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내가 내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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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내가 내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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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내가 내린 결론
2022.07.26.
사람들이 있는 스튜디오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근처에서 멀지 않은 커피숍 창가 자리에 수희와 승조가 있었다.
시간도 늦었고, 외진 곳에 위치한 터라 커피숍에는 다른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수희는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며 말없이 앉아 있는 승조를 눈으로 흘겼다.
승조와 있는 게 이렇게 어색했던 적은 또 처음인 것 같다.
아무래도 어제 일이 있으니 불편한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커피숍 직원도 창고로 사라지고, 온전히 둘만 카페의 한 공간을 차지했을 때였다.
묵직한 정적 위로 승조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어제, 잠은 잘 잤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시선을 끌어 올렸다.
“아뇨, 못 잤어요.”
입술 위에 그의 촉감이 맴도는데 어떻게 잠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덕에 오늘 촬영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일은.”
잠시 다물어졌던 승조의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마음의 준비는 이미 다 했건만 그의 입 밖으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두려웠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
“미안해요.”
또 사과였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사과가 아닌데.
흔들리는 초점을 바로잡으며 그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요?”
그 역시 수희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수희 씨한테 키스한 일 말입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을 아래로 내린 수희가 치마를 움켜잡았다.
“키스를 한 게 진심은 아니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심장을 파고드는 침묵에 수희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 안에 비릿한 피 맛이 도는 듯했다.
“그러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잠에 취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다만, 아무리 이성이 날아갔다고 하더라도 감정이 없는 사람에게 할 행동은 아니었다.
적당한 호감, 수희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지금 우리의 관계를 깨트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서로를 돕고 의지하는 관계였다. 수희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습니다.”
“한승조 씨는 그게 가능해요? 입을 맞췄는데, 괜찮아요? 이전처럼 절 대해 줄 수 있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아예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는 못 하지만, 노력하면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어제 일인데, 나한테는 너무 선명해서 지울 수가 없는데.
당신은 그게 되는구나.
스튜디오 밖에서 승조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그가 고백을 위해 찾아왔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덮고 싶어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비참하고 절망스러운 걸 넘어서 가슴이 저리고 욱신거렸다.
승조와 조금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그는 오히려 거리를 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더는 다가설 수가 없었다.
“적당한 거리. 한승조 씨는 그걸 바라는 거죠?”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사고처럼 벌어진 일 때문에 오수희 씨와의 계약을 깨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내가 하루 동안 내린 결론입니다.”
가짜 열애는 가능하지만 진짜 열애는 안 된다.
그가 내린 결론이 이것이라면 수희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요. 잊을게요.”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수희가 가벼이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키스 정도야 촬영 때도 하는 거니까. 그 정도라고 생각할게요, 우리가 한 키스.”
속이 썩어나면서도 후련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자존심이 뭐라고 제 마음을 꼭꼭 숨긴 채 보여 주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난 것 같은데, 일어서죠.”
전날 한숨도 자지 못했을 수희가 걱정돼 일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로 앉아 있던 수희도 이어지는 승조의 시선에 의자를 밀고 몸을 세웠다.
그가 돌아서자 반듯했던 수희의 이맛살에 주름이 깊게 자리 잡혔다.
코끝이 찡하게 울려오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촉촉하게 젖어 드는 눈동자를 들키고 싶지 않아 수희가 아래로 고갤 떨어트렸다.
카페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물기 어린 눈에 닿았고, 그 덕에 나오려던 눈물이 말라붙는 듯했다.
“전 매니저 오빠가 기다려서 가 볼게요.”
승조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에 스튜디오에 소지품을 전부 놓고 와 버렸다.
갈아입을 옷도 촬영장에 있으니 아마 철용은 아직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심히 들어가요.”
입꼬리를 겨우 올린 수희가 승조를 지나쳐 발길을 옮겼다.
맞물린 이를 꾹꾹 누르며 점점 차오르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수희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했다.
어떻게든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한승조는 어제 내게 키스했고, 지금은 그 키스를 잊고 싶다 말했다.
옛날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게 가능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답에 수희가 우뚝 멈춰 섰다.
애란이 세상을 떠난 이후, 수희가 결심한 게 하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기.
어렸을 적부터 제 뜻은 애란으로 인해 무시됐다.
그게 당연한 듯 여겨지자 수희는 제 뜻 한 번 펼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좀 더 원하는 걸 명확히 표현했더라면, 애란의 둥지에서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애란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지 않았을 거라 여겼다.
후회는 이미 그때 많이 했다. 이제 결심만 하면 됐다.
“한승조 씨.”
등을 보였던 수희가 승조에게 다시 돌아섰다.
이미 떠난 줄 알았던 승조는 아직도 카페 앞에 서서 수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에게로 성큼성큼 큰 걸음을 옮겨 다가섰다.
“나 한 번만 말할 거예요.”
“…….”
“그러니까, 이번에는 잘 들어요.”
도망치고 싶은 두 발걸음을 단단히 붙들어 놓았다.
쿵, 쿵, 쿵. 심장이 목에서도, 귀에서도, 손끝에서도 뛰는 것 같았다.
달아오른 입술 밖으로 몇 번이나 참았던 그 말이 터져 나왔다.
“나…… 한승조 씨, 좋아해요.”
막상 내뱉고 나니 그리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승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건 쉽지만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한승조 씨 보면 가슴이 뛰었어요.”
놀란 듯 눈을 키운 그의 표정에도 수희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 멈추게 된다면 말을 다 털어놓지 못한 채 끝맺음을 짓게 될 것 같았다.
“깨닫고 나니까 한승조 씨 많이 좋아한다는 거 알았어요.”
담고 있던 말을 전부 꺼내 놓으면 승조에게도 하나쯤은 닿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나…… 어제 일 못 잊어요. 나한테는 없던 일이 안 돼요, 그게.”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두 뺨이 붉게 물드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싶었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는 이상 숨겨지지 않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며 흔들리던 두 눈동자가 승조에게로 흘러갔다.
잘게 떨리는 손을 안으로 말아 쥔 수희가 승조의 말을 기다렸다.
“오수희 씨.”
이름 하나가 수희의 심장을 붙잡고 통째로 뒤흔들었다.
“나도 오수희 씨 좋아합니다.”
이어지는 승조의 고백에 수희는 머리가 어리벙벙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답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하지만 수희가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승조가 못다 한 말을 덧붙였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는 오수희 씨가 좋았습니다. 나와는 달리 밝았던 오수희 씨가 좋았고요.”
“…….”
“함께 있으면 나까지 기분 좋아지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변함없고요.”
들으면 들을수록 수희의 가슴 한편이 찡하게 울렸다.
그래도 그건 아마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일 거라 여겼다.
“오수희 씨가 지금처럼 잘되길 바랍니다. 난 오수희 씨가 바라는 걸 가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고 싶고요.”
설명이 다 끝나자 수희는 가장 중요한 요점을 꺼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오수희 씨와는 다릅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데, 마치 지구 반대편에 서 있는 듯 절대 닿지 못할 존재같이 느껴졌다.
쿡쿡 쑤시던 가슴은 이제 텅 빈 것처럼 허전하기만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 머리가 멍했다.
“그럴 수…… 있죠.”
이 남자가 내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다고 해서, 내 마음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이 사람에게 화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속상한 마음을 이 남자 앞에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 좋아하는 감정이, 저와 같아질 일은 절대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희망을 남겨 줄 수는 없었다.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것이 수희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지 않는 방법이라 여겼다.
지금 있는 그 자리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란과의 사정까지 듣게 되었으니 그간 말벗 없이 지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수희의 곁에 남아야겠다고 느꼈다.
애인이 아닌 오랫동안 수희의 곁을 지킬 수 있는 조력자로 말이다.
“이번 일로 우리 관계가 틀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몇 번이나 강조하니 그가 얼마나 우리의 관계에 대해 걱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에겐 별 볼 일 없는 고백일지도 모르니, 감정에 휘둘리는 걸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나도.”
“…….”
“제 고백 때문에 서먹하게 지내는 거 싫어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눈물을 참고 또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날 보란 듯 차 버린 남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혹시나 그 눈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라도 할까 봐.
받아 줄 걸 그랬나, 후회가 들까 봐.
내 눈물 한 방울에 마음이 바뀌는 것만큼 더 비참한 일은 없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승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수희가 몸을 틀었다.
그길로 곧장 철용이 기다리고 있는 촬영장 스튜디오에 갔다.
“수희 왔어?”
밖에서 수희를 기다리고 있던 철용이 다가왔다.
“어.”
들릴 듯 말 듯 짧게 대답하곤 수희가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수희가 자리에 멈춰 섰다.
흐리멍덩한 눈에는 습기가 가득해 금방이라도 맑은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빨개진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린 수희가 대기실을 나와 밖에 세워진 밴에 올라탔다.
“한 대표님이랑 이야기는 잘했어?”
한참을 있다 돌아온 수희에게 철용은 궁금증을 쏟아 냈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기다렸대?”
“오빠, 나 지금 한승조 씨 이야기하기 싫어.”
승조가 왔다는 말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던 수희가 냉담해지자 철용이 진지해졌다.
“……왜? 싸우기라도 했어?”
차라리 싸운 거면 얼마나 좋을까.
싸우는 것도 친해야, 좋아해야 할 수 있는 건데.
“수희야, 너…… 울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가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에 고여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도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고만 싶어 손바닥으로 눈가를 눌러 보지만, 기어코 터진 눈물은 후드득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흐윽.”
입술 사이로 울음이 흘러나오자 우왕좌왕하던 철용이 수희의 손에 휴지를 쥐여 주었다.
“나 밖에 있을 테니까, 실컷 울고 나면 불러.”
툭툭, 수희의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철용이 나가자마자 수희는 목 끝에서 찰랑이는 울음을 쏟아 냈다.
눈물은 얼마나 속에 가득 쌓여 있던 건지, 토해 내고 또 토해 내도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나도 오수희 씨 좋아합니다.”
찰나에 설렜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이번 일로 우리 관계가 틀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그런데도 당신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나서.
자꾸 눈물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