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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48/118)


48.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2022.07.16.



 
홍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 수희를 반기는 건 그간 미뤄 두었던 일정들이었다.

애란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수희의 일정은 한가할 정도로 비어 있었다.

그건 애란을 애도할 시간을 주려는 최 사장의 배려 덕분이었다.

거의 9개월이 넘도록 수희에게 시간을 주었으니 이제 더는 일정들을 미룰 수 없었다.

드라마로 복귀한다는 기사가 뜨자마자 다른 CF와 계약과 예능 촬영까지 잡혔다.


“요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동안 많이 쉬었잖아. 최 사장님 돈 좀 벌게 해 드려야지.”

예능 촬영을 끝낸 수희가 세트장을 벗어나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몰아치는 일정에 철용이 걱정했지만, 수희는 그다지 버겁다고 느끼지 못했다.

승조를 만나고 난 후, 다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힘든 것도 몰랐다.

밴을 세워 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엘리베이터 안으로 익숙한 사람이 올라탔다.


“누나.”

잔뜩 들뜬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준영이 보였다.


“너도 여기서 촬영 있었어?”

“네. 후원 프로그램 있어서 찍고 왔어요. 누나는요?”

“난 예능 촬영.”

“예능은 촬영 시간이 길어서 힘들던데.”

그렇지 않아도 오전 9시에 야외에서 시작된 촬영이 오후 7시 실내 세트장에서 끝났다.

요 며칠 계속된 강행군에도 수희는 조금도 힘든 티를 내지 않았다.


“드라마 촬영 끝나면 푹 쉴 수 있으니까 괜찮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희와 준영이 차로 향했다.

철용은 조금이라도 빨리 수희를 태워 집으로 갈 수 있도록 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운전석에 올라탄 철용이 무슨 일인지 도로 차에서 내려 밴의 보닛을 열었다.

난데없는 철용의 행동에 수희가 철용의 옆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왜 그래?”

열심히 보닛 안을 들여다보던 철용이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배터리가 나간 건지 시동이 안 걸리네.”

“보험 회사 부르면 되잖아.”

“지금 퇴근 시간이라 오는 데 한참 걸릴 텐데, 너 기다리느라 피곤할까 봐 그러지.”

일찍부터 카메라 앞에 선 터라 체력이 떨어졌지만 철용을 걱정시키기 싫었다.


“나 하나도 안 피곤해. 괜찮아.”

“촬영을 열 시간이나 해 놓고 뭐가 안 피곤해.”

도리어 철용이 더욱 속상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때,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준영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실례가 안 된다면 수희 누나는 제가 집에 모셔다 드려도 될까요?”

괜히 준영의 퇴근길이 고단해질 것 같아 수희가 거절하려던 참이었다.


“그래 줄 수 있어? 그럼 나야 고맙지.”

철용은 냅다 수희 대신 답을 했다.


“아냐, 준영아. 나는 오빠랑 같이 갈게. 너라도 일찍 들어가 봐.”

“내일 오전에 일정 없어서 괜찮아요. 섭섭하게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서운한 얼굴빛을 그대로 드러내자 두 번은 거절할 수 없었다.

철용은 보닛을 눌러 닫으며 손을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한 대표님이 있으니까 열애설 날 걱정도 없잖아. 어서 집에 가 봐.”

머뭇대던 수희도 두 사람의 설득에 준영의 밴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럼 신세 좀 질게.”

“얼마든지 지세요.”

준영이 옆으로 비켜서자 수희가 밴 안으로 몸을 실었다.

수희와 준영을 태운 밴이 출발하자 철용은 그제야 보험 회사에 연락을 취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밴이 빽빽하게 메워진 도로 위를 느릿하게 달렸다.

내심 준영은 좀 더 많은 차들이 자신의 앞을 막아 주기를 바랐다.

그만큼 더 온전히 수희와의 대화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곧 드라마 리딩 일정 잡힐 것 같다고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누나도 들었어요?”

“아, 그래? 아직 못 들었어.”

“저번에 대본 맞춰 보기로 한 거, 다음 주에 만나서 할까요?”

1화분 대본은 전부 외워 두었기에 대사를 맞춰 본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인 준영과 미리 연기 합을 맞춰 두면 더 좋은 영상이 나올 게 분명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기에 수희가 곧바로 약속을 잡았다.


“다음 주 화요일에 일정 비어 있는데, 그때 너 괜찮아?”

준영이 룸 미러를 통해 매니저를 보자,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답을 보냈다.


“화요일에 시간 돼요. 낮에 보는 걸로 할까요?”

“그래. 다음 날 각자 일정도 있을 테니까 일찍 보는 게 좋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밴이 수희의 집 근처에 도달했다.

이대로 수희와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될까. 조금은 욕심내도 될까.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누나, 저녁 먹기 전이면 같이 먹을래요?”

“저녁?”

역시 피곤하겠지.

준영이 다시 말을 정정하려던 차였다.


“배고프긴 한데, 먹고 들어갈까? 뭐 좋아하는 거 있어?”

“좋아요. 다 좋아요.”

흐림이었던 얼굴에 금방 해가 방긋 떠올랐다.

백반집을 예약하려 휴대폰을 꺼내는데, 승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별다른 일이 아니면 연락을 하지 않을 승조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통화를 미뤄 둘 수가 없었다.


“잠시만.”

준영에게 양해를 구한 수희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휴대폰을 볼 수 없었기에 준영은 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수희의 표정만으로도 그 상대가 승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새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밴이 수희의 집 앞에서 서행하더니 이내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을 연 수희가 차에서 내리고, 역시나 문밖으로 승조가 보였다.


“한승조 씨!”

승조는 자신의 앞에 선 수희를 보고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그 미소는 준영을 발견하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오늘 준영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거든요.”

선약을 잡은 건 준영이었다. 아무리 남자친구라 해도 양보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커다란 오산이었던 듯, 승조가 수희의 손을 붙잡았다.


“난 너랑 저녁 먹어야 할 것 같거든.”

“…….”

“이왕이면 네 집에서.”

눈치껏 알아서 빠지라는 듯 승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준영을 눌러보고 있었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수희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아무리 승조가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먼저 약속을 잡은 게 준영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래도 준영이랑 먼저 약속한 거라서요. 다음에 같이 먹어요.”

“오늘도 먹고 다음에도 같이 먹지.”

고집불통.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갑자기 불쑥 나타나질 않나, 안 하던 행동을 하지를 않나.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누나, 남자친구분이랑 식사하세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준영이 한발 물러섰다.

어찌 됐든 수희의 남자친구는 승조였다.

저녁을 함께 먹겠다고 집까지 찾아온 남자친구를 두고 수희와 함께 사라질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승조처럼 억지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수희에게 자신은 그저 친한 동생일 뿐이었다.

남자친구에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니, 저녁쯤이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준영아. 화요일에 보자.”

입 안이 썼지만, 준영은 꾸역꾸역 미소를 보였다.


“가볼게요, 누나.”

아쉬움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돌려 밴에 올라탔다.

준영을 실은 밴이 곧 수희의 아파트를 완전히 벗어났다.

룸 미러로 준영의 표정을 살피던 매니저가 조용히 준영을 불렀다.


“준영아.”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준영이 한숨 섞인 말을 뱉어 냈다.


“형이 무슨 말 할지 다 알아.”

룸 미러에서 시선을 뗀 매니저가 단호하게 목소리를 냈다.


“알면 정리해.”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면 수희를 다시 만나 고백할 생각이었다.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다고.

그러지 말걸.

미리 말할걸.

그랬더라면 내게 기회라도 있었을 텐데.


“정리, 해야지.”

이미 수희의 옆에는 승조가 있었고,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포기 먼저 해야 했다.


“근데 나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답답해.”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리는 말이 외롭게 준영의 주변을 맴돌았다.


 
준영이 떠나고 나자 승조는 그제야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듯했다.

수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승조의 손을 내려다봤다.

따뜻한 그의 손에서 손을 빼내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붙들려 있을 수는 없었다.

손을 빼내며 승조에게 진심으로 물었다.


“한승조 씨, 오늘 뭐 잘못 먹었어요?”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서도 준영만 보면 수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바빠서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웠습니다.”

“내가…….”

지금 밥 뭐 먹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 같아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화를 애써 눌러 보았다.

심호흡 중인 수희를 뒤로하고 승조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라면이나 같이 먹죠.”

“제 의견은 안 물어보세요?”

“라면 같이 먹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수희가 검지를 들어 올리며 근엄하게 일러두었다.


“내일 오전에 일정 있어서 밥 말아 먹는 건 안 돼요.”

 

***

정말 목적은 밥이었던 것처럼 승조는 수희가 차려 준 라면을 뚝딱 해치웠다.

내일 있는 보이는 라디오 일정만 아니었다면 수희도 배부르게 한 그릇 먹었을 것이다.

딱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만 먹은 수희가 식탁 위에 있는 수저를 정리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승조가 싱크대로 가자 수희가 손에 그릇을 쥔 채로 달려가 말렸다.


“제가 할게요.”

“이미 손에 물 묻혔습니다.”

말을 하고 난 후 승조가 싱크대 레버를 들어 올려 손을 집어넣었다.


“아니…… 제가 한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수희가 한발 물러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수희가 손에 쥐고 있던 그릇도 가져간 승조가 물이 쏟아지는 싱크대에 올려 두었다.

그릇을 씻는 작은 몸짓에도 커다란 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팔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그가 입은 와이셔츠가 팽팽하게 당기기도 했다.

집에 남자를 초대한 적은 남동생인 주형 이후 처음이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리는 소리를 잇달아 내기 시작했다.

그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집 주인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찬장을 열었다.


“마실 거라도 줄까요? 차도 있고 커피도 있는데.”

어쩌면 이대로 승조를 보내는 게 아쉬웠던 것도 같다.

뭐라도 마시며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가지려 했던 걸 보면.


“차 마시겠습니다.”

마시겠다는 말에 수희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따뜻하게 줄까요?”

“따뜻하게요.”

가볍게 빙글 돌아선 수희가 고심해 예쁜 잔 두 개를 꺼내었다.

설거짓거리는 많지 않아 일찍이 손에 물기를 털어낸 승조가 수희를 돌아보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수희는 뚝 멈춘 물소리에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아서 좀 쉬어요.”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승조가 발걸음을 떼어 내어 집을 둘러보았다.

큰 가구들은 화이트 톤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소품들은 비비드한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거실을 거닐던 승조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저녁은 먹었고, 차는 마실 예정이었다.

차를 마시고 나면 집에 가게 되려나.

승조의 눈길이 TV 서랍장 위에 있는 탁상시계에 머물렀다.

9시 25분. 저녁을 먹은 것뿐인데 시간은 잡을 틈 없이 훌쩍 흘러 있었다.


“한승조 씨, 차 마셔요.”

고개를 돌리자 하얀 트레이 위에 찻잔 두 개를 가져온 수희가 보였다.

내일 오전에 일정이 있다고 했으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이다.

다 아는데.


“오수희 씨.”

집에 가기 싫어졌다.


“나 오늘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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