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애원해도, 결국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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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애원해도, 결국엔
2022.08.23.
“네가 어디라고 여길 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수희가 링거대를 세운 뒤 옆에 있던 의자를 붙잡고 일어섰다.
역정을 내는 병호에게 첫인사를 건넬 만한 상황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 순간엔 그저 큰 죄라도 저지른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두꺼운 손을 뻗어 온 병호가 수희의 멱살을 움켜잡고 흔들어 댔다.
“TV에서 웃음이나 파는 너 살리겠다고 내 아들이 누워 있어. 고작 딴따라 하나 살리겠다고!”
병호는 이미 상처받은 수희의 심장을 아프게 후벼 팠다.
텅 비어 버린 심장 안에 검고 검은 덩어리가 자리 잡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한테 화나신 거 이해합니다. 그래도 밖에 나가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마 두 눈을 맞추지 못하는 수희의 정수리를 보고 있던 병호가 얼굴을 구겼다.
“뭐?”
머리를 들어 올린 수희가 제 뜻을 정확하게 밝혔다.
“저렇게 누워 있어도 다 듣고 있을 수 있어요.”
“…….”
“밖에서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쥐고 흔들면 겁이라도 먹고 도망칠 줄 알았건만, 수희의 두 눈은 더욱 또렷하게 빛났다.
꼿꼿이 세운 고개는 오히려 병호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병호가 수희의 옷깃을 바닥에 내던지듯 놓아주자, 바닥에 붙어 있던 두 다리가 주춤했다.
“그럼 네가 여기서 나가면 되겠네.”
검지로 병실 문을 가리킨 병호가 우뚝 서 있는 수희에게 윽박을 질렀다.
“썩 꺼져!”
승조의 옆을 지키고 싶었지만, 병호가 분개하니 더는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낸 수희가 병실을 나갔다.
등 뒤에 있던 병실 문을 닫고 나오자, VIP 병실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들과 눈이 마주쳤다.
간호사들은 수희의 눈을 피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병호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듣는 데엔 조금의 이의도 없었다.
제 아들이 다른 사람으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으니 분노를 조절하기 힘든 게 당연했다.
하지만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칼날처럼 자신을 쑤셔 오던 말들이 전부 괜찮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수희에겐 자신의 다친 마음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승조의 안위, 그가 깨어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
승조의 시간은 멈춰 있건만, 너무나 야속하게 또 하루가 흘렀다.
아무리 미워도 제 누나라고 걱정이 됐던 건지 주형이 수희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철용이 사과를 깎아 수희의 침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자 주형이 포크로 사과를 콕 집었다.
수희를 주는가 했더니 홀랑 제 입에 넣었다.
지켜보던 철용이 주형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타박했다.
“아픈 누나 먼저 챙겨야지! 네가 그걸 왜 먹어!”
“형! 나도 입이 있어!”
둘이 싸우자 침대에 앉아 있던 수희가 급히 말렸다.
“됐어. 주형이 먹으라고 해.”
철용은 포크로 사과를 찍어 수희에게 건넸다.
사과를 받아 들긴 했지만, 수희는 깨작깨작 끄트머리만 입에 넣었다.
“한승조였나? 누나 구해 준 형이 건너편 병실에 있는 그 형 맞지?”
승조의 이야기에 수희는 입술을 오물거리던 걸 멈췄다.
“……어.”
자그마한 수희의 대답에 주형이 감탄하며 사과를 아작 씹어 댔다.
“그 형 진짜 누나 사랑하나 보다.”
수희의 고개가 주형에게 돌아가자, 주형이 사과를 입에 문 채 떠벌렸다.
“그게 보통 사랑이야? 불 속에 뛰어들었는데.”
“…….”
“스태프가 올린 글 보니까 누나랑 그 형 나오자마자 바로 건물 무너졌다며?”
철용이 그만하라는 듯 팔꿈치로 등을 쿡 찔렀지만 주형은 멈추지 않았다.
“까딱하면 같이 죽는 건데 누가 거길 들어가. 못 들어가지.”
입 안에 가시가 돋아난 것 같아 수희는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수희가 포크를 내려 두자 철용이 걱정스레 물었다.
“왜 더 안 먹고. 밥도 몇 숟갈 안 떴잖아.”
“배불러. 그만 먹을래.”
수희가 발밑에 깔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시간도 늦었는데 둘 다 이제 가 봐.”
“밤에 배고프면 냉장고에 있는 죽이라도 먹어.”
“챙겨 줘서 고마워. 얼른 가 봐.”
철용은 끝까지 수희를 챙기고는 주형과 함께 병실을 나갔다.
이제 막 침대에 누우려던 찰나에 누군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뭐 놓고 갔어?”
수희의 목소리에 닫혀 있던 병실 문이 열리고 반가운 사람이 들어왔다.
“준영아.”
“제가 누나 쉬는데 방해한 거 아니죠?”
준영의 손에는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수희는 누우려던 몸을 바로 세우며 간이 의자를 눈짓했다.
“아냐, 어서 여기 앉아.”
지금 한창 촬영으로 바쁠 텐데 시간을 내준 준영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혼자 남게 된다면 승조의 생각에 잠길 테니 차라리 준영과 함께 있는 게 더 나을 듯했다.
과일 바구니와 꽃다발을 협탁 위에 올려 둔 준영이 간이 의자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요?”
“많이 좋아졌어. 숨 쉬는 것도 편해졌고.”
“사고 소식 듣자마자 오고 싶었는데 기자들 많을 것 같아서요.”
뉴스를 보자마자 병원을 찾아오고 싶었지만,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을 취소할 수가 없었다.
스케줄을 끝내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늦어, 오늘에서야 겨우 찾아올 수 있었다.
“바쁠 텐데 와 준 것만으로도 기뻐.”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였음에도 수희의 낯빛은 어둡기만 했다.
며칠 사이 많이 상해 버린 수희의 얼굴에 준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나 무서웠겠다.”
“……응?”
“그 불길 속에서 혼자 있었을 때요.”
“…….”
“너무 무서웠을 것 같아서요.”
만약 내가 누나 옆에 있었더라면, 누나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줬을까.
화염에 휩싸인 건물을 본 순간 수희를 잃을까 봐 겁이 났다.
수희가 승조와 함께 무사히 건물을 빠져나왔다는 말을 듣자 안도가 몰려왔다.
그 후에는 이기적이게도 수희의 옆에 있던 사람이 자신이기를 바랐다.
“괜찮아. 한승조 씨가 구하러 와 줬으니까.”
수희와 승조의 사이가 보통 연인들과는 다르다는 건 회식 때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수희의 마음의 방향이었다.
애석하게도 수희는 지금 그 누구보다 승조를 걱정하고, 승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줄 관심도 여유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승조 씨가 누나 정말 많이 사랑하나 봐요.”
“…….”
“목숨 바쳐서 구한다는 거, 쉬운 거 아니잖아요.”
준영이 지어 보이는 시린 미소 속에 담긴 의미를 수희는 알지 못했다.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쥔 수희가 가로로 길게 입술을 늘였다.
“오늘따라 그 말을 많이 듣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준영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늦었는데 가 볼게요.”
“벌써 가게?”
“더 있고 싶은데, 해외 촬영 있어서 곧 공항 가야 해서요.”
“그래? 그럼 얼른 가 봐야지.”
촬영만 아니었더라면 수희와 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다못해 내일이라도 들르고 싶었지만, 이틀 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입원해 있는 시간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은데, 도통 자신에게는 기회라는 게 주어지지 않았다.
병실 문을 열었던 준영이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운을 뗐다.
“누나.”
“응?”
말하라는 듯 수희가 준영을 빤히 바라봤다.
“나 필요하면 불러 줘요. 언제든지.”
누나가 나 불러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 찾아 줘요. 누나 옆에 나라는 사람도 있으니까.
덧붙으려는 많은 말들을 잘라 내며 준영이 입술 끝을 밀어 올렸다.
“그럴게.”
작게 끄덕이는 수희의 고갯짓에 준영이 뒤늦게 먼 길을 떠났다.
준영이 떠나자 병실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혼자 남으니 쓸쓸함이 밀려왔다.
넓은 병실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수희가 이불을 걷어 내고 밖으로 나왔다.
병실 문을 열자 건너편에 있는 승조의 방이 보였다.
승조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병호가 있을 수 있으니 망설여졌다.
다시 돌아서려던 수희는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 승조의 병실 앞에 섰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 채 천천히 병실 문을 밀어냈다.
점차 벌어지는 틈 사이로 병실 안을 둘러보다 병호가 없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히 병실 문을 닫은 수희가 링거대를 밀고 승조의 옆에 섰다.
어제보다 더 수척해진 것 같은 그의 얼굴에 수희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간이 의자에 앉은 수희가 어제처럼 승조의 손을 붙잡았다.
다행인 건 어제보다는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한승조 씨, 내 말 들리죠?”
“…….”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대답을 해 줄 것만 같은데, 승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승조의 손을 강하게 쥔 채 그를 탓하며 원망했다.
“나 좋아할 일 없다고 포기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고백해서 나 힘들게 했잖아요.”
“…….”
“그만큼 나 속 썩였으면, 나 놀라게 하는 거 그만해요.”
앞으로 고개를 숙인 수희가 승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 진짜 너무 무서워.”
당신이 떠나기라도 할까 봐.
차마 그 말을 뱉을 수 없어 떨리는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불 속에 혼자 남았을 때보다.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보다.”
“…….”
“지금이 더 무섭고 두려워.”
들이쉬는 숨에 심장이 아려 왔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는데.
또다시 눈물이 툭 터져 나왔다.
달달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승조에게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고개를 들어 올린 수희가 그의 얼굴을 눈에 새겨 놓으며 간절히 애원했다.
“부탁할게요. 나 혼자 두지 마요. 제발.”
그의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자신의 바람이 전해지기만을 빌었다.
그의 손이 점차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걸 느낀 건 하나의 소리가 이어진 후였다.
삐이이이이―
소름 끼치는 높은 기계음에 수희는 손에 힘이 풀렸다.
손아귀에 있던 승조의 손은 너무나도 쉽게 툭, 하고 침대 위로 떨어졌다.
덜컹, 하고 간이 의자를 밀어낸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늘 똑같은 곡선을 그리고 있던 심전도 그래프에 일직선이 그어졌다.
그의 심장이 멈춘 것이다.
머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숨은 쉬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리맡에 있는 비상벨을 누르는 것과 동시에 간호사와 의사가 밀고 들어왔다.
간호사가 재빨리 수희의 옆에 제세동기를 준비했고, 의사가 승조 위에 올라탔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놓인 수희의 팔을 붙잡은 한 간호사가 그녀를 뒤로 밀어냈다.
“환자분, 나가 계세요.”
먹먹한 귓가엔 간호사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점차 핏기가 사라져 가는 그를 바라보던 수희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버렸다.
“아아.”
안 돼. 안 돼.
바닥에 주저앉은 수희는 심장이 멈춘 승조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겨우 손으로 바닥을 밀고 일어선 수희는 이끌리듯 승조에게 다가갔다.
“한승조 씨, 한승조 씨!”
일어나야 해. 이렇게 가면 안 되잖아. 이렇게 쉽게 떠나면 안 되는 거잖아.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그를 목 놓아 불렀다.
가슴을 강하게 누르는 의사의 손에도 승조의 심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의사가 부르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마에 고인 땀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가슴을 있는 힘껏 눌러 대는데도 승조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들이 수희를 제지하며 병실 문 쪽으로 데려갔다.
문 바깥까지 밀려난 수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서 있을 힘도, 소리칠 힘도 없었다. 온몸을 가늘게 떨며 눈물만 흘려보냈다.
“아니야.”
바로 눈앞에서 그의 심장이 멎는 걸 봤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삶은 매번 그녀를 시험하는 듯했다.
아버지는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자신을 떠났고, 어머니는 제 눈앞에서 숨을 거뒀고, 이제는 자신을 구하려던 승조의 심장이 멈춰 버렸다.
가혹했다. 잔인했다. 네 삶에 행복은 바라지 말라는 것처럼 그마저 데려가려 했다.
“제세동기, 100줄 차지!”
급속도로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의사가 소리쳤다.
제세동기를 가슴에 가져다 댔지만, 흔들리던 곡선은 다시 가라앉았다.
삐이이이이―
마치 마지막을 알리듯 기계음이 수희의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