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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다시 만난 아빠 (62/118)


62. 다시 만난 아빠
2022.09.03.


의사가 며칠 더 입원을 권고했지만, 승조는 깨어난 지 사흘 만에 퇴원 준비를 했다.

어제 철용에게 이끌려 수희가 퇴원했으니 더 병원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차 비서는 병원복을 벗는 승조에게 와이셔츠를 건넸다.

와이셔츠를 입는 승조의 왼팔에는 흰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다.


 


“화상 자국은 흉터가 남는다고 하던데 괜찮으십니까?”

“상처쯤이야 상관없어. 안 괜찮을 것도 없고.”

타오르는 불을 팔로 막다 보니 옷깃에 불이 붙어 화상까지 입고 말았다.

그래도 수희가 무사하니 이 정도 상처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신 상처가 남은 걸 알게 된다면 수희가 신경 쓸 테니 비밀에 부쳐 두었다.

와이셔츠 구멍에 단추를 끼우고 있는데, 짤막한 노크 후 병호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차 비서는 승조가 입을 재킷을 침대 위에 올려 두고 눈치껏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승조가 옷깃을 정리했다.


“오셨습니까?”

자신을 반기지 않는 모습에도 병호는 아들이 깨어났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네가 날 얼마나 놀라게 한 줄 아니? 네가 일어났다는 소식 듣고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어.”

가슴 절절한 병호의 말에도 승조는 도리어 조소를 흘렸다.

예상치 못한 승조의 싸늘한 반응에 병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왜 웃는 거냐.”

병실의 분위기는 살얼음판과 닮아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여전히 비틀어 올린 입꼬리를 내리지 않은 채 승조가 말을 이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을 느낀 사람치고는 너무 늦게 찾아오신 거 아닌가 해서요.”

승조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벌써 사흘이었다.

진즉 병원에서 승조가 일어났다는 걸 알렸을 텐데, 지금에서야 승조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의사한테는 매일 네 상태를 전해 듣고 있었어. 일만 아니었다면 네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날 바로 찾아왔을 거다.”

그러나 구구절절한 호소가 승조에게 먹힐 리 없었다.

새삼 이제 와 병호에게 실망감을 느낄 나이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매번 변명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벌써 병호와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빨리 끝맺고 싶어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가 이번에 얼마나 무모한 짓을 했는지 잘 알겠지.”

가르치려 드는 병호에게 승조는 한숨 섞인 말을 뱉어 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무모한 짓이라고 하는 건 아버지밖에 없을 겁니다.”

“굳이 네 몸 던져 가며 구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야.”

“저한테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붉어진 얼굴로 병호가 삿대질했다.


“그깟 애 하나 죽는다고 네 인생이 크게 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만하시죠.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사는 일도 이제 지칩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입하고, 듣지 않으면 다그치는 게 일상이었다.

재킷을 팔에 걸친 승조가 병호를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삭인 병호가 몇 번이나 다짐한 말로 겁을 주었다.


“그래. 내가 네 연애질까지는 간섭하지 못한다는 거 인정하마.”

“…….”

“하지만 결혼은 절대 안 된다. 그 천한 아이가 우리 집에 발 들여놓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거야.”

등 뒤에 꽂히는 날이 선 말에도 승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병실 문을 연 승조가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말하는 그 연애질로 바빠서 아직 결혼까진 생각 안 해 봤네요.”

아직 병호가 안심하긴 일렀다.

승조가 병실 문을 붙잡은 검지를 툭툭 두드리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늦지 않게 고려해 봐야겠네요.”

“…….”

“아버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포기시키려면요.”

“너, 이!”

병호가 욕을 입속에서 짓이겼지만, 승조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병실 문을 닫고 나갔다.

홀로 병실에 남은 병호가 승조를 쫓아 나갔지만 이미 따라잡기엔 저만치 멀어진 후였다.

***

수희가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촬영은 재개됐다.

밀린 촬영분을 찍기 위해 촬영팀과 배우들은 밤낮 할 것 없이 고군분투했다.

집에 들러 잠깐 눈 붙일 시간조차 없어, 옷만 갈아입고 나와 차에서 자기 일쑤였다.

매일 이런 일정이니 승조와 만날 시간을 도저히 낼 수가 없었다.


[오늘 촬영 일찍 끝나면 만날까?]

승조에게서 온 메시지에 수희가 운전 중이던 철용에게 물었다.


“오빠, 나 오늘 밤에는 촬영 없지?”

룸미러로 수희를 건너본 철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오전 촬영만 있지. 왜? 한 대표님 만나게?”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지 못한 수희가 승조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아요. 저녁 같이 먹어요.]

저녁 약속을 잡고 나서야 수희가 휴대폰을 핸드백 안에 집어넣었다.


“나 퇴원하고 한승조 씨 못 본 지 좀 됐잖아. 같이 저녁 먹으려고.”

“내일은 늦게까지 촬영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걱정 어린 조언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수희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아.”

의미 없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던 수희의 몸이 앞으로 쑥 기울었다.

창가에 바짝 붙은 수희가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철용을 다급히 불렀다.


“오빠! 멈춰!”

“어?”

“잠깐 멈춰 봐. 어서.”

핸들을 옆으로 돌린 철용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자 철용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수희는 창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안전띠를 풀고 밴에서 뛰어내렸다.


“오수희! 어디 가!”

창문을 연 철용이 수희에게 소리쳤지만, 수희는 밴에서 점차 멀어지기만 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수희를 눈으로 흘겼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인도의 중심에 선 수희는 자신이 본 사람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곳에, 이 자리에 있었건만, 어디에도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수희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거리를 분주히 파헤쳤다.

왠지 조금만 더 찾으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이상하게도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수희의 주위로 모여드는 순간이었다.


“수희야.”

갓길에 차를 세운 철용이 클랙슨을 울리자 수희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의 휴대폰이 자신을 향하자 더는 길 위를 헤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선 수희가 철용이 세워 둔 밴에 올라탔다.

철용은 순식간에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사이드미러로 바라봤다.


“갑자기 말도 없이 차에서 내리면 어떡해.”

“…….”

“아는 사람이라도 본 거야?”

혼이 나간 사람처럼 수희는 흘러가는 창가 풍경들만 멍하니 눈에 담았다.

창가에 꽂혀 있던 시선을 앞으로 가져온 수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빠, 아빠를 봤어.”

가정을 버리고 사라졌던 아빠.

그래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아빠가 눈앞에 나타났었다.

10년이나 흘렀건만 단 한순간에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허무하게 놓쳐 버렸으니, 다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해야 했다.

***



“NG!”

힘이 가득 들어간 임 감독의 목소리에 수희가 이마를 붙잡았다.

이제껏 촬영하면서 NG를 낸 적이 없었건만 자꾸만 외웠던 대사들을 버벅거렸다.

벌써 세 번째 NG에 수희가 촬영팀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만 부탁드립니다.”

“왜 잘 하지도 않는 실수를 해.”

“다시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본을 말아 쥔 손을 흔들며 임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5분만 쉬었다가 다시 들어갑시다.”

연이어 허리를 숙였던 수희는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상대 연기자였던 화정이 기운 없는 수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희야, 오늘 무슨 일 있어?”

다정하게 건네 오는 말에 수희가 조심스레 입술을 떨어트렸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선배님한테 폐를 끼쳐서 죄송해요.”

“촬영이야 다시 하면 되니까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사적인 감정을 카메라 앞까지 끌고 오다니, 최악이었다.

애란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은 아빠였다.

자신의 앞에 나타나려고 했다면 진즉 얼굴을 드러냈을 것이다.

여태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걸 보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제 와 제 인생에 등장한 아빠 때문에 눈앞에 있는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희의 두 눈동자가 밝게 빛을 냈다.


“지금부터라도 실수 없이 제대로 해 볼게요.”

“갑자기 씩씩해졌네. 그래야 오수희답지.”

화정이 수희의 등을 토닥이며 스튜디오 한편에 서 있던 임 감독을 불렀다.


“임 감독! 촬영 들어가도 되겠는데?”

임 감독이 다가오자 수희가 두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아빠를 완전히 몰아냈다.

귓가에 맴도는 대사들을 정리한 수희가 화정의 앞에 섰다.

스태프들이 모두 자신의 자리로 향하고, 임 감독이 액션을 외치자 촬영이 재개됐다.

꽃처럼 활짝 웃어 보인 수희가 두 팔을 펼친 화정에게 안겼다.


“엄마.”

“그래, 우리 딸.”

다정한 모녀의 모습이 네모난 카메라 화면 안에 담겼다.

멀리서 보는 두 사람은 진짜 모녀지간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서로를 향한 미소가 똑 닮아 있었다.

이후 단 한 번의 NG 없이 자신의 촬영분을 모두 소화했다.

온 힘을 다해 연기한 탓에 수희는 스튜디오 밖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화정이 수희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들고 있던 물을 건넸다.


“오늘 수고했어, 딸.”

“감사합니다, 선배님.”

페트병 뚜껑을 연 수희가 분주하게 이동 준비를 하는 스태프들을 바라봤다.


“선배님은 다음 촬영 있으시죠?”

“응. 곧 가야 하는데 그이가 안 오네.”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지 화정이 손목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누구 만나기로 하셨나 봐요.”

“누가 여기로 오기로 했거든. 오수희 씨도 아는 사람일 텐데.”

“제가 아는 사람요?”

궁금증이 생겨난 수희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정이 힌트를 주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수희가 들고 있던 물을 입가에 가져다 대려던 순간이었다.

무심결에 스튜디오 문으로 돌린 시선을 다시 가져오지 못했다.

손아귀에 힘이 풀려 버리자 페트병이 바닥을 뒹굴며 울컥 물을 쏟아 냈다.

의자를 밀고 일어난 수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고요히 눈을 키웠다.


“왜…… 여기에.”

희미하게 퍼지는 목소리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닿지 못했다.

수희에게 오기까지 열 걸음도 채 남지 않았는데, 남자는 임 감독으로 인해 자리에 멈춰 서야 했다.

반갑게 임 감독이 먼저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남자를 수희가 있는 쪽으로 데리고 왔다.

수희는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처진 눈, 입가에 자리 잡은 깊은 주름.

세월이 흐른 얼굴은 10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푸근한 그때와 다름없었다.

임 감독이 남자를 대신해 소개했다.


“이분은 우리 드라마 <패밀리>를 집필해 주시는 김시운 작가님.”

김시운은 가명이었다. 진짜 이름은 오승만.


“반가워요, 오수희 배우님. 김시운입니다.”

수희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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