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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그날 밤 일어난 일 (50/118)


50. 그날 밤 일어난 일
2022.07.23.


수희의 손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날밤을 지새우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눕자 졸음이 쏟아졌다.

마치 지금까지 억지로 잠을 참았던 것처럼 곧바로 잠이 든 것이다.


“……한승조 씨, 자요?”

희미하게 들려오는 수희의 목소리에 흐릿했던 의식이 불이 붙은 불꽃처럼 되살아났다.

손안에 쥐고 있던 온기가 사라지자 완전히 정신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잠이 달아나긴 했지만 나른한 눈꺼풀은 들어 올리지 않았다.

자신이 자는 것 같으니 그녀도 잠을 청하러 방으로 가는 듯했다.

그런데 수희가 방으로 갔다면 문이 열리는 소리나 닫히는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주변이 고요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다 보니 청각이 예리해졌다.

나뭇잎이 부서지는 것처럼 이불이 바스락대며 움직였다.

수희는 아직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 있었다.

굳게 닫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는데, 얼굴 위로 그림자가 슬그머니 덮쳐 왔다.

동시에 자신의 입술 위로 수희의 숨이 흩어졌다.

날카롭게 곤두서는 청각에 더는 의지할 수 없어 승조가 눈을 떴다.

그리고, 코가 부딪칠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수희를 발견했다.


‘꿈을 꾸는 건가.’

정신은 너무나 또렷한데, 지금 펼쳐진 장면은 허상처럼 느껴졌다.

말이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어쩌면 꿈이려나.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널 보니, 네가 하려던 행동이 무엇인지 가늠이 됐다.

넌 고개를 뒤로 물리지도, 그렇다고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질겁하여 숨을 삼킨 넌 내 눈치를 보며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리는 듯했다.


‘꿈이겠지.’

네가 내게 입을 맞추려 하다니.

넌 이제 나와 결혼하겠다고 굴던 어린 10대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꿈일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현실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니,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을 것이다.

손을 뻗어 올린 승조가 수희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수희의 볼을 쓸어 올린 손바닥에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확장된 수희의 두 동공이 일순 흔들렸다.

수희와 입을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좁아졌던 거리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촉촉한 수희의 입술을 마치 과일처럼 한 입 베어 물었다.

자잘한 그녀의 떨림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잠깐 수희에게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조금 더 깊게 입술을 겹쳤다.

이제껏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린 수희가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빼려던 때였다.

허리를 완전히 세운 승조가 수희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받쳤다.

승조의 손가락 사이로 긴 머리카락이 엉켜들었다.

벌어진 잇새를 가르고 승조의 숨결이 파고들자, 바닥을 짚고 있던 수희의 손이 안으로 말렸다.


 


“하아.”

밭은 숨을 내뱉은 수희가 승조의 두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열 감기를 앓는 것처럼 머리가 뜨겁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마치 키스를 하는 건 처음인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수룩하게 굴었다.

승조는 목이 말라 물을 찾듯 수희의 입술을 깨물다 못해 삼키려 했다.

희롱당하듯 수희의 입술이 그의 가지런한 이에 짓눌렸다.

승조 몰래 입술을 훔치려 했던 벌을 받는 것처럼, 수희는 몰아치는 키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머리를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목 뒤를 이어 허리춤까지 내려왔다.

전율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와 수희의 입술이 움찔하고 닫히려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열기를 머금은 승조의 입술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곳저곳을 헤집어 놓는 통에 수희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그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댔다.

쿵, 쿵, 쿵. 손바닥에 크게 널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가슴 떨려 하는 건 수희뿐만이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떡해.’

그의 심장도 자신 못지않게 뛰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머릿속이 더욱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이제 한계였다.

다시 수희를 집어삼키려 그가 입술을 벌린 순간.


“자, 잠깐.”

그의 가슴팍을 짚고 있던 팔을 밀어내자 그가 쉽게 물러났다.

승조와의 키스가 싫은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두근대던 심장이 멈출까 싶어 그를 밀어냈다.

수희가 불규칙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도톰하게 부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문 수희가 바닥에 꽂힌 시선을 조심스레 끌어 올렸다.

수희는 승조의 표정을 보고 벌겋게 달아올랐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키스를 당한 건 난데.

왜 당신이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이불 위로 떨어진 수희의 손이 불안하게 떨려 왔다.

뭔가 잘못된 듯한 걸 수희가 느낀 것이다.

불편한 적막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침묵이 승조로 인해 깨졌다.


“꿈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수희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이 벌인 일을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합니다.”

그와 나눈 키스에 수희는 어지러움을 느낄 만큼 황홀했었다.

그런데 그의 사과 한 마디에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사과는 하지 말지.

그러지 말지.

목구멍에 복숭아 씨앗이 박힌 것만 같았다.

마른침을 연이어 삼키던 수희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꿈, 그래요, 꿈인 줄 알았으면 그럴 수 있죠.”

사실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그는 나와 함께 한 이 키스를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잘 자요. 잠은 안 오겠지만.”

수희는 차마 승조와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은 수희가 곧장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끄집어 올렸다.


‘아무 일 없었어. 나는 오늘 이 방을 나가지 않은 거야.’

덮었던 이불이 한순간에 걷히며, 수희가 오뚝이처럼 벌떡 몸을 세웠다.


‘어떻게 없던 일이 돼? 키스했는데! 입을 맞췄는데!’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기 위해 이불로 입을 막았다.

발로 이불을 뻥뻥 차던 수희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미안하다잖아. 미안하다는데 뭐라고 해.’

아, 내가 이렇게 가련한 짝사랑을 할 줄이야.

어쩌면 짝사랑이 아닐 줄 알았는데.

전부 다 착각이었다.

***



“수희 너 얼굴이 왜 그래?”

창가를 멍하게 바라보던 수희가 고개를 돌려 룸 미러로 철용과 눈을 맞췄다.


“내 얼굴이 어떤데?”

“뭐랄까. 평소보다 얼굴도 부은 것 같네. 피곤해 보이기도 하고.”

그렇겠지. 어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으니까.

다시 창가로 눈길을 돌린 수희가 힘없이 대답했다.


“어제 라면 먹고 자서 그래.”

“너 원래 라면 먹어도 잘 안 붓잖아.”

“머구리 먹었어. 면이 통통해서 얼굴도 통통하게 부었나 보지.”

“난 밤에는 머구리 안 먹어야겠다.”

진지한 철용의 다짐이 수희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온통 머릿속을 차지하는 건 한승조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했던 한승조와의 키스였다.

아침 일찍 방을 나서 보니 이미 승조는 자리에 없었고, 반듯하게 개킨 이불만 남아 있었다.

아마 수희와 마주치는 게 껄끄러워 일찍 자리를 뜬 듯 보였다.

그럼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으로 가지, 식탁 위에는 스크램블과 토마토가 놓여 있었다.

[바빠도 아침은 챙겨 먹어요.]

종이에 쓰인 친절한 글귀에 수희는 괜스레 마음이 저릿했다.


‘이제 한승조 씨 얼굴을 어떻게 보지?’

탁월한 연기력으로 아무 일 없다는 듯 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저렇게 자리를 피하니 원맨쇼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야말로 정말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낼 수 있나?’

그렇게 떨려 놓고.

그렇게 설레어 놓고.

정말 그럴 수 있는 거야?

스스로 물어보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2시부터 기획팀과 새 시즌에 대한 회의가 있고, 리노아크릴과의 미팅은 5시에 잡혀 있습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승조는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없었다.

차 비서는 펼쳐 두었던 수첩을 닫으며 승조를 불렀다.


“대표님?”

“…….”

“대표님?”

인형을 앉혀 둔 것처럼 승조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차 비서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한승조?”

“……이름을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이때다 싶어 이름을 불렀던 차 비서가 교묘히 빠져나갔다.


“대표님이라고 뒤에 붙이려고 했습니다.”

“5시에 미팅이 하나 있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던 건지 승조는 방금 읊은 일정을 못 들은 듯했다.


“네, 리노아크릴과 미팅이 있습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연락드려서 뒤로 미뤄.”

급한 건으로 가는 미팅은 아니니 충분히 뒤로 미룰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차 비서가 알고 싶은 건 왜 잡아 둔 미팅을 급하게 뒤로 미루는지, 그 이유였다.

궁금증이 가득한 눈망울을 반짝였지만 승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가 봐.”

“……네에.”

원래라면 한 번 더 승조에게 물었겠지만, 왠지 오늘은 건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 비서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승조는 좌석에 깊이 몸을 기대며 검지로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은 아직도 수희의 입술을 머금은 것처럼 홧홧하고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수희와 입을 맞추던 그 순간.

승조는 곧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 수밖에 없었다. 말랑하던 입술도, 코끝에 닿던 단 숨도, 그렇게 선명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수희에게서 입술을 떼어 내지 못했다.

계속…… 이게 꿈이기를 바랐다.

내가 저지른 일로 너와의 관계를 망치게 될까 봐.

그런데 눈을 떴을 땐, 내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놓여 있었다.

언젠가는 부딪쳐야만 하는 이 일을 마냥 회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수희를 더 괴롭히는 일이 된다는 걸, 승조는 잘 알고 있었다.

***

마지막 일정이었던 화장품 스틸 촬영을 끝낸 수희는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 버렸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더니 체력이 급격히 다운됐다.


“수고하셨습니다.”

피곤한 와중에도 수희는 촬영장에 있는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전했다.

세트장 밖으로 나오자 철용이 기다렸다는 듯 수희에게 다가와 말했다.


“수희야, 밖에 한 대표님 왔던데.”

“한승조 씨가? 언제 왔는데?”

“온 지 두 시간은 됐을걸. 너 촬영 끝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걸을 힘도 없다고 느꼈는데, 두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용이 건네는 담요도 받아 들지 않고 촬영 때 입은 원피스 차림으로 밖을 나왔다.


“정말이네.”

정말 촬영 스튜디오 밖에 승조가 서 있었다.

달려 나올 땐 언제고 수희는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망설였다.

수희의 인기척을 느낀 승조가 몸을 돌린 후에야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그렇게 오래 안 됐습니다.”

거짓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수희는 속아 넘어가 주었다.


“또 저녁이라도 걱정돼서 온 거예요?”

장난스럽게 건넨 말이었는데, 그가 웃음기 없이 답했다.


“그날 밤 이야기로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쌀랑한 바람이 수희를 스치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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