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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검은 속내 (63/118)


63. 검은 속내
2022.09.06.



 


“반가워요, 오수희 배우님. 김시운입니다.”

승만은 자신을 김시운이라고 소개하며 수희에게 악수를 청해 왔다.

수희가 알고 있는 승만의 직업은 시인이었다. 어렸을 땐 잠들기 전에 승만이 곧잘 자신이 쓴 시집을 읽어 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승만은 시인이 아니라 익명의 극본 작가의 탈을 쓰고 있었다.

승만은 사람들에게 수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반갑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승만의 손을 붙잡았지만, 떨리는 초점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수희가 손을 거두어들이자 지켜보고 있던 임 감독이 신이 나 말을 꺼냈다.


“김시운 작가님께서 직접 오수희 씨를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모셔 올 수 있게 됐어요.”

“제가 오수희 씨 작품은 전부 볼 정도로 오래된 팬이라서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저도 오수희 씨 덕분에 김시운 작가님을 실제로 만나 뵙네요.”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임 감독의 곁으로 조연출이 다가왔다.

촬영팀이 모두 이동 준비를 마쳤다고 전하자 임 감독은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전 촬영 때문에 이만 가 봐야겠네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독님.”

승만이 허리를 숙이자 임 감독도 따라 상체를 숙이며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수희의 옆에 서 있던 화정도 의자 위에 올려 둔 핸드백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얼굴 봤으니까 가 봐야겠네. 다음에 봐요. 김시운, 작가님.”

역시나 화정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승만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화정은 <패밀리> 작가와 친한 사이라고 알려 줬었다.

승만에게 희미하게 미소를 보인 화정이 임 감독의 뒤를 따라 스튜디오를 나갔다.

어수선한 스튜디오가 일순 조용해지고,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만 흘렀다.

10년 만에 수희의 앞에 나타난 승만은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수희에게 말을 건넸다.


“나한테 물을 말이 많지?”

“…….”

“시간 있으면 나가서 나랑 차 한잔하겠니?”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 왔다.

가장 승만이 필요하던 애란의 장례식에도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래 놓고 이제야 겨우 숨 좀 쉬며 살 것 같아지니 또다시 들쑤셔 놓으려 하고 있었다.

밀어내고 거부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승만에게 변명이라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미련하게 수희는 승만의 제안을 거절하질 못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몇 없는 카페를 찾아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희는 따뜻한 차가 담긴 잔을 매만지며 승만의 눈을 피했다.

승만은 오히려 그런 수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수희야.”

오랫동안 그리워한 것처럼 승만의 목소리는 따스하기만 했다.

햇살처럼 내려앉는 음성에 수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페에 들어오고 난 후 처음으로 수희가 자신을 바라봐 주자 승만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흐를 듯 눈동자 안에서 빙글 도는 눈물에 수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희야.”

“…….”

“아빠가 그동안 미안했다.”

결국 차오른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수희는 얼어 버리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 보는 승만의 눈물에 하려던 말도 입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너한테 꼭 이 말 하고 싶었다.”

승만이 크게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 울음을 참아 냈다.

고개를 수그리자 동그란 안경에 눈물방울이 동그랗게 떨어져 내렸다.

말없이 수희가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를 건네자 승만이 손을 뻗어 받아 들었다.


“너한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

휴지로 눈물을 훔치는 승만에게 수희가 물었다.


“왜 그동안 나타나지 않은 거예요?”

“…….”

“전 그때 열일곱 살이었지만, 주형이는 열두 살이었어요.”

애란은 승만이 집을 비운 시점부터 늘 술로 밤을 지새웠다.

승만의 이야기를 꺼내면 분개하며 소리 지르기 일쑤였기에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했다.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매일 밤을 보냈다.

그 눈물이 바다를 이룰 만큼 턱 끝에서 넘실댔을 때, 그때부터 두 사람은 금기어처럼 더 이상 승만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주형이가 얼마나 아빠를 따랐는지 잘 알잖아요.”

“알지, 다 알고 있어.”

승만과 대화를 하면 조금의 실마리는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수희는 오히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승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후회하고 울 거면서, 왜 자신의 앞에 이제야 나타난 걸까.


“알면서 어떻게 연락 한 번을 안 해요.”

“…….”

“사라질 때도 마음대로 사라져 놓고, 왜 나타나는 것도 아빠 마음대로예요?”

날 선 말이 자신에게 돌아오자 승만은 한참 동안 망설이기만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 모습에 수희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캐물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라도 있었어요?”

“……그게.”

“뭔데요. 말해 줘요.”

어떤 사정이 있든 수희는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다.

수희가 재촉하자 승만이 한참을 망설이다 운을 뗐다.


“……네 엄마한테 남자가 있었어.”

철렁하고 심장이 저 바닥끝까지 내려앉았다.

처음 안 사실에 수희는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턴 도저히 네 엄마랑 살 수가 없더구나.”

“…….”

“어떻게 자식을 두고 내가 마음이 편했겠니. 어떻게 안 보고 싶었겠어.”

가슴 절절한 호소를 하듯 승만의 말끝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땐 너희보다 내가 우선이었어. 내가 먼저 날 돌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더구나.”

10년 동안 숨겨 놓았던 속내를 밝힌 승만은 조금이나마 후련해 보였다.


“그래서 너희 곁을 떠났어. 스스로 너희 아버지이길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야.”

자신의 죄에 대해 속죄하듯 승만은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너 혼자 둬서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한 승만이 두 손을 테이블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찻잔을 붙잡고 있던 수희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마른 가지처럼 승만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니?”

“…….”

“네 엄마 빈자리를 이 아빠가 대신하고 싶어.”

방대하게 흘렸던 눈물이 이제는 다 말라 버렸기 때문일까.

이제야 용서를 구하는 승만에게 늦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은 손이 너무나 간절해 밀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이 받은 상처의 그 끝자락만 헤아려 줬을 뿐인데, 뾰족하게 솟아났던 모난 마음이 한순간에 무뎌졌다.

어떻게 아빠라는 존재를 버릴 수 있을까.

기억 속에 있는 아빠는 그녀의 버팀목이자, 묵묵히 딸을 응원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승만의 사과가 더 가슴 깊이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

수희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승조는 자신의 옆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수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만나러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묻기도 했다.


“수희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수희가 고개를 잘잘 저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화에 집중도 못 하고.”

승조와 만났으니 승만에 대한 일은 잊고 싶은데,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답답함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어 오전에 있었던 일을 전부 그에게 밝혔다.

꽤 긴 과거사에 차가 수희의 집 앞에 세워질 때까지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한참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승조가 중학교 시절에 만났던 승만을 떠올렸다.


“기억나. 가끔 아버님이 널 데리러 학교에 찾아왔었잖아.”

가끔 수희의 귀가가 늦어질 때면 승만이 학교 운동장으로 찾아오곤 했었다.


“맞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빠가 말도 없이 떠날 줄은 몰랐죠.”

“…….”

“이렇게 날 놀라게 해줄 줄은 더더욱 몰랐지만.”

끔찍하게 자식을 아끼던 사람이었다.

유년 시절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승만이 함께했었다.

그리 거창한 것을 하지 않아도 가족과 함께 있다면 행복하다는 것. 그걸 승만이 알려 줬다.

쌓아 둔 유대 관계가 결단코 얄팍하지 않기에, 승만의 사과에 서운했던 감정들이 사그라들었다.


“네 마음 이해해. 나도 지금은 아버지랑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지만, 한때는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으니까.”

중학교를 거쳐 성인이 된 지금까지 병호에게서 방치되어 자라 왔다.

아버지의 존재를 필요로 하던 시기에는 매일같이 병호를 그리워했었다.

만약 병호가 승만처럼 단 한 번의 사과라도 건넸더라면, 감정의 골이 지금처럼 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한테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싶어요.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10년 만에 나타난 건데, 저 속도 없는 거 같죠?”

“그런 생각 하지 마.”

수희에게 완전히 상체를 튼 승조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부드럽게 수희의 뒷머리를 쓸어내린 승조가 한없이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네 선택이 어떻게 됐든 난 널 응원할 거야.”

두 눈을 꼭 감은 수희가 승조의 등을 끌어안았다.

커다란 품에 안기자 종일 시끄러웠던 머릿속이 아주 잠깐이나마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난 그냥,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할 뿐이야.”

애란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동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승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수희가 상처받지 않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다.

만약 지금 그녀의 안식을 앗아 간다면, 승조는 아마 가만히 지켜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

그 시각.

늦은 촬영을 마친 화정이 피곤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현관에 놓여 있는 갈색 구두 한 켤레를 보자 화정의 얼굴에 화색이 맴돌았다.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건 실로 오랜만이기에 한달음에 복도 끝에 있는 서재로 향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벌컥 열어젖힌 화정이 핸드백을 바닥에 던져두고 책상 앞으로 갔다.


“드디어 나 보러 와 준 거야?”

어두운 방 안에서 탁상 조명 하나만 켠 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내일 옷 가지고 다시 작업실로 갈 거야.”

무뚝뚝한 남자의 말에 화정이 시무룩한 티를 팍팍 내며 볼멘소리를 냈다.


“작업만 들어가면 나한테 소홀해지는 거 알아? 나 진짜 서운해.”

화정이 우는소리를 내고 나서야 남자가 노트북에서 손을 떼어 냈다.

쓰고 있던 동그란 안경을 끌어 올린 남자의 뒤로 화정이 섰다.


“오랜만에 부녀 상봉하니까 어땠어? 설마 울기라도 하면서 미안하다고 한 거 아니지?”

화정은 딱딱하게 굳은 승만의 어깨를 직접 손으로 풀어 주었다.


“응? 승만 씨, 무슨 이야기했는데.”

대답을 재촉하는 물음에 수희의 아버지 승만이 화정의 손을 쓸어내렸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수희의 손을 잡았던 그 손이었다.


“그동안의 일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지.”

“그래서, 수희가 용서해 준대?”

“10년 만에 만난 아빠를 그렇게 용서하기 쉽나. 그래도 흔들리는 눈치였어. 제 엄마한테 받은 상처를 내가 많이 보듬어 줬으니, 지금 내 품이 가장 필요할 거야.”

입술을 씩 들어 올린 화정이 농염한 손길로 승만의 어깨를 문지르듯 주물렀다.

뻐근한 어깨가 풀리자 승만이 의자에 기대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당신은 참 사악해. 그 점을 공략하는 거야?”

“내가 살려면 그래야지. 지금은 그 수밖에 없잖아.”

두 팔로 승만의 목을 끌어안은 화정이 승만의 어깨에 턱을 괬다.


“우리 딸 어쩌나.”

“…….”

“아빠한테 이용당한 걸 알면 나중에 땅을 치고 울겠네.”

화정의 눈은 울고 있었지만 입은 길게 늘어나 있었다.


“그땐 당신이 옆에 있어 줘. 그러라고 내가 수희랑 붙여 준 거니까.”

이전에 오수희와 연기하고 싶다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승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받을 상처가 걱정돼 화정에게 엄마 역할을 던져 주며 수희의 옆에 꽂아 뒀다.


“선배로서 오수희 멘탈 케어해 주라는 거지?”

승만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 화정이 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당신의 그 모순적인 모습도 참 마음에 들어.”

그런데 당신 딸을 나한테 부탁하면 안 되지. 난 오수희를 완전히 망가트려 놔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후후. 소리 내 웃는 화정의 목소리가 사방이 어둑한 서재 안에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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