라 승조는 더욱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 한쪽에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어찌 보면 생각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까웠다.
결재를 마친 승조가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검지로 두드렸다.
홍콩에서 돌아온 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수희에게선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어제 대본을 수희의 메일로 보내 주었는데, 수신 확인은 되었지만 답이 없었다.
‘많이 바쁜 건가.’
굳이 메일을 잘 받았다고 답을 할 필요도, 자신에게 연락할 의무도 없었다.
잘 잤냐, 밥은 먹었냐, 일은 잘하고 있냐. 매일 연락할 만큼 사이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런데 꼭 그런 사이여야 연락할 수 있나.’
친구끼리도 안부가 궁금해 연락하니 안 될 건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달리 수희가 연락을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보여 주듯 승조의 손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 켜길 반복했다.
똑똑.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승조는 휴대폰을 제자리에 두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용건도 없이 연락하는 건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
그렇게 생각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퇴근한 승조는 집이 아닌 수희의 아파트 앞에 차를 세웠다.
‘우연히 발길이 닿아서, 집으로 가던 길이라서’라는 핑계를 붙였다.
이미 수희는 집에서 쉬고 있을 수도 있고, 아직 일정을 소화하기 전일 수도 있었다.
“나도 참, 어쩌자고 찾아온 거지.”
연락도 없이 누군가를 불쑥 찾아올 정도로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정에도 없이 이렇게 수희를 찾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니 승조는 기약 없이 수희를 기다렸다.
수희를 기다렸다기보다는 우연히라도 마주칠 기회를 노렸던 것도 같다.
10분, 30분, 그러다 한 시간을 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루할 만도 하건만 수희를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벌써 일을 마치고 집에서 쉬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걸까.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수희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다.
휴대폰을 꺼내 든 승조가 수희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휴대폰을 귓가에 붙인 승조는 그제야 무슨 말로 수희를 만날지 고민했다.
고민을 끝마치지도 못했는데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끊겼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수희의 목소리에 승조는 잠시 숨을 멈췄다.
요 며칠 다른 것은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머릿속이 수희의 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막상 수희의 목소리를 들으니 바삐 움직이던 머릿속이 정지됐다.
[여보세요. 한승조 씨?]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솜털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을 간질였다.
“밥은 먹었습니까?”
[또 제 저녁 걱정해 주는 거예요?]
언뜻 들리는 수희의 웃음소리에 승조도 따라서 미소가 지어졌다.
[저녁은 아직 먹기 전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근처에 일 때문에 왔다가 잠시 들렀습니다.”
[어디를 들러요?]
“오수희 씨 집 말입니다.”
운전석 문을 연 승조가 차 밖으로 다리를 빼냈다.
몸을 세운 승조가 갑자기 들리지 않는 수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수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승조의 옆에 밴 한 대가 세워졌다.
무심코 돌아간 시선 끝에는 밴에서 내린 수희가 보였다.
“한승조 씨!”
반가움도 아주 잠시였다. 수희의 뒤를 이어 준영이 밴에서 내렸다.
왜 수희가 평소 타고 다니던 검은색 밴이 아닌, 흰색 밴을 타고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준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쉽게 들떴던 마음은 쉽게 식어 갔다.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는 준영을 본 순간 지워졌다.
사실 승조가 반갑지 않은 건 준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희의 뒤에 서서 표정을 굳힌 채 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승조는 자신의 시야에 걸려 있는 준영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그러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희 때문에 기분 나쁜 티도 내지 못했다.
연인이었다면 가능했겠지만, 둘은 지금 가짜 연인을 연기 중이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저녁 같이 먹자고 하려고 했지.”
“아, 어쩌죠.”
수희가 곤란하다는 듯 말을 길게 늘였다.
“오늘 준영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또 차준영.
홍콩에서부터 수희의 뒤를 졸졸 따라붙고 있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구겨지는 미간을 펴 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다음에 먹어. 되도록 낮에.”
갑작스러운 승조의 반말에 수희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손을 뻗은 승조가 수희의 손을 감싸 쥐었다.
구태여 힘을 세게 주지 않고 살짝 끌어오자 자석처럼 수희가 옆에 붙었다.
“한승조 씨.”
평소와 다른 승조의 태도에 수희가 승조를 불렀다.
가짜 연인을 연기하든 말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나는 차준영이 신경 쓰이고, 너를 순순히 보내 줄 수 없다.
“난 너랑 저녁 먹어야 할 것 같거든.”
한순간에 자제력을 잃었다.
“이왕이면 네 집에서.”
아니, 스스로 놓은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