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좋아한다,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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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좋아한다, 너를
2022.08.02.
“그래서 지금은 마음 다 접었어요.”
가볍게 흘러나온 목소리에서는 미련 한 톨 엿볼 수 없었다.
감히 승조가 수희의 상처 운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이미 단단해지고 난 후였다.
시린 눈길이라도 걸은 듯 승조는 심장이 시큰거렸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바라던 대로 그녀는 아프지 않고, 보란 듯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잡는 건 오히려 자신인 듯했다.
“중요한 일이 없다면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셨으면 좋겠네요.”
억지로 입매를 끌어당긴 수희가 말을 덧붙였다.
“서로 적당한 선 지켜 주셔야 한승조 씨가 원하는 그 관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양날의 검처럼 날이 선 그 말이 서로를 찔렀다.
발끝을 돌린 수희가 승조에게 등을 보였다.
“할 말 끝났으면 가 볼게요.”
돌아서는 수희를 보면서도 승조는 차마 붙잡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자격을 놓아 버린 건 자기 자신이었다.
승조는 시야에서 완전히 수희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처음인데도 승조를 마음속에서 내보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열고 내쫓아 버린 것처럼 일하는 동안 승조가 떠오르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는 울고불고 사네 못 사네 하던데, 왜 자신은 울음 한 번으로 끝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쉬이 부풀어 올랐던 것처럼, 금방 사그라져 버릴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승조에게 느꼈던 감정이 풋사랑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승조에 대한 마음도 차츰 잊어 갈 때쯤이었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끝에 대본 리딩 날이 찾아왔다.
“수희야, 도착했다.”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 수희의 차가 세워지고, 밴의 문을 열고 수희가 밖으로 내렸다.
밖으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승조였다.
이 드라마의 투자자이자 제작자이니 어쩌면 승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미련의 티끌조차 남지 않도록 모두 정리를 마쳤다고 여겼는데…….
눈앞에 나타난 승조를 보자 바닥에 깔려 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수희야, 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철용이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다.
철용이 사라지자 승조가 수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거 받아요.”
승조가 건넨 건 다름 아닌 <패밀리> 1화 대본이었다.
대본이라면 이미 수희도 가지고 있었기에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건 1화 대본이잖아요.”
“보면 신이 끝나는 페이지들마다 포스트잇 플래그로 표시해 두고 숫자를 적어 놨습니다.”
수희는 구태여 말을 덧붙여 주지 않아도 승조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신 순서대로 리딩하지는 않을 테니 표시가 필요해 보여서 붙여 놨습니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 주니까.
그러니까 자꾸만 당신한테 의지하게 되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당신한테 원하는 건 없다. 그러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그걸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곧 리딩 시작할 텐데 올라가 봐요.”
승조의 말에 수희가 의문을 달았다.
“같이 안 올라가요?”
“내가 지금 올라가면 기자들한테 주목받을 겁니다.”
“…….”
“오수희 씨 복귀 작품이잖아요. 오늘은 오수희 씨 작품에 초점을 맞추는 게 맞을 겁니다.”
그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배려해 줄 줄은 몰랐다.
“그럼, 대본 리딩은 보러 안 오는 거예요?”
수희는 어투에 아쉬움이 묻어나려는 걸 떼어 내느라 애썼다.
“리딩 시작하고 나서 들어갈 겁니다.”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봐요.”
돌아서는 승조를 보며 수희가 붙였던 입술을 다시 떨어트렸다.
그러나 이미 등을 보인 승조를 차마 부르지는 못하고 가만히 바라만 봤다.
“실연당한 건 난데…… 왜 당신 얼굴이 더 안 좋은 건데.”
분명 평소와 똑같이 단정하던 그인데 어딘가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 보였다.
정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승조를 만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모든 상념이 승조의 것이 되어 버렸다.
심장에 수만 개의 촘촘한 바늘이 박힌 것처럼 쿡쿡쿡, 연이어 쑤셔 댔다.
차 비서가 운전석에 있는 차에 올라탄 승조가 창밖으로 보이는 수희를 바라봤다.
수희가 건물 안으로 한 걸음 옮기려는데, 막 밴에서 내린 준영이 수희의 옆을 차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두웠던 수희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한순간에 무거워진 공기에 차 비서는 숨이 턱턱 막혔다.
창밖과 승조를 번갈아 보던 차 비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대표님,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저번에 질투한다는 거, 설마 차준영 씨는 아니죠?”
“그게 왜 설마지.”
입이 쩍 벌어진 차 비서가 몸을 홱 돌렸다.
차 비서는 2주 동안 왜 자신의 보스가 고장 났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고장의 원인을 제공한 건 자신이라는 걸 말이다.
“맞네, 맞아.”
“뭐가 맞는다는 거야.”
마치 열변을 늘어놓듯 차 비서가 목에 힘을 주었다.
“차준영 씨한테 그렇게 질투가 나면, 질투가 난다고 말씀을 하시면 되죠.”
“친구나 가족, 동료한테도 질투가 나는 거라며. 당연한 건데 내가 왜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오, 마이…… 갓.
손바닥으로 입술을 쓸어내린 차 비서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건 대표님이 오수희 씨와 연애 중이시길래, 당~연히 오수희 씨는 아닐 거라 여겼죠.”
곧이어 차 비서가 직접 답을 내려 주었다.
“좋아하면 질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그런데 승조가 말한 질투가 수희를 향한 거였다니.
자신의 보스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제 보스가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모를 줄이야.
이건 명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진즉 승조가 꺼냈던 말의 의도를 잘 알아차렸다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오수희를 좋아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승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얻어맞은 건 차 비서인 듯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좋아하죠! 아니, 사랑하죠!”
차 비서는 아예 몸을 뒤로 틀며 한탄 섞인 말을 토해 냈다.
“대표님 지금 2주 동안 오로지 일만 하신 거 아십니까?”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않으니 차 비서까지 밥때를 놓쳤고, 퇴근은 또 어찌나 늦은지 차 비서까지 야근 모드였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사람처럼 아무것도 손대지 않기도 했다.
죽을 맛이었지만 이번 주 금요일이 월급날이라서 그나마 버티고 있었다.
그간 힘들었던 게 떠올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수희 씨 때문에 지금 생활이 엉망이면서, 그게 사랑이지 뭐가 사랑입니까?”
승조는 이미 수희가 떠나고 없는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수희와 준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치솟기도 했다.
차 비서의 말대로 수희를 만나고 온 이후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아주 사소한 것들도 챙길 여력이 없었다.
가슴 한구석 깊숙이에 수희가 박혀 빠지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날 이렇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많이 고민했었다.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좋아한다, 내가.
너를.
***
<패밀리> 대본 리딩이 펼쳐지는 VTV 회의실.
“이번에도 김시운 작가님은 안 보이시네요.”
수희의 옆에 앉은 준영이 비어 있는 작가석을 보며 말했다.
책상의 상석에는 감독석과 작가석이 있었는데, 김시운 작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시운 작가는 집필한 작품 모두 인생작이라고 할 만큼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만큼 다들 복면 작가의 얼굴을 궁금해했지만,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알지 못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배우들이 속속들이 안으로 들어왔고, 수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가득 미소를 담은 얼굴로 나타난 은채가 감독에게 가장 먼저 인사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강은채 씨.”
감독의 인사에 은채가 책상 위에 놓인 이름표를 보더니 수희의 옆으로 왔다.
“수희야, 홍콩에서 보고 이렇게 또 보니까 너무 좋다.”
“그러게. 이제 자주 보겠네.”
‘그래서 짜증 나 죽을 지경이던 참이야.’
자신의 자리를 뺏은 사람과 이제 매일 봐야 한다니.
게다가 수희와 친동생 역할인 터라 신의 반이 수희와 함께 하는 촬영이었다.
억지로 입술 끝을 들어 올린 은채가 수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차례로 안으로 들어오는 배우들 끝자락에 수희의 어머니 역인 이화정이 서 있었다.
유명 중견 배우인 이화정과 연기하는 건 처음이기에 수희는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막 연기를 시작했을 때, 방송국 복도에서 화정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받은 사인을 수희는 아직도 집에 고이 보관해 놓고 있었다.
화정이 감독과 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려 수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수희는 화정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깊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이 뭐야. 이제 엄마라고 불러야지.”
두 팔을 활짝 펼친 화정이 막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수희를 껴안았다.
어정쩡하게 두 팔을 들어 올린 수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편하게 엄마라고 불러. 물론 너 준비됐을 때. 알겠지?”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사랑이 담긴 것처럼 부드러웠다.
둥둥, 두드리는 손이 심장까지 큰 울림을 가져왔다.
화정이 품에서 수희를 떼어 내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엄마랑 딸 역할 같이 하게 돼서 정말 기쁘다, 수희야.”
다정히 불러 주는 이름에 수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연기를 시작하고 난 후, 동경해 오던 배우 중 한 명이 이화정이었다.
선망의 대상이 자신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보다 또 설레는 일이 어디 있을까.
화정은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하러 자리를 떠났지만, 수희는 조금 더 대화하지 못한 게 아쉬워 화정의 뒷모습만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모든 배우들이 도착하고, 가장 먼저 임 감독이 일어서 짧게 인사했다.
“이번 드라마 <패밀리> 감독을 맡게 된 임태용입니다.”
벽면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스태프들이 일제히 박수로 화답했다.
차례로 주연 배우들이 인사를 마치고, 드디어 <패밀리> 대본 리딩이 시작되었다.
대본을 읽지 못하는 수희도 그다지 어려운 고비 없이 리딩을 진행했다.
큰 어려움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건, 승조가 전해 준 대본 덕분이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임 감독이 대본 리딩의 끝을 알리자 기자들이 카메라를 내리고 정리를 했다.
대본 리딩이 완전히 끝난 뒤에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벽면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던 승조와 시선이 부딪쳤다.
“이건 뭐야?”
옆에 앉아 있던 은채의 손이 불쑥 수희의 대본을 가져갔다.
은채는 대본에 붙여 둔 포스트잇 플래그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신 표시해 둔 거야.”
‘굳이?’라는 얼굴로 은채가 수희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표시해 두면 신 찾아보기 편해서.”
“음, 그래?”
대본을 펼쳐 훑어보는 은채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지나치게 깨끗한 거 아냐? 꼭 새 대본처럼.’
수희는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은채의 손에서 대본을 가져갔다.
“첫 촬영 때 보자. 이만 가 봐야 해서.”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수희를 보고 은채는 뭔가 마음에 걸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기자들도 떠난 대본 리딩 현장을 나와 수희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누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준영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대표님 아직 안에 계시던데,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요?”
곤란한 듯 수희가 대답하지 못하자 준영이 회의실 문 쪽을 곁눈질했다.
“아직 화해 못 했어요?”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기에 준영은 수희가 그간 마음고생을 했을 듯해 걱정이 됐다.
어두운 수희의 얼굴을 보자 오히려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그녀가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졌으면 했다.
어쩌면 수희는 지금 당장은 승조를 떠올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었다.
승조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주제로 돌려 수희의 관심을 가져오려 했다.
“누나, 2화 신 15, 기억하세요?”
대본에 관해 묻던 차에 때마침 승조가 회의실을 나왔다.
“네가 넘어지려는 날 잡아 주는 장면, 맞지?”
“그 손을 이렇게 잡아 드리면 될까요?”
준영이 자연스레 수희의 오른팔을 아래에서 붙잡자, 수희가 냉정한 눈빛을 띤 채 준영을 마주 봤다.
“아니. 이것보다는 네가 두 팔로 날 잡아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수희가 준영의 한 손을 제 어깨에, 한 손은 제 팔에 가지고 갔다.
적극적인 수희의 지시에 따르다 보니 준영은 수희를 끌어안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말이야.”
본의 아니게 수희와 밀착하게 되자 준영의 심장이 뜀박질해 댔다.
감당 못 할 두근거림에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준영의 등 뒤가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승조의 두 눈에 라이트라도 켠 듯 불이 번쩍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