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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무슨 수를 써서라도 (57/118)


57. 무슨 수를 써서라도
2022.08.16.



[첫 촬영 잘해요.]

오랫동안 고민했던 메시지를 전송한 승조가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답장이 없는 메시지 목록을 살펴보고서도 승조는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룸미러로 승조를 보고 있던 차 비서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오늘 오수희 씨 첫 촬영이죠?”

“맞아.”

“과천에서 촬영한다고 들었는데.”

휴대폰을 보고 있던 승조의 시선이 그제야 떨어져 나갔다.


“차 비서가 그걸 어떻게 알지.”

룸미러를 눈으로 흘긴 차 비서가 신이 나 떠들었다.


“제 친구 중 한 명이 거기 조연출로 있거든요. 오수희 씨랑 같이 일한다고 얼마나 좋아하던지.”

덧붙는 뒷말은 승조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촬영지가 정확히 어딘지 알고 있어?”

“저는 알죠.”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승조의 말이 떨어졌다.


“그럼 들렀다 가지.”

“네.”

사실 이미 차 비서는 미팅 후 부러 과천 쪽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승조가 어떻게 나올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위를 차 비서가 운전하는 차가 내달렸다.

과천에 막 들어선 차가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귓전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사이드미러를 통해 차 비서가 뒤편을 바라봤다.

소방차와 구급차가 빠른 속도로 승조가 탄 차와의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은 차 비서가 차를 옆으로 세우자 소방차와 구급차가 앞서 질러갔다.


“어디서 불이 났나 봐요.”

승조가 창가로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피어오르고 있는 연기가 보였다.

검은 연기를 보자 승조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 같은 게 찾아왔다.

단순한 우연인 건지 차 비서가 향하는 곳도 소방차와 같았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도 내비게이션이 소방차의 뒤를 가리키자, 승조가 좌석에서 허리를 떼어 냈다.


“차 비서, 속도 좀 더 올려.”

“네? 네.”

승조의 지시대로 차 비서는 액셀을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만약, 아주 만약에 촬영장에 불이 난 거라면.

그로 인해 수희가 다쳤다면.

아닐 거라, 그럴 리 없을 거라 믿고 싶었지만, 불안은 쉽사리 걷히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든 승조는 곧장 수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이어지는 일정한 신호음이 심장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촬영 중이라 전화를 받지 않는 거라 여기고 싶었다.

신호음이 끊어진 승조의 눈앞에 불길이 치솟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앞에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나란히 서 있었고, 사람들이 건물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는 철용도 보였다.

쿵쾅, 쿵쾅. 심장이 머리에서 뛰어 대는 것만 같았다.

차 비서가 차를 세우자마자 승조가 문을 열고 내렸다.

세차게 타오르는 무서운 불기둥에 시선을 꽂아 넣은 채 철용에게 다가갔다.


“수희, 오수희 씨는 어디 있습니까.”

제발 저 안은 아니라고 해.

아니어야만 한다. 그래서는 안 된다.

허리를 숙인 채 펑펑 눈물을 쏟아 내고 있던 철용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한 대표님. 허엉. 흐엉.”

철용은 엉엉 울면서도 손가락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건물 내부를 가리켰다.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붙잡는데,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수희

수희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승조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수희 씨. 괜찮아요?”

한층 높아진 승조의 목소리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승조의 물음에도 휴대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희미하게 수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살려…… 살려 주세요.]

저 뜨거운 불 속에 수희가 의식이 붙은 채로 있었다.

얼마나 뜨거울까. 얼마나 괴로울까.


“구해 줄게요. 지금 구해 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요.”

[…….]

더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승조가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구로 들어서려는 소방관들을 바라봤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소방관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데, 큰 소음과 함께 철재 위에 붙어 있던 나무 자재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악!”

불이 붙은 나무 자재 아래에 다리가 깔린 소방관이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뒤에 서 있던 소방관들이 재빨리 자재를 밀어냈다.

다리가 다친 소방관이 절뚝거리면서 일어서자, 다른 소방관들이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내부를 바라봤다.

점차 시간만 지체되고, 어느새 화염은 3층까지 타고 올라갔다.

저 불구덩이 속에 수희가 있는데, 승조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살려 달라고, 힘겹게 외치던 수희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구해 주겠다고, 조금만 버티라고 했는데, 두 다리는 아직 건물 밖에 있었다.


“그 물로 뭘 하겠다고 들고 와!”

큰 소리에 승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한 남성 스태프가 파란색 양동이를 들고 낑낑거리며 서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던 감독은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저었다.


“건물 무너지면 다른 사람들까지 다치니까 다들 뒤로 물러서 있어요.”

파란 양동이에 가득 담긴 물을 보자 승조는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스태프가 다른 건물에서 끙끙대며 들고 왔던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순간이었다.

무거운 양동이를 한 손으로 낚아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양동이를 뒤집자 많은 양의 물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승조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승조가 들고 있던 양동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망설이는 잠깐의 시간도 승조에게는 아까웠다.

안에서 자재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기이하게 들려오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소방관들이 손을 뻗어 승조를 말리려 했지만, 아슬하게 승조의 팔을 놓치고 말았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은 불길 속으로 사라진 승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누구도 맨몸으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

10분 전.

불길에 뒤로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휴대폰을 놓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눈가가 따끔거려 눈물이 잔잔하게 깔렸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수희가 바닥을 더듬거려 보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무도, 아무도 없어요?”

애처로이 울려 퍼지는 말소리에도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매캐한 연기가 사정없이 목구멍 안으로 치고 들어오자 울컥 헛기침이 나왔다.


“컥! 콜록! 콜록!”

다발적으로 기침하자 코와 입으로 시꺼먼 연기가 다시금 밀려들어 왔다.

폐에 연기가 가득 찬 것처럼 괴로워 수희가 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때, 무음으로 해 두었던 휴대폰 액정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냈다.

자세를 낮춘 수희가 엉금엉금 기며 뭉게뭉게 깔린 연기 속에 손을 뻗어 보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빛을 잡아 보려 손을 쥐락펴락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하윽.”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 뜨거운 불을 집어삼킨 것만 같았다.

뚝.

전화가 끊긴 건지 더는 빛이 반짝이지 않았다.

등을 동그랗게 만 수희는 세찬 기침을 반복하며 앞으로 기어갔다.

바닥에 떨어진 뾰족한 못이 무릎과 팔꿈치를 찔러 댔지만, 그것보다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연기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얼마나 들이마신 건지 머릿속까지 뿌연 연기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불이 닿기도 전에 연기로 인해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힘겹게 이리저리 뻗은 손가락 끝에 드디어 휴대폰이 닿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올렸지만 쏟아지는 눈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깜박여 봤음에도 눈앞은 검은 연기로 가득했다.


“제……발.”

누구에게든 자신이 아직 3층에 있다는 걸 알려야 했다.

손이 가는 대로 가장 위에 있던 통화 목록을 눌렀다.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아 끊기고, 전화를 받은 상대방의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턱 끝까지 찬 연기에 수희의 정신은 혼미했고, 안타깝게도 승조의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살려…… 살려 주세요.”

숨을 헐떡거리는 수희의 입술 밖으로 간절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수희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의식을 잃기 직전, 고통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은 수희는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사이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한승조 씨.’

왜 지금 이 순간 승조가 떠오르는 걸까.


“같이 손잡고 있으면 덜 무서워요. 중학생 오빠가 무서워하니까 내가 잡아 줄게요.”


“오빠도 나한테 반말하길래 친구 하자는 뜻인 줄 알았는데?”


“오빠 나 잊으면 안 돼. 약속해.”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주마등인 듯했다.

이제야 전부 잊고 있던 기억들이 작은 전등에 불이 반짝 들어오듯 떠올랐다.

왜 지금에서야 전부 기억나는 걸까.

이미 늦어 버렸는데…….

다 소용없어져 버렸는데, 왜.


“죽기 싫어.”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이대로 이 검은 연기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수희가 턱 끝을 들어 올려 마지막 힘을 짜냈다.


“여, 기. 여기 사람 있어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외치고 또 외치고, 목이 쉬어라 소리를 질러 댔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불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저 불 속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앉은 수희가 점차 다가오는 불을 피해 벽 쪽으로 물러서던 때였다.

저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어두운 연기를 뚫고 지금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섰다.


“한승조 씨.”

흐느끼는 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무슨 힘이 났던 건지 자리에서 일어선 수희가 그에게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수희를 발견한 승조가 그녀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수희에게 달려갔다.

일순 시야가 흔들린다 싶더니 수희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쓰러지기 직전, 승조가 수희를 품에 안았다.


“수희야! 오수희!”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승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얄팍한 숨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고, 수희는 안간힘을 써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순간 어그러지는 몸체를 버티지 못한 창문이 와장창하고 부서졌다.

승조가 본능적으로 수희를 끌어안았고, 검은 연기가 뚫린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연기는 걷혔지만, 화염은 더욱 거세졌다.

품에 안고 있던 수희를 내려다본 승조가 미간을 찌푸렸다.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수희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했다.


“오수희, 제발.”

승조는 수희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득히 멀어지는 정신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했다.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천천히 눈을 뜨자 연기처럼 흐릿했던 승조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넌 내가 살릴 거야.”

“…….”

“그러니까 정신만 잃지 마. 그것만 약속해.”

대답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린 수희가 승조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자신을 안심시키려 울 것 같은 눈으로 웃고 있으니, 그게 또 너무 안돼 보여서.

그게 또 너무 마음이 아파서.

수희도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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