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한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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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한 침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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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한 침대에서
2022.08.30.
병원에 입원하는 내내 식음을 전폐했던 수희가 처음으로 식판을 비웠다.
숟가락을 내려 둔 수희가 자신의 배를 쓸어내리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잘 먹었다.”
철용이 접이식 식탁 위에 물잔을 내려놓았다.
“한 대표님이 깨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승조가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났다면, 수희가 그 전에 쓰러졌을 게 분명했다.
수희는 철용이 준 물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얼른 침대에서 벗어났다.
링거대를 끌고 가는 수희를 보고 철용이 눈이 동그래져서는 물었다.
“어디 가려고?”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수희가 건너편 방을 턱짓했다.
“한승조 씨 보러 가지?”
“물이라도 좀 더 마시고 가.”
“아까 마셨어.”
수희가 병실 문을 여는데 뒤늦게 무언가 떠오른 듯 철용이 손을 뻗었다.
“맞다, 너 오늘 퇴원인데. 몇 시에 퇴원할 거야?”
“아.”
승조가 깨어난 기쁨에 수희는 오늘 퇴원한단 사실도 잊고 있었다.
오늘 퇴원한다면 지금처럼 편하게 승조의 얼굴을 보러 다니지는 못할 것이다.
그의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승조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돌연 허리에 손을 짚은 수희가 얼굴을 구기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고, 갑자기 허리가 쿡쿡 쑤시네.”
“너 아까 오전에 의사 선생님 회진 돌 때는 아주 좋다며. 아픈 곳도 없다며.”
오전 회진을 온 의사에게 씩씩하게 아무 문제 없다고 한 게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꾀병이라도 좀 부릴 걸 그랬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수희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그랬었나?”
“그랬었지. 정확히 네 시간 전에.”
“몸이 갑자기 안 좋아졌나 봐. 막 기침도 나는 것 같고. 콜록!”
“오수희.”
“오빠가 나 대신 잘 말해 줘. 며칠만 더 입원해야겠다고.”
“수희, 너!”
철용이 자신을 붙잡기라도 할까 싶어 수희가 얼른 재빠르게 병실에서 달아났다.
뒤늦게 철용이 손을 뻗어 봤지만 아슬아슬하게 수희를 놓치고 말았다.
수희는 승조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벌써 시간은 9시를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못 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죽기 직전에 삶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고 하잖아요. 진짜 정신을 잃기 전에 과거의 일들이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진귀한 경험을 한 수희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승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야 옛날 일이 다 기억났다?”
“네, 전부요.”
“그럼 다친 나한테 다짜고짜 입 맞췄던 것도?”
그건 이미 진즉에 기억났지만, 지금까지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고는 절대 말 못 해.
“그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네.”
……완전 귀신.
거짓말이 승조에게 통할 것 같지 않자 수희는 자리를 피하는 수를 쓰려 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가 봐야겠다.”
그러나 승조는 수희의 모든 수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의자에서 막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수희의 손목이 승조에게 붙잡혔다.
“어딜 가려고.”
살짝 끌어당기는 힘에 수희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손을 놓아주면 그녀가 도망갈 걸 알기에 오히려 자신 쪽으로 당겼다.
바짝 당겨진 몸이 밀착하자 수희의 곧았던 시선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대답은 하고 가야지.”
“그런데 왜 말이 짧아졌어요?”
“말 돌리지 말고.”
승조는 수희가 빠져나갈 빈틈을 주지 않았다.
“전부 다 기억났으면 책임져야지.”
마른침을 삼킨 수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어떻게 책임져요.”
“그때 가져간 내 첫 키스, 다시 돌려줘야지.”
한순간에 얼굴을 붉힌 수희가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피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요.”
“나한테는 현재 진행형이야.”
수희의 턱 끝을 부드럽게 감싸 쥔 승조가 눈을 피하지 못하게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맞닥뜨린 그의 짙은 눈동자 속에 수희 자신의 모습이 담겼다.
도망치지도, 피하지도 못하게 하니 수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간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앞으로 비스듬히 기울던 허리가 멈칫대다가 앞으로 깊숙이 숙어졌다.
그리고 승조의 입술 위에 수희의 입술이 도장처럼 꾹 눌렸다 떨어졌다.
수줍게 맞닿은 입술에 떨림이 가득해 승조는 미미하게 입술을 들어 올렸다.
“이자까지 쳐줘야지.”
좀 더 닿고 싶은 마음에 승조가 침대 헤드에 기댔던 허리를 떼어 냈다.
“이자가 얼마나 되는데요?”
“내가 16년 동안 널 기다렸으니까.”
마치 머릿속으로 셈을 하듯 승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을 과연 숫자로 매길 수 없다는 듯 금방 결론을 내렸다.
“아마 오늘 밤새 입을 맞춰도 모자라겠지.”
“…….”
“그러니까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잠깐의 입맞춤만으로도 빨갛게 물든 수희의 입술에 승조의 엄지가 닿았다.
“어차피 오늘 안에 다 갚지도 못하잖아요.”
불평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승조가 피식 웃었다.
“채무자가 열심히 채무를 이행하면 채권자 마음이 조금 바뀔 수는 있지.”
새벽에 닳도록 지분거린 수희의 입술을 엄지로 눌러 버렸다.
도톰한 입술이 손가락 밑에 깔리자 옆으로 기다랗게 입꼬리가 늘어났다.
실컷 입을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질리려면 한참 남은 것 같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라도 너와 입을 맞추고 싶은 걸 보면 말이다.
이번에는 그가 허리를 굽혀 수희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에 긴장한 어깨가 아래로 내려앉았다.
입술 위를 훑고 지나가는 달뜬 숨결에 수희의 잇새가 벌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그의 입술이 더욱 깊게 맞물렸다.
제 안으로 가득 들어차는 그의 숨결이 너무나 뜨거워 델 것만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히 입을 맞추는 것뿐인데, 온몸이 전율에 휩싸인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뜨거워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고개를 뒤로 물려야 했다.
나른한 그의 시선을 본 순간, 이 키스가 아직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말간 수희의 눈동자에 설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채권자 마음이 조금 바뀔 것 같아요?”
“지금은 그래.”
나긋한 그의 음성은 깊은 동굴 안을 휘젓다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커다란 승조의 손이 수희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사르르 감기는 수희의 눈꺼풀에 승조의 눈이 따라 감겼다.
***
수희가 사고를 당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VTV 방송국의 가장 넓은 회의실 안에 사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촬영 스태프들과 임 감독, 강은채가 디귿자 모양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임 감독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고 화정이 들어왔다.
갑자기 나타난 화정에게 사람들이 의문의 시선을 던졌다.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은 화정이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다들 의아할 거예요. 내 촬영분도 아니었는데 내가 여기 나타나서.”
팔짱을 낀 화정이 유일하게 비어 있던 은채의 옆자리에 앉았다.
화정은 잔뜩 긴장한 은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우리 딸들 첫 촬영이라 나도 그날 찾아갔었어요.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멀리서 지켜만 봤고요.”
임 감독은 손뼉을 쳐 사람들의 시선을 가져갔다.
“어제 경찰에서 연락받았어요. 일주일 전에 일어난 사고의 원인이 밝혀졌다고요.”
잠잠했던 주변이 한순간에 떠들썩해졌다.
임 감독은 목소리를 높여 경찰의 말을 전했다.
“건물 뒤편에서 피운 담배로 인해서 자재에 불이 붙어 일어난 화재라고 합니다.”
화재의 원인이 밝혀지자 은채가 잔뜩 겁이 질린 얼굴로 이를 달달 떨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버린 은채는 임 감독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내가 촬영 전에도 말했어요. 촬영 전에는 절대 근처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을 뻔했어요.”
잔뜩 화가 난 임 감독의 얼굴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묵묵히 눈동자만 굴렸다.
방영 날짜까지 정해졌으니 어서 촬영에 들어가야 마땅했다.
그러나 주연 배우가 아직 병원에 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아마 다음 주 중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경찰이 심문할 겁니다.”
일주일 동안 조용하기에 은채는 이대로 지나가는 줄로만 알았다.
사실 처음에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원인이 확실히 밝혀진 지금은 온전히 자신의 탓을 숨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전에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다들 불렀습니다.”
임 감독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피웠던 사람이 있다면 사실대로 밝히세요.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한다면 조용히 넘어가겠습니다.”
절대, 절대 밝힐 수 없었다.
승조가 수희를 불길 속에서 데리고 나온 것을 한 스태프가 인터넷에 올리면서 그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말한다면, 이 중 한 명이 또다시 인터넷에 떠벌릴 게 분명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만들어 온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하고 말 것이다.
범인인 은채가 입을 닫자 주변이 싸늘할 만큼 고요해졌다.
“그럼 건물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본 사람은 없습니까?”
쿵, 쿵, 쿵.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살갗을 뚫고 가시가 솟아날 것처럼 온몸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훅훅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은채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없다. 손을 들거나, 안다고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골치가 아픈 듯 임 감독이 머리를 벅벅 긁어 댔다.
“정말 아무도 못 봤어요?”
다시 묻는 말에 이번에는 스태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은채가 건물 뒤편으로 가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스태프들이 건물 안으로 사라졌을 때 이동했으니까.
한시름 걱정을 덜어 놓은 은채가 움켜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혹시나 생각나는 게 있으면 나한테 개인적으로 연락해요. 다들 해산.”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으니 회의를 계속하는 건 시간만 축내는 일이었다.
아무런 수확도 없이 이대로 긴급회의가 마무리되었다.
회의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고 나서도 은채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긴장을 한 터라 자리에서 일어서면 몸이 휘청하고 흔들릴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회의실을 전부 빠져나간 줄 알았던 은채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책상을 짚은 손을 밀어내며 상체를 세우는데, 회의실을 나가지 않고 남아 있던 화정이 문을 닫아 버렸다.
회의실 안에 둘만이 남게 되자 은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화정을 바라봤다.
“선배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싱긋 웃은 화정이 은채에게 걸어갔다.
또각또각 바닥을 짓이기는 구두 소리가 은채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왜 아무 말 안 했니?”
“네? 뭐, 뭘.”
화정이 은채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손에 쥐고 있던 선글라스의 다리로 은채의 어깨를 쿡쿡 쑤셨다.
“네가 건물 뒤로 가서 담배 피운 거 말이야. 왜 말하지 않았냐고.”
화정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은채가 건물 뒤로 갔다는 것도, 그곳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화정의 눈이 그랬다. 거짓말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는 눈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질려 버린 은채가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아, 알고 계시면서 왜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화정은 뾰족한 선글라스 다리로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평소 후배들에게 다정하기로 유명하던 화정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름이 끼칠 만큼 사악한 미소가 이화정의 본모습이었다.
“네가 나한테 꽤 쓸모 있는 장기짝이 될 것 같아서.”
“…….”
“아니지, 쓸모가 없어도 있어야 할 거야.”
고개를 앞으로 숙인 화정이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똑똑히 은채에게 전했다.
“이 바닥에서 계속 붙어먹고 싶으면 말이야.”
겁주는 게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겁에 질린 은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화정에게 물었다.
“저,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뭔데요?”
“너랑 나랑 협력하면 한 사람 정도야 완전히 몰락시킬 수 있겠지.”
화정의 새빨간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오수희를 망가트릴 거야.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엉망진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