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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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화마
2022.08.13.
“여기서 뭐 해요?”
생각을 끝낼 틈 없이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잔뜩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은채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은채의 등장에 준영은 승조와 수희가 보이지 않도록 제 몸으로 가렸다.
“통화하고 있었어요.”
“아, 그래요?”
준영이 무언가 감추는 것 같은데, 은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은채가 준영의 옆으로 걸어가려 하자, 준영이 은채의 팔을 살짝 붙잡았다.
“저쪽에 담배 피워서요. 이쪽으로 나가요.”
담배 피우러 나온 거였는데.
속마음을 숨긴 은채가 싱긋 눈만 웃은 채 몸을 돌렸다.
은채의 발길이 돌아가고 나서야, 준영이 뒤편에 있는 두 사람을 눈으로 흘겼다.
대화는 끊겼지만, 두 사람은 한참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지금부터 내가 오수희 씨 죽을 만큼 좋아해 볼 테니까.”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두 눈을 말똥히 뜬 수희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시간 낭비예요. 난 당신한테 마음 줄 생각 없어요.”
확고하게 제 뜻을 밝힌 수희는 그길로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회식 장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운 지 한 시간이 지나가건만 잠은 조금도 이룰 수 없었다.
“오수희, 거짓말만 늘어서는…….”
그의 손길이 내 뺨에 닿았을 때, 그가 내게 고백했을 때.
모든 순간 숨이 가빠지고, 심장은 점차 빠르게 뛰어 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그를 잊지 못했다.
바보처럼 아직도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게 날 할퀴고, 상처 냈던 그 사람을.
내 마음을 알면서도 그를 받아 줄 수 없었던 건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또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귓가에 떠도는 그의 목소리를 지워 보려 베개에 깊이 머리를 묻었다.
오늘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 밤 중 하루였다.
***
<패밀리> 첫 촬영이 시작된 건 회식일로부터 나흘이 더 지난 후였다.
그동안 승조에게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안부 메시지가 도착했다.
[잘 잤습니까?]
[점심은 잘 먹었어요?]
[잘 자요.]
생전 하지 않던 안부 메시지에 처음에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건가 했다.
그러나 간결한 메시지는 ‘나 한승조요.’라고 써 붙여 놓은 듯했다.
달라진 승조의 태도가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하루 이틀 지나니 그의 메시지를 기다리게 됐다.
밴에서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던 수희가 손안에 쥔 휴대폰이 진동하자 눈꺼풀을 확 떴다.
“아, 언니, 지금 눈 뜨면 안 되는데.”
다급한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수희가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뜨고 싶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자 스타일리스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었다.
“언니 휴대폰 먼저 확인할게요.”
“안 그래도 되는데.”
말과는 달리 얼른 눈을 뜬 수희가 휴대폰을 들어 액정에 뜬 메시지를 엄지로 눌렀다.
역시나 승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첫 촬영 잘해요.]
“보내려면 좀 더 길게 보내지.”
이왕이면 촬영 잘 끝내라든지, 응원하겠다든지. 좋은 말들 많잖아.
툴툴거리면서도 수희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답 안 해요?”
가만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수희가 스타일리스트의 물음에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안 해도 돼.”
수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밴 뒷좌석 문을 열고 철용이 나타났다.
“수희야, 촬영 들어간대.”
스타일리스트는 급히 화장을 마무리하고 나서 손을 떼어 냈다.
밴에서 내린 수희는 촬영 준비가 막 끝난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 다 완성되지 않은 3층짜리 건물은 곳곳에 뼈대가 드러나 있기도 했다.
원래라면 예정된 첫 신은 화정과의 단란한 하루를 보내는 장면이었지만, 은채의 일정 때문에 뒤에 있던 신을 끌어와 찍게 되었다.
뒤이어 은채가 도착하자 임 감독이 손뼉을 치며 주위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첫 촬영 무사히 잘 끝내 봅시다.”
촬영 모니터 앞에 임 감독이 앉자 수희와 은채가 카메라 앞에 섰다.
진중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보던 임 감독이 손을 들어 올렸다.
“레디, 액션!”
수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지만 은채는 카메라 앞에서는 감정을 지워 냈다.
은채가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집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진으로 봤을 땐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까 훨씬 크잖아.”
“하와이에서 오빠네 가족도 들어오고 나면 집도 다 완공될 것 같아.”
검지를 들어 올린 은채가 건물의 층수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1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이모, 2층에는 오빠네 가족, 3층에는 엄마랑 아빠, 그리고 언니랑 나. 그렇게 쓰기로 한 거 맞지?”
수희가 추억에 잠겨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어릴 때 한집에 가족들이 다 같이 사는 게 꿈이었는데, 꿈이 이루어지긴 하네.”
잔뜩 기대된다는 얼굴로 은채가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깍지를 꼈다.
“같이 살면 엄마가 해 주는 밥도 매일 먹을 수 있겠네. 나 배달 음식 완전히 질렸거든.”
수희가 은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단단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요리는 이 언니한테 맡겨. 자취하면서 실력 늘었거든.”
“웩, 그건 제발 참아 주라.”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고, 감독은 손을 들어 올리며 컷을 외쳤다.
무난하게 첫 촬영 신이 마무리되고 잠깐의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철용이 수희가 볼 대본을 가져오자 수희가 괜찮다는 듯 손바닥을 내보였다.
다음 촬영은 건물 내부에서 진행되기에 수희가 먼저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오빠, 난 올라가서 촬영장 좀 볼게.”
“그럼 나는 커피 좀 사 올게.”
건물 1층에서는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미리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선 수희가 촬영이 펼쳐질 3층으로 올라갔다.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들은 수희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
건물 뒤편 외진 곳에서 흰 담배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건물 벽을 보고 선 은채는 담배를 끼워 놓은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
“후우.”
2년 전까지만 해도 담배는 냄새만 맡아도 질색을 했지만, 사람 일은 모른다고 지금은 골초가 되어 있었다.
2년 전 찍었던 영화에서 담배를 피우는 역할을 맡았었는데, 그때 몇 대 피우다 보니 맛 들여 버린 것이다.
그 때문에 카메라가 잠시 꺼지기만 하면 담배를 찾게 되었다.
“이것도 끊어야 하는데.”
은채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골초라는 사실이 퍼진다면, 분명 많은 팬이 떠나갈 것이다.
반 정도 남은 담배가 아까웠지만, 은채는 담배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쌓아 놓은 마른 나무 자재 위로 담뱃불이 올라서고, 돌아선 은채는 담배의 불꽃이 나무 자재를 까맣게 태우고 있는 줄도 몰랐다.
은채가 건물을 완전히 벗어나자 휘이, 불어오는 바람에 불씨가 점차 커졌다.
애석하게도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불길을 만들었고, 철재 사이에 세워져 있던 가벽에 쉽게 달라붙었다.
타닥, 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점차 커질수록, 불덩이는 무섭게 크기를 키워 갔다.
가장 먼저 화재를 발견한 건 1층에서 짐을 옮기던 스태프들이었다.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
대수롭지 않게 한 스태프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확인했다.
“이 근처에서 공사 많이 하잖아. 거기서 뭐라도 태우나 보지.”
“그런가. 이제 거의 다 옮긴 것 같은데 위로 가지고 올라갈까?”
스태프들이 바닥에 놓인 짐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때였다.
바닥에 잔잔하게 깔리는 연기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 불이야! 불이야!”
스태프들은 점차 입구로 다가오는 화마를 보고는 일제히 소리쳤다.
목숨 같은 카메라만 안은 채 스태프들이 급하게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임시로 세워진 가벽은 스태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타들어 갔다.
매캐한 연기가 금방 1층을 집어삼키고, 불기둥은 2층까지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공황 상태가 되어 버렸던 임 감독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안에 있는 스태프들은, 아무도 없지?”
한 스태프가 밖으로 빠져나온 인원들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인 채 한숨 돌렸다.
“다 나왔습니다.”
“안에 사람 없는 거 확실하고?”
“네, 일단은 저희 밖에 다 나왔으니까 안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그제야 임 감독은 인명 피해는 없다는 걸 알고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촬영장이 갑자기 불에 탈 줄이야.
임 감독과 스태프들이 손도 쓰지 못한 채 타들어 가는 건물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오수희 씨는요?”
스태프들을 확인하고 있던 은채가 눈을 확 떴다.
분명 밖에서 철용과 대화하는 걸 보고 건물 뒤로 향했었다.
“아무도 수희 씨 본 사람 없어요?”
은채가 목소리를 높여 소리치는데, 한 여성 스태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떡해. 나 오수희 씨 위층 올라가는 거 본 거 같아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한 채 건물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미 화염은 2층까지 덮친 후였다.
그때 커피숍을 다녀온 철용이 불타오르는 건물을 보고는 커피 캐리어를 놓쳤다.
이미 밖으로 나온 사람을 둘러보던 철용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수희는요? 수희 안에 들어가 있겠다고 했는데. 수희 어디 있어요?”
눈에 불을 켠 철용이 겁에 질린 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수희야……. 안 돼, 수희야!”
철용이 벌떡 일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 했지만, 스태프들이 얼른 두 팔을 붙잡아 발을 묶어 두었다.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 발버둥 쳤지만,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스태프들은 철용을 놓아주지 않았다.
***
3층으로 올라간 수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건물을 둘러보았다.
실제 공사 중인 건물이라 그런지 바닥엔 어수선하게 자재들이 깔려 있었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수희도 이 드라마 배역과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남동생과 한집에서 사는 꿈.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꽤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왜인지 아빠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어졌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아빠를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애란과 별거 중인 듯했다.
상념들을 지우려 무선 이어폰을 두 귀에 꽂은 수희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승조가 녹음해 준 다음 신 대사를 재생하며 이미 다 외운 대사를 한 번 더 체크했다.
“불이야!”
밑에서 고함이 울려 퍼졌지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묻혀 버렸다.
불길이 치솟는 걸 알아차린 건 코를 찌르는 탄내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불을 피우는 것치고는 강한 연기에 눈가까지 금방 따가워졌다.
“콜록!”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수희가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
계단 쪽으로 몸을 튼 순간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코와 목으로 동시에 파고든 연기에 이맛살을 좁히며 팔로 코를 막았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수희가 계단으로 뛰어가는데, 다가서기 무섭게 불이 치솟았다.
이미 계단을 태우고 있는 불길에 수희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자비 없는 불길은 금방이라도 수희의 발끝에 닿을 듯 드높이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