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흑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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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흑기사
2022.08.06.
성큼, 성큼. 큰 걸음을 내디딘 승조가 순식간에 두 사람과의 거리를 좁혔다.
뒤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수희가 고개를 돌리자 우두커니 서 있는 승조가 보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듯했다.
준영이 수희와 닿아 있던 손을 떼어 내자 승조가 말했다.
“감독님께서 차준영 씨 부르던데, 가 보시죠.”
회의실을 눈짓하자 준영이 수희에게 작별 인사를 남겼다.
“누나, 연락할게요.”
“응, 들어가.”
돌아서던 준영은 찰나에 스치는 승조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반쯤 가라앉은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너무나 싸늘해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준영은 지금 승조에게 잘못 보여도 한참 잘못 보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게 다 한승조 씨를 위한 거라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더하지 않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수희 씨, 같이 내려가죠.”
승조는 얼른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 감독이 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안 준영이 나타나기 전에 모습을 감춰야 했다.
승조를 따라 수희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데 핸드백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수희는 철용의 전화인 걸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오빠. 나 방금 대본 리딩 끝났어.”
[그래? 지금 한 대표님이랑 같이 있어?]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는 건지 승조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조를 눈으로 흘긴 수희가 대답했다.
“응, 같이 있는데. 왜?”
[그럼 한 대표님 차 타고 퇴근해. 나는 바로 회사로 가야 해서 나왔어.]
“뭐?”
이야기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떠나는 게 어디 있나.
[그렇게 속 끓이지 말고 얼른 화해해. 알겠지?]
“오빠, 그래도 이건 아니지. 여보세요?”
애타게 불러 보지만 이미 끊긴 휴대폰에서 철용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수희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승조가 재킷 안에서 짧게 울리는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에는 차 비서가 보낸 메시지 한 통이 떠 있었다.
[대표님, 제 걱정은 마시고, 오수희 씨랑 다 풀고 오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바로 차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메시지로 사진 한 장이 더 전송됐다.
작은 섬네일을 누르자 사진이 화면을 꽉 채웠다.
조수석에 앉은 차 비서는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고 있었고, 운전석에서는 철용이 씩 웃어 보이고 있었다.
어쩐지 회의실로 올라갈 때 이상하게 손에 차 키를 쥐여 준다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금방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득 채워졌다.
띵―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고 수희가 느릿하게 밖으로 몸을 빼냈다.
최대한 승조를 피하려고 했더니, 철용 때문에 마주하게 될 줄이야.
승조는 주머니에 있던 차 키를 꺼내며 말을 건넸다.
“차 비서한테 연락받았어요. 지금 오수희 씨 매니저랑 퇴근하는 중이네요.”
“저도 방금 매니저 오빠랑 통화했어요.”
다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수희가 말을 덧붙였다.
“전 택시 타고 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도 퇴근하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같이 가죠.”
지금은 당신보다 택시가 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희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되레 밀어내는 자신의 모습이 승조를 신경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희는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승조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럴게요. 같이 가요.”
건물 밖으로 나온 수희가 주차장 한편에 세워져 있던 승조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몸을 실은 승조가 시동을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마치 온 세상이 음소거된 것처럼 수희의 귓가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도로를 달리는 소음이라도 더해지면 좋으련만, 앞뒤마저 차들로 막혀 있으니 더욱 주변이 고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색할 줄 알았다면 택시를 타고 갔을 텐데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오늘 대본 리딩인데도 차준영 씨랑 연기 호흡 좋아 보였습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어 와 주니 반가움마저 들었다.
“좋아 보였다니 다행이네요. 대본 리딩 전에 만나서 미리 맞춰 보길 잘했네요.”
칭찬으로 들은 수희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이어 신호를 받은 차들이 출발하며 가다 서기를 반복하던 승조의 차가 도로를 내달렸다.
좌석에 편히 기대 창밖을 보고 있는 수희와 달리, 승조는 어딘가 모르게 표정이 내내 굳어 있었다.
“오수희 씨 때문에 지금 생활이 엉망이면서, 그게 사랑이지 뭐가 사랑입니까?”
차 비서가 했던 말이 내내 귓가를 떠돌았다.
근 2주 동안 승조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을 먹다가도, 샤워하다가도, 일하다가도 떠오르는 게 수희였다.
불쑥불쑥 준영과 함께 있는 모습이 떠올라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지금은 마음 다 접었어요.”
이미 내게서 마음이 다 떠난 너였다.
그 마음을 접으라 한 것도 나였다.
모든 일을 벌이고 덮은 것도 나면서 이제 와 너에게 고백을 할 수나 있을까.
고민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을 때, 어느덧 차는 수희의 아파트 앞에 세워졌다.
생각을 저편으로 밀어 둔 승조가 먼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 수희가 밖으로 내리고 승조를 마주 봤다.
그러고는 입술만 싱긋 들어 올렸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네요.”
“뭐가 말입니까.”
“한승조 씨가 그렇게 강조하던 적당한 선 지키는 거요.”
“…….”
“그거 좋다고요.”
할 말을 끝낸 수희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갈게요.”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는 수희를 보고도 승조는 붙잡지도, 떠나지도 못했다.
왜 난 진작 너에 대한 마음을 알지 못했을까.
왜 이제 와서 어디에도 담아지지 않아 넘쳐흐르는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난 커서 멋진 배우가 될 거야. 그럼 오빠는 내가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거야. 어때?”
“그래. 난 네가 멋진 배우가 될 수 있게 도와줄게.”
과거의 일부분이 방금 일어난 사건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펼쳐졌다.
너와 함께했던 날 중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넌 내게 늘 새로운 자극을 줬다.
네가 없었다면 난 목적 없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 감정이 단순히 너와의 추억이 값지고 소중해서인 줄로만 알았다.
이 마음이 더 나아가 너에 대한 호감 그 이상이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지금껏 마주하지 않았기에 몰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지금도, 내게 가장 중요했던 건 네가 그 자리에서 빛나는 것.
그것 단 하나였으니까.
“이기적이지.”
네 걱정을 하면서도 널 가지고 싶어서 이렇게 속이 끓는 걸 보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수희가 거실 창가에 붙었다.
무슨 일인지 승조는 떠나지 않고 한참 수희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영을 시종일관 날 선 눈으로 바라보던 것도, 차에서 준영의 이야기를 꺼내던 것도.
전부 질투 때문이라고 여기는 건 과한 판단인 걸까.
“그 좋아하는 감정이, 저와 같아질 일은 절대 없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제 겨우 딱지가 앉은 상처였다.
저 혼자 착각하고 설레다 또 마음을 다치고 싶지는 않았다.
두 팔을 펼쳐 거실에 커튼을 친 수희가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나한테 마음 없다잖아. 뭘 기대해.”
***
이틀 뒤, 늦은 저녁 강남의 한 고깃집은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 전, 촬영팀과 배우들이 모여 결합을 다지는 회식 자리가 마련됐다.
이미 거하게 한잔을 걸친 사람들은 한껏 들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누나, 술 안 마셔요?”
수희의 옆에 앉은 준영은 여전히 한 잔도 비워지지 않은 맥주잔을 내려다봤다.
나흘 전에 미리 처방받았던 약들을 전부 복용해 술을 마셔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혹여 술을 마셨다가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이 심해질까 봐 마시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많이 안 좋아요?”
대충 둘러대는 말이었는데 준영이 걱정하자 수희가 손사래 쳤다.
“그렇게 안 좋지는 않아.”
수희의 말이 막 끝났을 때,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다들 들뜬 얼굴로 수군거렸다.
수희가 있는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임 감독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한 대표님.”
그제야 수희는 자신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는 승조와 눈이 마주쳤다.
‘왜, 여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수희 역시 적잖게 놀랐다.
“내가 초대했어요.”
임 감독이 수희의 앞에 선 승조를 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드라마에 가장 많은 투자금을 지원해 주시기도 했고, 작가님이 원하는 배우들로 캐스팅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이기도 하니까.”
쓱, 임 감독의 입꼬리가 흐뭇하게 올라섰다.
“또 이분을 기다리는 다른 분도 있는 것 같기도 해서.”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수희에게로 꽂혔다.
하하.
손바닥을 부딪쳐 작게 손뼉 치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치껏 수희의 앞에 앉아 있던 주조연 배우가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빈자리가 나자 승조가 의자를 당겨 수희의 앞에 앉았다.
수희는 승조의 앞에 유리잔과 새 수저를 놓아 주며 말했다.
“온다는 말 못 들어서 놀랐어요.”
“나도 퇴근 중에 갑자기 연락받은 거라 미리 말 못 했습니다.”
맥주를 든 준영이 승조의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려는 순간이었다.
승조는 잔의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곧장 준영이 맥주를 걷어 갔다.
“아, 차 운전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아뇨, 술을 잘 못합니다.”
그러고 보니 <침수> 회식 장소에서도 몇 잔 마시지 않고 전부 거절했던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으니 임 감독은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렸다.
“아무리 좋은 각본이라도 감독이 어떻게 담아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거 잘 알 거예요.”
사람들 또한 잔을 들어 올리며 임 감독의 말에 집중했다.
“다른 말 하지 않을게요. 결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임 감독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번 <패밀리> 대박 한번 노려 봅니다!”
“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자 임 감독이 술을 들이켰다.
마치 파도타기를 하듯 임 감독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술잔을 비웠다.
가만히 술잔을 들고 있던 수희는 입만 살짝 댄 뒤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 두었다.
말끔히 비워 낸 술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며 임 감독이 수희의 술잔을 건너봤다.
“수희 씨는 왜 안 마셔요.”
호기롭게 토해 내는 건배사 속에서 이어진 파도타기라 이리저리 변명을 댈 분위기가 아니었다.
술과 함께 먹지 말라던 약도 이미 떨어지고 없으니, 한 잔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수희가 들고 있던 잔을 입가로 가져다 대려던 찰나였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잔이 달아나자, 아래로 내리깐 눈꺼풀이 확 들어 올려졌다.
꿀꺽, 꿀꺽.
수희의 술을 대신 마시는 승조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거렸다.
물을 마시듯 술을 들이켠 승조가 빈 잔을 수희의 앞에 내려놓았다.
잠시 얼떨떨해 있던 임 감독이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대표님이 술이 많이 고프셨나 보네요.”
그러기에는 방금까지 술을 잘 못한다고 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품을 틈도 없이 임 감독이 다시 맥주병을 들어 올렸다.
“수희 씨, 받아요.”
얼결에 수희가 잔을 들어 올리자 임 감독이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애정이 얼마나 흘러넘치는 건지 술이 잔 끝에서 찰랑거렸다.
천천히 잔을 가져오려는데, 또 순식간에 잔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데자뷔를 보듯 승조의 손에 수희의 잔이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단숨에 맥주를 들이켠 승조가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탕.
“오수희 씨가 마실 술, 저한테 전부 주시죠.”
요청하지도 않은 흑기사의 고삐가 풀려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