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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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파동
2022.07.30.
“아, 얼굴 봐.”
세면대 벽면에 붙어 있는 거울에 퉁퉁 눈이 부은 수희의 얼굴이 비쳤다.
어젯밤, 철용이 실컷 울라고 한 덕분인지 수희는 원 없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승조의 앞에서 참았을 때보다, 눈물을 터트리던 그때가 속이 더 후련했다.
울고 나니 승조에게 느꼈던 감정이 조금은 덜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남아 있던 미련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
자신에게 마음이 없는 걸 알았으니 최대한 빨리 마음 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남은 감정들이 마음을 떠돌아다니다 지금 일을 그르치게 둘 수는 없었다.
‘내가 다시 대본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야.’
그때까지만 승조에게 의지하고 기댈 것이다.
세면대의 레버를 들어 올린 수희가 가만히 물줄기를 응시했다.
‘만약 대본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이 관계도 끝이 나겠지.’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승조와 거리를 두는 게 맞았다.
그래야 후에 멀어지게 된다 해도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
회의 내내 승조는 발표 자료가 띄워진 스크린이 아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요한 연락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건지 승조는 임원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승조의 뒤편에 앉아 회의 내용을 듣고 있던 차 비서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팅을 미루고 일찍이 퇴근한 날로부터 나흘이 지났다.
그날 이후로 승조는 다른 상념에 잠긴 사람처럼 회의에도, 미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필하는 보스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차 비서는 확신했다.
회의를 이어 가던 임원들도 서로의 눈을 보며 평소와 다른 승조를 의아하게 여겼다.
어영부영 회의가 끝나자 직원들이 승조의 눈치를 보며 하나둘 회의실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승조의 눈은 여전히 휴대폰을 향해 있었다.
“대표님, 스튜디오 그린으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다른 생각에 잠길 틈도 없었다.
의자를 밀고 일어선 승조가 회의실을 나오며 차 비서에게 물었다.
“<패밀리> 극본은 몇 화까지 수급됐어?”
“대표님에게 보내 드린 5화까지 수급됐습니다.”
일주일 전에 수희에게 보내 줬던 것이 5화였다.
“곧 드라마 리딩 아닌가?”
“네, 김시운 작가님 스타일이 원래 작업하실 때 한 번에 몰아서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화 나오면 바로 메일 보내 줘.”
“알겠습니다.”
대본도 나오지 않았으니 수희에게 연락할 구실은 사라졌다.
아무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는 휴대폰을 보던 승조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날짜 옆에 붙어 있는 요일이 승조의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 준영아. 화요일에 보자.”
오늘은 월요일, 수희의 말대로라면 내일이 준영과 만나는 날이었다.
휴대폰을 재킷에 넣은 승조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 한승조 씨, 좋아해요.”
수희의 고백을 들은 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의 고백을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사적인 연락도, 불필요한 관심도 그녀에게는 상처가 될 게 분명했다.
다 알고 있는데도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날 집엔 잘 들어갔는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건지.
혹시 많이 힘든 건지.
“하아.”
결국 한숨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그녀의 마음을 거절해 놓고 왜 가슴이 답답해서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상처를 준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걱정하고 있었다.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이 상황에 승조는 그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대표님, 무슨…… 걱정 있으십니까?”
승조의 상태를 알아차린 차 비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냐.”
멈춘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리는 승조를 보며 차 비서가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내려야 하는 지하 1층이 아닌, 지상 1층에서 내리는 승조는 누가 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
햇살이 좋은 화요일이었다.
오랜만에 일정이 비는 날이라 그런지 들떴던 것 같기도 했다.
평일인 데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낮 시간대라 그런지 거리는 한적하기만 했다.
카페테라스에 앉은 수희가 오랜만의 거리를 둘러보며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수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연예인이 카페테라스에 덩그러니 앉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달그락대는 얼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준영이 받아 온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춰 준영이 편안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수희가 준영을 반겼다.
“딱 맞춰서 왔네.”
“그리고 딱 맞춰서 커피도 나왔고요.”
준영은 수희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 잔을 가져간 수희가 하얀색 빨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의자에 등을 기댄 준영이 수희를 빤히 바라봤다.
“신기하다.”
“뭐가?”
푹 눌러쓴 빨간색 모자 아래로 보이는 준영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우리가 벌써 커서 주스가 아니라 커피 마시는 거요.”
“우리 가끔 같이 커피 마시지 않았나?”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서 커피 마신 적은 처음이죠.”
일 때문에 만나 대화를 나누며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신 적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약속을 잡아 커피숍을 온 건 처음이기에 준영은 지금 이 상황이 새롭기만 했다.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본 수희가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곧 드라마 들어가야 하니까 이런 시간 자주 가지지도 못하겠다.”
낮, 밤 할 것 없이 찍어 댈 테니 한가롭게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을 것이다.
“대신 드라마 시작되면 매일같이 보잖아요.”
“그러게. 드라마 시작하면 지겹도록 만나겠다.”
“어떻게 지겹지.”
누나랑 같이 있는 게. 지겨울 수가 있나.
“뭐라고 했어?”
준영의 혼잣말을 듣지 못한 수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준영이 주제를 돌렸다.
“한 대표님이랑은 잘 지내고 있어요?”
꺼내면 안 되는 말이었던 걸까.
방금까지만 해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겼다.
표정 관리하듯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수희가 말을 꺼낼 준비가 될 때까지 준영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연인들끼리 싸우기도 하잖아.”
크게 싸우기라도 한 걸까. 수희가 곤란한지 커피 잔에 꽂힌 애꿎은 빨대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냥, 시시한 걸로 싸웠어.”
시시한 거라고 보기엔 승조의 이야기가 나오자 수희의 분위기가 급격히 다운됐다.
수희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든 것만 같아 준영의 마음도 덩달아 좋지 않았다.
시무룩한 수희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 준영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누나 고기 좋아하잖아요. 오늘 같이 저녁 먹을래요?”
내내 눈을 피하던 수희가 그제야 준영과 눈을 맞췄다.
“남자친구 때문에 안 되려나요?”
수희는 잠시 고민했다.
되도록 낮에 준영을 만나라던 승조였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에 의한 가짜 남자친구일 뿐, 날 좋아하지도 않았다.
계약서에도 저녁에 다른 남자와 밥을 먹는 건 금지라는 조항은 없으니 안 될 것도 없었다.
“먹자, 저녁. 아주 맛있게.”
수희의 대답이 떨어지자 준영의 입술이 환하게 들어 올려졌다.
***
스튜디오 그린, 대표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차 비서가 대뜸 승조에게 물었다.
“대표님, 혹시 점심때 오수희 씨 만나고 오셨습니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보고 있던 대본을 덮고 차 비서를 올려다봤다.
차 비서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승조의 옆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화면에 보인 것은 짧게 적힌 글과 사진이었다.
[대박. 오수희 공개 연애 하더니 남친이랑 카페 데이트 중인 거 발견ㅋㅋㅋㅋ 오수희 곧 드라마 찍는다더니 그래도 연애는 포기 못 하는 듯.]
휴대폰을 가져간 승조가 스크롤을 내려 사진을 확인했다.
하얀 파라솔이 꽂힌 테이블 아래에 앉아 있는 여자는 수희가 확실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밝게 웃으며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빨간색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승조는 굳이 알아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를 알 수 있었다.
‘차준영.’
약속대로 수희와 준영이 만난 것이었다.
자신에게 화낼 자격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불쑥 치솟는 열은 쉽게 식지 않았다.
휴대폰을 돌려준 승조가 덮어 놓았던 대본을 들어 올렸다.
차 비서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내민 승조를 보고는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무심코 아래에 달린 댓글을 보던 차 비서가 깨달음을 얻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대표님 아니시구나.”
“…….”
“지금 오수희 씨 아까 그분이랑 고깃집에 가셨다네요.”
“할 일 끝났으면 나가 봐.”
괜한 말을 한 건가 싶어 승조의 표정을 살피던 차 비서가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두 눈이 승조가 들고 있는 대본에 꽂혔다.
“대표님, 지금 대본 거꾸로 보고 계십니다.”
“알고 있어.”
전혀 모르고 있던 얼굴로 승조가 대본을 뒤집었다.
***
“준영아, 오늘 진짜 네 덕분에 배부르게 잘 먹었어.”
준영의 차 조수석에 앉은 수희가 자신의 납작한 배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운전하고 있던 준영이 수희를 곁눈질했다.
“누나가 잘 먹었다니 기분 좋네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운전했건만, 어느덧 수희의 아파트와 연결된 도로로 들어섰다.
차가 부드럽게 아파트 정문을 지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이윽고 아파트 앞에 차가 세워지자, 수희가 안전띠를 풀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준영은 수희가 아닌 바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누나, 조금 있다가 내리실래요?”
“응?”
“저기, 한 대표님 계시는 것 같아서요.”
준영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수희의 두 눈이 커졌다.
실연의 아픔을 느끼는 건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개인 시간을 보내며 꽤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마음을 정리할 여력이 생겼는데, 왜 또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걸까.
왜 날 멋대로 뒤흔들려고 하는 걸까.
“걱정해 줘서 고마워.”
“누나가 한 대표님 불편하면 같이 갈까요?”
수희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민망하지 않게 상냥히 거절했다.
“준영아, 나랑 한승조 씨 문제니까 내가 해결할게.”
“……알겠어요. 들어가요.”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문을 열고 내리는 수희를 바라보며 준영은 쉬이 차를 출발시키지 못했다.
수희는 아파트 앞에 서 있는 승조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설마 고백한 일 때문에 내가 걱정이라도 돼서 찾아온 건가.
아니면 우리 계약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 연락도 없이 온 건가.
승조에게 완전히 닿기 전까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에게 서운한 감정 따위 없을 거라 여겼는데, 마음과 달리 퉁명스레 말이 튀어나왔다.
“<패밀리> 대본 수급이 늦어지고 있어서 알려 주려고 왔습니다.”
“그리고요.”
“이 이야기 하러 온 겁니다.”
수희와 준영이 늦은 저녁까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돼서인지 퇴근하자마자 발길이 이곳으로 닿았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일 핑계를 대며 변명하고 있었다.
목적은 달리 있었지만, 승조는 제 속마음을 감췄다.
수희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승조를 바라봤다.
“그런 건 메시지로 남겨 줘도 충분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승조에게 전했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시는 거, 상처받았나, 잘 지냈나 확인하러 온 것 같으니까요.”
자잘한 떨림조차 담지 않은 눈으로 승조를 바라봤다.
그런데 수희와는 달리 그의 눈에는 떨림이 가득해 보였다.
“한승조 씨한테 차여서 불쌍하고 안돼 보이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한승조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있다니.
말이 되지 않아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었다.
“나 한승조 씨 죽을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
“그래서 지금은 마음 다 접었어요.”
수희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미 접기로 한 이 짝사랑, 다시는 펼쳐 보이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