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죽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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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죽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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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죽을 만큼
2022.08.09.
“오수희 씨가 마실 술, 저한테 전부 주시죠.”
고저 없는 목소리로 꺼내 놓는 말에 수희는 눈을 키웠다.
흑기사의 등장에 주위 사람들은 부럽다는 눈빛을 쏘아 댔다.
임 감독은 로맨스 드라마에나 나올 만한 장면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럼 한 대표님이 한 잔 더 받으시죠.”
웬만해서는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건만, 임 감독은 짓궂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희가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승조는 이미 임 감독에게 잔을 내밀고 있었다.
“한승조 씨.”
말릴 틈도 없이 승조가 가득 따라진 맥주를 대번에 들이켰다.
쭉, 쭉, 쭉. 여전히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맥주에 임 감독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수희가 결국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한 대표님 술 많이 마시겠네.”
승조를 걱정하는 말 한마디를 툭 던져 놓고 임 감독이 다른 테이블로 사라졌다.
승조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오수희 씨, 우리 촬영 잘해 봐요.”
“저 옛날부터 팬이었습니다.”
“이번에 같이 촬영하게 돼서 영광이에요.”
수희의 테이블 사정을 모르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인사치레처럼 술을 건넸다.
일일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잔을 드는데, 입에 가져가기 무섭게 승조가 잔을 빼앗아 가 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승조의 손에 들린 잔은 곧장 입으로 직행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승조 혼자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을 먹어 치웠다.
술을 잘 못한다는 건 거짓이었던 건지, 승조의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멀쩡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수희는 제 술을 몽땅 마셔 치우는 승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물이라도 마셔요.”
수희가 잔에 물을 따른 뒤 승조의 앞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요.”
고마운 사람은 오히려 수희였다.
승조가 단순히 술이 고파 가져가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혹여나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상태가 악화될까 걱정돼서일 것이다.
“이제 술 안 마셔 줘도 돼요. 적당히 거절하면 되니까요.”
“마침 술 마시고 싶던 참입니다.”
“그래도…….”
“걱정할 거 없어요. 못 마시겠으면, 나도 안 마실 테니까.”
그렇게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조는 소주 석 잔을 연달아 마셨다.
소주병을 내밀어 오는 사람들에게 손사래를 쳐 여러 번 거절했지만, 진득하니 취한 사람들이 한 잔만이라고 애타게 말하니 승조가 들이켠 것이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곤란한 처지에 놓여 수희가 술을 마실까 자리를 뜨지 못하던 승조가 두 시간 만에 일어섰다.
고깃집 바깥에 있는 화장실로 가기 위해 승조가 밖으로 나갔다.
아직 취하지 않은 건지 걸음걸이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수희가 한참 동안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승조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워낙 인기가 많아서 수희 옆자리 차지하기 힘드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화정이 술잔을 가지고 수희의 옆에 앉아 있었다.
“선배님.”
“나 우리 딸한테 술 한 잔 받으려고 왔어.”
상냥한 말씨와 인자한 미소에 수희는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풀어졌다.
화정이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괸 채 수희를 빤히 바라봤다.
“이번에 너랑 작품 하고 싶다고 내가 얼마나 졸랐는지 아니?”
소주를 따르던 수희가 놀라 물었다.
“감독님께요?”
화정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작가님한테.”
“김시운 작가님을 아세요? 아시는 분이 아무도 없던데.”
잔에 따라진 술을 들이켜고는 화정이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내가 옛날부터 좀 친했어. 그래서 김시운 작가 첫 작품도 함께 했던 거고.”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화정의 목소리가 감춰졌다.
“김시운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화정은 마치 김시운 작가를 떠올리듯 눈동자를 위로 끌어 올렸다.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화정이 사르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정하지. 특히 나한테 더.”
가만히 듣고 있으니, 꼭 연인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비혼주의자로 알려진 화정이 만약 결혼을 했다면, 아들이나 남편이 작가일 거라 짐작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던 차에 화정이 수희를 보며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한 잔 마실래?”
“아, 저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요.”
화정은 얼른 소주병을 걷어 갔다.
“그래? 그럼 억지로 마시지 마.”
뒤쪽에 있는 원래 테이블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정이 일어섰다.
“컨디션 관리 잘해서 촬영 때 보자.”
“네, 촬영 때 뵐게요.”
화정이 자리를 떠나고 수희는 테이블에 앉아 승조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수희의 테이블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여러 번.
그때까지도 승조는 다시 자리로 오지 않았다.
다른 일이라도 생겨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난 걸까.
그러기에는 맞은편 의자에 승조의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승조가 걱정돼 수희가 의자를 밀고 일어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고깃집의 유리문을 열고 나온 수희는 유난히 쌀쌀해진 날씨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길가를 두리번거리던 수희가 다시 안으로 들어서려던 때였다.
고깃집과 옆 건물 사이,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형체를 발견하곤 수희가 발길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승조였다.
인기척을 들은 승조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몸을 틀었다.
“왜 나왔어요.”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당신을 찾으러 나왔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이미 잊는다, 지웠다 할 땐 언제고 없어진 당신을 보러 나온 내가 모순덩어리 같아서.
손을 뻗어 온 승조가 수희의 뺨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차가운 손끝이 닿자 살갗이 찌르르 전율했다.
갑작스레 손길을 건네는 걸 보면 이제 와 취기가 도는 듯했다.
“춥습니다. 들어가요.”
“……한승조 씨는요? 왜 안 들어가요?”
도저히 술이 깨지 않아 찬 바람이라도 맞으면 나을까 싶어 서 있던 거였다.
제 주량을 정확히 알지 못했던 승조는 오늘에서야 자신의 한계점을 알게 되었다.
소주 한 병, 딱 한 병을 마셨을 때부터 눈앞이 어지럽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런데 지금 맥주 한 병에 소주 두 병을 마셨으니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좀 있다 들어갈 겁니다. 보다시피 입고 있는 건 이것뿐이라 벗어 줄 수도 없습니다.”
승조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자신의 와이셔츠를 가리켰다.
홍콩에서 재킷을 벗어 줬던 게, 사람들을 의식해서 한 행동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승조 씨.”
낮게 불리는 자신의 이름에 승조가 수희를 바라봤다.
물음이 가득 담긴 얼굴에 승조의 입가에 남아 있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술, 마시고 싶어서 마셨던 거 아니죠? 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렇게 마셨어요?”
예상한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궁금했다.
“큰 이유는 없어요. 오수희 씨가 마시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대신 마신 것뿐입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이유가 수희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릿한 숨이 섞인 말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왜요. 굳이 한승조 씨가 대신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그러고 싶었어요.”
“…….”
“그게 괜한 참견이었다면 미안합니다.”
마치 수희의 화를 다독여 주듯 사과는 담백했고 따듯했다.
“추워요. 들어.”
“왜.”
승조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수희가 말을 잘라 냈다.
펴져 있던 손가락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왜 기대하고 기대게 만들어요.”
사실 나는 그를 다 잊지 못했다.
첫사랑이라는 건 꽤 질기고 지독해서, 지우려고 하면 금세 되살아나 못살게 굴었다.
“고백 거절했으면 태도 정확히 해 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를 지워 내기 위해 목에 가득 힘을 주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계약 유지하고 싶어서 적당한 거리 두자고 한 거 아니었어요?”
“…….”
“그거 지금 허물고 있는 사람은 한승조 씨잖아요.”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던 게 아닌데, 감정이 소용돌이쳐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를 유지하는 게 우리한테 더 이득일 거라 여겼습니다.”
“…….”
“그때는 말이에요.”
차디찬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고백을 거절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금방 눈물막이 쳐졌다.
다시 그날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말을 막아서려던 찰나였다.
“그래서 내 마음 무시하고 있었어요.”
“…….”
“나한테 중요한 건 오수희 씨에 대한 마음이 아니라 오수희 씨의 인생이었으니까.”
그를 보고 있던 수희의 눈꺼풀이 활짝 들어 올려졌다.
마치 제 뜻을 꾸밈없이 전달하려는 것처럼 담담하게 내뱉는 그의 음성이 선명했다.
“난, 날 좀 과대평가했습니다.”
“…….”
“오수희 씨에 대한 감정이 별거 아니라 생각했어요.”
그때의 나는 오만하고 건방졌다.
너에 대한 마음이 한낱 풋사랑보다도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마주한 내 마음은 그런 것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난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하자던 네 터무니없는 약속이, 너에게로 이끄는 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걸음 물러섰다.
“취해서 하는 말이죠?”
꿈결에 입을 맞췄던 것처럼, 이것도 취기에 꺼내 본 말 아닐까.
“맨정신으로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취중 진담처럼 하네요.”
그가 설핏 웃어 보지만, 그 미소는 금방 지워졌다.
더없이 진중한 얼굴로 승조가 말을 전했다.
“취해서 하는 말 아닙니다.”
“…….”
“지금처럼 정신이 멀쩡한 날은 최근 들어 없었으니까.”
늘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살아왔다.
취할 만큼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다.
“그러니까, 지금…… 한승조 씨, 저한테 고백하는 거예요?”
“네, 고백하는 겁니다.”
수희는 쿵쿵 뛰어 대는 심장을 애써 숨겨 보며 거짓말을 뱉어 냈다.
“내가 말했잖아요. 한승조 씨 죽을 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고, 마음 다 접었다고.”
“상관없어요.”
승조가 결심한 듯 단단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지금부터 내가 오수희 씨 죽을 만큼 좋아해 볼 테니까.”
***
건물 뒤편, 준영이 귓가에서 떼어 놓은 휴대폰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영아, 듣고 있어?]
통화에 집중하지 못한 준영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회식 언제 끝날 것 같아? 나 지금 기획사 갔다가 퇴근하는 길에 들렀다 갈까 하는데.]
“아냐, 형. 내가 알아서 갈게.”
[그럴래?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매니저와 통화를 끝낸 준영이 휴대폰을 쥐고 있던 팔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멀지 않은 곳에 수희와 승조가 보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 꼴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한동안 준영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으로 수희와 승조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한승조 씨, 저한테 고백하는 거예요?”
“네, 고백하는 겁니다.”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아는 것과 사실이 많이 다른 듯했다.
게다가 ‘계약’이라니.
“여기서 뭐 해요?”
생각을 끝낼 틈 없이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