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입술과 입술 사이
(49/118)
49. 입술과 입술 사이
(49/118)
49. 입술과 입술 사이
2022.07.19.
“나 오늘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수희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손에 힘이 풀려 트레이를 놓칠 뻔했다.
혹여 찻잔이 쏟아질까, 수희가 거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려 두었다.
“지금 자고 가도 되겠냐고 물은 거예요?”
“제대로 들었네요.”
저녁에 끓인 라면이 잘못된 건가?
어쩐지 내 속도 안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전에 없던 태도를 보이는 한승조 때문에 수희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집 두고 왜 여기서 자겠다는 건데요?”
“집에 수도가 터졌습니다.”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승조가 능청스레 거짓말을 뱉어 냈다.
그 거짓말이 말도 안 되긴 했지만, 순수한 수희는 조금의 의문만 품을 뿐이었다.
“겨울도 아닌데 수도가 터져요?”
“전기도 끊겼습니다.”
“번개가 치는 것도 아닌데 전기가 끊겨요?”
그 값비싼 아파트에서 수도도, 전기도 되지 않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시골에 가도 수도와 전기는 되는데, 도대체 어떤 곳에서 지내고 있는 걸까.
겉만 번지르르한 곳에서 사는 것 같아 딱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가면 근처에 4성급 호텔 있어요. 거기서 묵으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잠이라면 수희의 집보다는 호텔이 훨씬 편할 것이다.
아무리 승조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재워 줄 수는 없었다.
“꽤 냉정하네요. 방 한 칸 내줄 줄 알았는데.”
“감성은 이성을 이기지 못하거든요. 아무리 안됐어도 남자를 집에 들이다뇨. 안 되죠, 그건.”
“남자와 한 침대에서 같이 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네요.”
꾹. 수희의 입술이 다물렸다.
목에서 시작된 열기가 차츰 위쪽을 장악하더니 이어 이마까지 끓어올랐다.
“그건! 제가 잠결에 실수한 거라고 해명했잖아요.”
“해명한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죠. 오수희 씨랑 한방에서, 그것도 한 침대.”
“그, 그만.”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끈질긴 사람이었나.
방 하나는 창고고, 남은 방은 청소를 안 한 지 오래돼서 거기엔 못 재우겠는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사코 승조를 차단할 때는 언제고, 남은 방을 두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 정신이 너무 멀쩡해서 안 되겠네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수희는 몇 번이나 승조를 밀어냈다.
결사반대를 외쳐 대니 승조도 더는 강요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요.”
승조가 수희를 지나쳐 소파 위에 얹어 놓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재킷을 걸친 승조가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수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왜 그럽니까?”
생각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손이 나갔기에, 왜 승조를 붙잡은 건진 수희 자신도 알지 못했다.
머리를 굴리던 수희가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눈으로 가리켰다.
“차……. 차는 안 마시고 가요?”
“시간도 늦었으니까 빨리 호텔 알아보러 가 봐야죠.”
“아, 그렇죠. 호텔.”
“팔 좀 놔주겠습니까?”
승조가 자신의 팔을 꼭 쥐고 있는 수희의 손을 바라봤다.
슬쩍 뒤로 손을 거두자 승조가 현관으로 걸어갔다.
배웅이라는 명목하에 수희는 떠나는 승조를 따라갔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승조의 모습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그냥 자고 가라고 할까. 그냥 잠만 자는 건데.’
‘아냐. 그래도 어떻게 남자랑 한집에서 자.’
‘그럴 거였으면 호텔에서는 왜 같이 잔 건데.’
단호하게 승조를 밀어낼 때는 언제고,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마음이 이성과 충돌했다.
승조가 문고리를 열고 나가자 수희가 손을 뻗을락 말락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콜록.”
문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승조가 대뜸 마른기침을 했다.
거친 승조의 기침 소리에 걱정이 된 수희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기력 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승조의 뒷모습에 수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콜록, 콜록.”
동그랗게 주먹을 만 승조가 문고리를 당겨 현관문을 닫고는 좀 더 크게 기침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싶어 수희가 승조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전혀 없는데.”
오히려 차가운 것 같은 건 착각인가.
“괜찮습니다. 늦었는데 가 볼게요.”
“아니.”
수희는 승조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승조가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고 있는 수희를 기다려 주었다.
“아픈 사람을 어떻게 보내요.”
“그럼, 재워 주는 겁니까?”
입술이 벌어졌다 떨어지길 반복하다 잇새 밖으로 희미하게 소리가 나왔다.
“……자고 가요.”
가끔 이성이 감성을 이기는 날도 있는 법이었다.
승조를 집에 들이는 걸로 모자라, 제집에서 잠까지 재우게 될 줄이야.
승조에게서 손을 떼어 낸 수희가 뒤로 물러섰다.
“남은 방은 지저분해서 거실에서 자야 해요.”
“괜찮습니다.”
“일단 큰 옷 있으면 줄게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수희가 방으로 들어가자 승조의 입술 끝이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올려 둔 승조가 수희가 들어간 방을 바라봤다.
‘내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거지.’
게다가 감기 걸린 연기까지 해 가며 수희의 곁에 남으려 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희가 이불과 승조가 입을 바지를 가져와 거실 바닥에 내려 두었다.
“이거 집에 있는 감기약이거든요. 혹시나 두통 있으면 이 약도 먹어요.”
수희가 주머니 안에 넣어 온 약을 승조에게 내밀었다.
꼼꼼하게 자신을 챙겨 주는 수희를 보니 거짓말을 한 게 조금은 미안해졌다.
아프지도 않은데 약을 먹을 수는 없으니 승조가 대충 둘러댔다.
“옷 갈아입고 나서 먹겠습니다.”
“알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수희가 승조와 약을 번갈아 보았다.
승조가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수희에게 물었다.
“오수희 씨 보는 앞에서 옷 갈아입어야 하는 겁니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승조가 위 단추 하나를 풀었다.
“나야 뭐,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상관있거든요?”
놀란 수희가 약을 승조의 손에 쥐여 주고 방으로 후다닥 달아났다.
방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방문을 닫으려던 수희가 멈칫했다.
방문 밖으로 고개를 빼낸 수희가 승조에게 작게 속삭였다.
“잘 자요.”
이대로 자는 겁니까?
승조는 자연스럽게 뱉어 내려던 물음을 도로 집어넣었다.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었다.
밤새 수다를 떨 사이가 아니었기에 잠을 자겠다는 수희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아쉬웠다.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할 수 있는 건 수희가 잘 자길 빌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오수희 씨도 잘 자요.”
입술을 옆으로 길게 늘인 수희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으로 승조의 인기척이 들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한데, 그게 또 싫지 않은.
불현듯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아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침대에 앉았다.
뭔가, 오늘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큰일이 났다.
벌써 11시가 지나가고 있는데도 수희는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홍콩 호텔에서는 승조를 신경 쓰지 않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를 않았다.
잠을 자려고 하면 오히려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눈을 가리고 있던 수면 안대를 벗어 낸 수희가 상체를 벌떡 세웠다.
말똥한 눈으로 문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서랍에 있던 수면 유도제 약통을 꺼낸 다음 방문을 바라보았다.
괜히 거실로 나가 물을 마셨다가 승조를 깨울까 걱정이 됐다.
웬만하면 물 없이 약을 삼키고 싶었지만, 어렸을 때 물 없이 약을 삼키다 사레들린 적이 있었다. 그 후로는 물 없이 약을 삼킬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손에 약을 꼭 쥔 수희가 조심히 방문을 열고 발을 내밀었다.
거실에는 주황색 무드 등이 켜져 있었고, 그 아래에 승조가 누워 있었다.
승조가 일어날까 싶어 수희가 까치발을 들고 주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승조의 머리 위를 막 지나치려는데.
“잠이 안 옵니까?”
깜, 짝이야.
너무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약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대리석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간 약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은 수희가 떨리는 숨을 덜어 냈다.
“한승조 씨는 왜 안 자고 있어요?”
“낯선 곳이라 잠이 안 오네요.”
누워 있던 상체를 승조가 들어 올리자 수희가 무드 등을 손으로 가리켰다.
“불 꺼줄까요?”
“아뇨. 어두운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평소 어두운 걸 좋아하지 않아 집에서도 천장에 붙은 간접 조명을 켜 두고 자곤 했다.
조명을 끈다 해도 어차피 승조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문 너머에 있는 수희를 떠올리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 못 자는 거 아니에요?”
은은한 조명에 비친 수희의 걱정 가득한 얼굴에 승조는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번에도 도와줄 겁니까? 엘리베이터에서처럼.”
“손잡아 줄 거냐고요?”
“손을 잡아 주려면 같이 자야 할 텐데.”
자그맣게 터지는 승조의 웃음소리가 조용한 거실에 깔렸다.
“나랑 손만 잡고 자줄 겁니까?”
이어지는 정적의 시간이 길어지자 승조가 다시 입술을 떼려던 찰나였다.
“한승조 씨 잠들 때까지만요. 잠들면 제 방에 가서 잘 거예요.”
단번에 거절할 줄 알았던 수희는 승조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고 누웠다.
긴 머리를 흐트러트린 채 수희가 승조에게 손을 내밀었다.
막상 작은 손바닥이 자신을 향하자 승조는 손을 붙잡지 못했다.
왠지, 지금 저 손을 잡아 버리면 잠이 든 후에도 놓치기 싫어질 것 같아서였다.
“안 잡을 거예요? 저 생각 바뀌려고 해요.”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의 손을 거두려는데, 승조가 수희의 손을 감싸 잡았다.
수희가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녀의 열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수희의 손을 잡고 있으니 벌써 놓아주고 싶지 않아졌다.
그냥 이대로 함께 자자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 어쩌면 도망갈지도 모른다.
속마음을 말해 버리면 그녀를 놓칠까 싶어 승조가 입술을 다물었다.
“…….”
“…….”
승조의 옆에서 눈꺼풀만 닫았다가 뜨던 수희가 고개를 슥 돌렸다.
벌써 잠이 든 건지 승조의 가지런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콩닥, 콩닥, 콩닥.
귓가를 둥둥 울려오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어질했다.
그는 정말 잠을 청하고 싶어서 손을 잡아 달라고 한 걸지도 모른다.
일말의 불순한 의도도 없을 텐데, 이 요동치는 심장은 조금도 진정하지 못했다.
수희는 얼른 승조가 깊은 잠에 빠져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이 자리를 얼른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조금 더 있다가는 심장 소리에 파묻혀 귀가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승조의 손을 잡고 있은 지 30분 정도가 되었을 때.
“……한승조 씨, 자요?”
“…….”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그에게선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손을 들어 승조의 눈앞에서 휘저어 보던 수희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잠이 든 그가 깨기라도 할까, 승조의 손을 천천히 빼냈다.
힘이 풀려 있는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우던 수희가 승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슴푸레한 오렌지빛 조명이 승조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코가 어떻게 저렇게 반듯하고 높지. 볼 때마다 신기해.’
다시금 허리를 숙인 수희가 승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콧날 아래에 자리 잡은 입술은 붉은 기를 머금고 있었다.
차라리 빛이 없었더라면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진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나에게 나쁜 마음 따위 들지 않았을 텐데.
‘키스……하고 싶다.’
수희가 승조와의 거리를 아주 야금야금 삼켜 갔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잠결도 아니었다. 그저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감겼고, 누워 있는 승조에게 점차 고개가 숙어졌다.
승조의 숨결이 제 입술을 간질이자,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 같다.
입술이 부딪치기 직전, 수희가 눈을 확 뜨며 고개를 뒤로 물리려 했다.
‘내가 지금 뭐 하려고 한 거야.’
승조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던 수희가 시선을 무심결에 끌어 올렸다.
바닥을 손바닥으로 밀어내 상체를 완전히 세우기도 전이었다.
잠이 든 줄 알았던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주황빛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정확히 수희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