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혼수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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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혼수상태
2022.08.20.
승조는 입고 있던 젖은 재킷을 벗어 수희에게 덮어 주곤 한 번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미약하게 숨만 쉬는 수희는 승조의 품에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한 발 뻗으려 했던 승조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순간에 한쪽 무릎이 꺾이더니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다.
불길 속으로 뛰어든 승조는 1층부터 3층까지 샅샅이 수희를 찾아 돌아다녔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검은 연기를 가득 들이마신 탓에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소방관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간 수희도 자신도 질식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전에 이 건물이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무릎에 힘을 준 승조가 다시 곧게 몸을 세운 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뼈대를 드러낸 건물이 화염에 사로잡혀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계단 곳곳에 쓰러진 지지대들을 피해 뛰어넘으며 2층까지 도달했다.
1층으로 가는 계단이 보이는데도 승조는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계단 아래로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붙어 있어야 할 철재 하나가 아래로 낙하했다.
기우는 철재를 보고는 승조는 자리에 주저앉아 수희를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끼기기기-
불이 붙은 철재가 기이한 소리를 내며 승조의 상체 위로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철재가 몸을 내리치자, 승조의 허리가 아래로 푹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는 바닥을 짚은 채 승조가 제 품에 안겨 있는 수희를 살폈다.
다행히 몸으로 수희를 끌어안은 탓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마치 건물이 무너지기 전 마지막 아우성을 치듯, 쇠들이 긁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불꽃이 섞인 연기가 목 끝을 찔러 대고, 철재에 억눌린 몸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승……조.”
승조와의 약속대로 의식의 끈을 겨우 붙들고 있던 수희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름을 뱉어 낸 후에는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구부러졌던 무릎을 천천히 세우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등을 짓누르고 있던 철재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바닥으로 텅,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점차 거칠어지는 호흡에 많은 양의 연기가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1층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계단만 내려가면 끝이었다.
수희의 허벅지 뒤와 허리를 받치고 다시 한번 힘껏 들어 올렸다.
수희의 상체에 올려져 있던 재킷이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걸 다시 주울 수 있는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발, 한 발, 계단을 밟아 나가는 다리에 무거운 추라도 달아 놓은 듯했다.
1층 계단을 모두 내려왔을 때, 승조의 뒤로 자재들이 쓰러져 내렸다.
때마침 입구를 막고 있던 자재들을 소방관들이 걷어 내자, 환한 빛 한 줄기가 어둠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일순 귓가에 타닥거리던 불꽃 소리가 멎고, 이명이 귓바퀴를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거친 호흡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온다!”
“……준비해 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윙윙대며 주변을 맴돌았다.
구급 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일제히 수희와 승조에게 달려왔다.
소방관 몇몇은 약했던 물줄기를 거세게 틀며 건물의 불길을 진압했다.
승조와 수희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층의 천장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들것을 내려놓은 구급 대원들이 다가오자 승조가 품에 안은 수희부터 건넸다.
“수희부터.”
구급 대원들이 수희를 들것에 싣자, 그녀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막이 쳐진 것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아 눈썹을 끌어 올려 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들것이 들리자 승조가 수희에게 손을 뻗어 이마를 쓸어 올렸다.
“이제 다 괜찮을 겁니다.”
당신은 괜찮은 거예요?
말라붙어 버린 입술은 떨어지지조차 않았다.
승조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수희가 무거운 눈을 붙였다.
수희가 구급차에 실리는 걸 보고 난 후에야 승조는 예민하게 곤두섰던 신경을 누그러트렸다.
한순간 퓨즈가 나간 것처럼 승조의 몸이 점차 기울어졌다.
무릎이 바닥에 꿇리고 이내 상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이윽고 눈앞이 깜깜해지고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수희의 눈꺼풀이 느리게 떠졌다.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철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수희야, 수희야! 정신이 들어?”
머리가 울려 수희가 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철용은 병실을 뛰쳐나가 데스크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말해 의사를 호출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가 싶더니 의사가 수희의 의식을 확인했다.
“오수희 씨, 제 목소리 들립니까?”
메아리처럼 울려 대는 의사의 음성에 수희가 턱만 까딱거렸다.
수희의 턱짓에 철용은 두 손을 모아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의 기도 같은 걸 했다.
의사가 철용에게 무어라 말을 남긴 뒤 간호사와 함께 병실을 나갔다.
시간이 차츰 지나자 온전치 않던 정신이 천천히 돌아오는 듯했다.
몸에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이 누워 있던 수희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스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넌 내가 살릴 거야.”
그 위험한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던 승조였다.
분명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런데 승조는 무슨 일인지 병실에 보이지 않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수희를 보고 철용이 급히 수희를 눕히려고 했다.
“누워 있어. 너 이틀 만에 깨어난 거야.”
이틀이라니, 그렇다면 승조는 계속 옆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잠시 자리를 뜬 걸까.
“그럼 한승조 씨는 일하러 간 거야?”
사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승조의 얼굴이 보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생명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한데 수희의 물음에도 철용은 우물쭈물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려 댔다.
간단하게 나올 대답인데 철용은 제대로 된 말 하나 꺼내지 못했다.
불안해진 수희가 괜스레 웃어 보이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수희야, 그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게.
억지로 들어 올렸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철용이 한숨을 토해 냈다.
“아직 일어나질 못했어.”
그럴 리가 없었다.
들것에 실려 가는 자신을 보고 이제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던 그였다.
웃으며 날 보내 놓고. 그가 아직 일어나질 못했다니.
철용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지지 않는다는 게 맞을 것이다.
“말도 안 돼. 내가 분명히 한승조 씨랑 건물 밖으로 같이 나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멀쩡하게 걸어 나오길래 다친 곳이 없는 줄 알았지.”
뒤이어 쓰러졌던 승조를 떠올리던 철용이 눈을 질끈 감았다.
수희에 이어 병원에 도착한 승조의 상태를 차 비서에게 전해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재가 쓰러지면서 뇌출혈이 왔고 척추는 압박 골절을 당했으며,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폐렴까지 와 호흡기를 달아야만 했다.
그나마 상태가 좋아져 지금은 자가 호흡을 하게 됐지만, 아직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된 수희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수희야, 괜찮을 거야. 의사도 곧 깨어날 거라고 했어.”
뒷말은 수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 말이 수희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이성을 잃어버린 수희가 이불을 걷고 침대를 벗어났다.
그 탓에 팔에 꽂고 있던 기다란 링거 줄이 팽팽히 땅겼고, 가느다란 링거 지지대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갑작스러운 수희의 돌발 행동에 철용이 쓰러진 링거 지지대를 바로 세웠다.
“수희야. 진정해. 너 방금 깨어났어.”
작은 움직임에도 수희는 숨이 차 크게 가슴을 헐떡거렸다.
“한승조 씨 어디 있는데.”
“나중에 봐도 되잖아. 의사가 너 무조건 안정 취해야 된다고 했어. 우선 네 몸부터 챙겨.”
어떻게든 수희를 달래 보려 했지만, 수희는 쓰러질 것처럼 허리가 굽어졌다.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수희야.”
“나 때문에 한승조 씨가 그렇게 됐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결국 자리에 주저앉은 수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오빠, 제발.”
차디찬 바닥의 냉기가 손끝을 파고들어 왔다.
“지금 내가 한승조 씨 못 보면 죽을 것 같아.”
사시나무처럼 덜덜 떠는 수희를 보니 철용은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철용이 주저앉아 있는 수희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건너편 병실에 입원해 있어.”
띠. 띠. 띠.
규칙적인 심전도 그래프가 그의 심장이 아직 멈추지 않았음을 알려 주었다.
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게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철용은 조용히 병실을 나와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혼자 남은 수희가 덩그러니 서서 승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으로 승조의 손을 붙잡았다.
수희의 손이 따뜻한 걸까, 승조의 손이 차가운 걸까.
온기를 잃어버린 그의 손끝을 꽉 쥐어 보았다.
“한승조 씨.”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놓쳐 버렸던 애란이 떠올라 눈물이 잔잔하게 솟구쳤다.
“한승조 씨, 일어나 봐요.”
자신 때문에 떠났던 애란처럼, 그 역시 자신 때문에 잃게 될까 두려웠다.
그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간절하게 말해 보아도 그는 여전히 숨만 쉴 뿐이었다.
가느다랗게 앓는 울음소리가 잇새를 빠져나왔다.
혹여 의식을 잃어버린 그가 꿈속에서라도 들을까 울고 싶지 않았다.
“나 당신이랑 약속 지켰잖아.”
그러나 그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정신 잃지 않겠다고, 그 약속 지켰잖아.”
그러니까 제발 눈 떠.
“나 살아 있는 거 봐야지.”
“…….”
“나 괜찮은 거 봐야지.”
나 하나도 안 괜찮아.
내가 숨 쉬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괜찮아.
“왜 당신이 이러고 있어.”
결국, 접힌 무릎에 수희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뚝뚝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잡은 승조의 손은 놓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당신이 이렇게 있어.”
전부 다 제 탓이다, 모두 다 나의 잘못이라 생각하며 수희는 자신을 상처 냈다.
자신의 존재가 그랬다. 연기를 그만두라던 어머니를 죽게 하고, 이젠 승조까지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된 거야.”
흐느끼는 수희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끊임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 턱 끝에 맺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희는 병실의 문이 열리는 것도 모른 채 승조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었던 수희의 어깨가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들어 올린 시선에는 눈물막이 쳐져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다.
막 눈물을 흘려보내자 처음 보는 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어깨가 붙잡힌 수희가 남성의 우악스러운 힘에 바닥에 쓰러졌다.
몸이 아래로 엎어지는 바람에 옆에 세워진 링거대까지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다짜고짜 수희를 밀쳐 낸 남성은 목에 시뻘건 핏대를 세웠다.
“네가 어디라고 여길 와!”
다그치는 목소리에 물기가 깔려 있던 눈이 바짝 메말랐다.
뉴스에서, 기사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수희에게 화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승조의 아버지, 한병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