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드러나는 진심
(64/118)
64. 드러나는 진심
(64/118)
64. 드러나는 진심
2022.09.10.
“컷. 이어서 다음 신 촬영하겠습니다.”
임 감독의 목소리가 끼고 있던 이어폰 안으로 흘러들어 오자 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촬영을 마친 은채가 촬영을 위해 걸음을 옮기는 수희의 앞을 막아섰다.
“수희야, 오늘 시간 되면 저녁 먹을래?”
눈썹을 들어 올린 수희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어쩌지. 오후에 추가 촬영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은데.”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수희에게 쏟고 싶지는 않았다.
최대한 수희와 큰 접점 없이 드라마 촬영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화정에게 협박을 당한 이후, 은채는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오수희랑 친해져. 그래야 뒤통수를 치지.”
화정은 무슨 방법을 쓰든 수희와 친해질 것을 지시했다.
수희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건 은채도 찬성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거슬리는 수희를 치워 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화정은 뭐 때문에 수희를 추락하게 만들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어도 약점을 잡힌 입장이니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같이 저녁 먹자.”
“응. 시간 될 때 내가 말해 줄게.”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은채가 수희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바라봤다.
“그런데 촬영할 때마다 이어폰 끼고 있던데 뭐 듣는 거야?”
사실대로 말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대충 둘러댔다.
“그냥. 노래 듣고 있었어.”
“음. 그래?”
보통 촬영 전에는 대본을 읽고 있지 노래를 듣는 배우들은 잘 없었다.
수희도 손에 대본을 쥐고 있었지만, 대본을 읽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긴 대사도 한 번의 실수 없이 이어 갈 정도니 분명 대본이 닳고 닳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희가 들고 있는 대본은 지나치리만큼 깔끔하기만 했다.
“배우님, 촬영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곁으로 조연출이 오자 수희가 들고 있던 이어폰을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카메라 앞에 선 수희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역시나 거침없는 연기를 펼쳤다.
마치 모든 게 계획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연기였다.
수희의 연기에 넋을 놓고 있던 은채가 뒤늦게 의자 위에 놓인 이어폰을 바라봤다.
스태프들은 촬영 중인 수희에게 모여들었기에, 은채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촬영 내내 어떤 노래를 듣는 건지 궁금했다.
마른침을 삼킨 은채가 의자 위에 있는 이어폰을 얼른 귀에 꽂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올려 잠금 화면 위에 뜬 파일을 재생시켰다.
당연히 음악이 흘러나올 거라 여겼던 은채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가늘게 눈을 떴다.
‘뭐야, 이건?’
미간을 찌푸린 은채가 이어폰 밖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그거, 수희 누나 휴대폰 아니에요?”
흠칫 놀란 은채가 귓구멍에서 얼른 이어폰을 뽑아냈다.
몸을 크게 돌린 은채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준영과 눈이 마주쳤다.
목구멍에 딸꾹질이 걸린 은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어폰과 휴대폰을 제자리에 내려 두었다.
“준영 씨 촬영은 조금 전에 끝나지 않았어요?”
“왜 다른 말로 돌리세요? 들고 있던 거 수희 누나 휴대폰 아니냐고요.”
날카로운 준영의 지적에 은채는 마른침을 연달아 삼켜야 했다.
“내 휴대폰 배터리가 없어서 수희한테 휴대폰 좀 쓴다고 했어요.”
“매니저분 휴대폰 쓰셔도 됐을 텐데요.”
당황한 건 아주 잠깐이었다. 은채는 도리어 큰소리를 내며 당당하게 나왔다.
“하! 휴대폰 빌린 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돼요? 왜 기분 나쁘게 추궁이에요?”
은채의 목소리가 커지자 촬영팀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다.
은채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기에, 준영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괜히 촬영장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제가 오해한 것 같네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중한 사과에 은채는 과도하리만큼 화를 낸 게 민망해졌다.
“뭐……. 생각해 보니까 오해할 수도 있었겠네요.”
“보통 휴대폰을 쓸 때 상대방 이어폰까지 빌려 끼지는 않으니 제가 오해했네요.”
방심하고 있던 은채는 속이 뜨끔하고 찔렸다.
“여기가 좀 시끄럽잖아요.”
“그런가요?”
은채의 말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촬영 중이라 모든 스태프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는 촬영 끝나서 가 볼게요.”
괜히 더 있다가는 준영에게 말릴 것 같아 은채가 급히 자리를 옮겼다.
빠르게 다리를 움직이던 은채의 귓가에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맴돌았다.
수희가 듣고 있던 건 노래 같은 게 아니었다.
한 남자가 오늘 촬영할 대본을 읊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목소리는 확실하지 않지만 한 남자를 떠올리게 했다.
드라마 <패밀리> 제작사 대표이자 오수희의 연인.
‘한승조 대표.’
***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예정된 마지막 촬영을 끝낸 수희는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임 감독 뒤에 놓인 의자로 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때마침 승조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수희가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받는 거 보니까 촬영 끝났나 보네?]
“방금 끝났어요. 승조 씨는요? 일 끝났어요?”
[나도 방금 끝났어.]
수희는 휴대폰을 귓전에서 떼어 내며 액정에 찍힌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서 이제 막 7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은채와 저녁 약속을 잡았을 텐데, 일찍이 촬영을 끝낸 은채는 이미 촬영장을 떠난 후였다.
휴대폰을 귓가에 붙인 수희가 승조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이 굳어 버렸다.
“승조 씨, 나중에 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알겠어. 전화 기다릴게.]
통화를 끊자 맞은편에 있던 승만이 수희의 곁으로 걸어왔다.
“촬영 늦게까지 하느라 수고했다.”
가을바람이 유난히도 시린 탓인지 승만의 코끝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얇은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승만을 보고 수희는 심장이 찌릿했다.
“저 기다리신 거예요?”
“네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갈까 했는데, 네가 연기하는 모습 보니까 발길이 안 떨어지더구나.”
희미하게 입술을 들어 올리는 승만의 눈에 기쁨이 차올랐다.
“언제 이렇게 우리 딸이 컸나 싶어서 계속 보고 있었어.”
갑자기 기억 속에 깊숙이 묻어 두었던 추억 한 장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100점짜리 시험지를 가지고 오자, 수희를 품에 안으며 승만이 “우리 딸, 장하다” 하고 칭찬을 해 줬었다.
그 품이 너무나 따스해 자꾸만 안기고 싶어 더욱 열심히 공부에 집중했었다.
문득 떠올라 버린 그 기억 하나에 수희의 심장이 뜨겁게 울컥거렸다.
“다 보셨으면 가시면 되잖아요.”
약해지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수희가 모질게 말했다.
“너만 괜찮다면 저녁 같이 먹지 않겠니?”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녁은 따로 먹을 사람이 있다고 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오므라이스 좋아하니?”
“…….”
“아빠가 만들어 주는 오므라이스 네가 아주 잘 먹었는데.”
오므라이스는 애란이 약속으로 집을 비우는 날이면, 승만이 곧잘 해 주던 음식이었다.
별다른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승만이 해 주는 오므라이스는 늘 특별하게 느껴졌었다.
“……이제 오므라이스 안 좋아해요.”
승만이 가족의 곁을 떠나고 난 후 수희는 더 이상 오므라이스를 먹지 않았다.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오므라이스만 보면 승만이 떠올라 늘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추억이 깃들어 있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수희가 발길을 돌렸다.
“저 가 볼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봐.”
승만은 수희를 붙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수희는 몸을 틀어 시선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발걸음을 아무리 옮겨 보아도 등 뒤로 승만의 눈길이 느껴졌다.
찬 바람을 맞아 빨개진 코와 손끝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매몰차게 돌아섰건만 몇 걸음 더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우뚝 멈춰 섰던 수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어 보아도, 승만의 앞에 서면 다시금 무너져 내렸다.
뒤로 돌아서자 수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승만과 눈이 마주쳤다.
“오므라이스 말고 다른 건 먹을 수 있어요.”
수희가 건네는 말에 승만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뭐든 만들어 주마.”
그 미소를 보자 수희의 딱딱했던 심장이 말랑해지는 듯했다.
10년을 아파하고 힘들어했음에도, 햇살 가득한 미소에 얼었던 마음이 녹고 말았다.
***
촬영장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승만의 작업실이 있었다.
깔끔한 승만의 성격대로 작업실에는 인테리어 소품 없이 가구들만이 공간을 채웠다.
거실에 있는 손님용 식탁에 앉은 수희가 벽면을 채운 책장을 바라봤다.
수많은 책들이 빈자리 없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그 앞에 승만이 작업하는 컴퓨터 책상이 놓여 있었다.
“별거 없지? 심심할 텐데 좀 둘러보고 있어.”
소매를 걷어붙인 승만은 주방에서 요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선 수희가 책장으로 가서 책들을 하나씩 꺼내 봤다.
손길이 깃들어 있는 책들은 많이 낡아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각거렸다.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어 보신 거예요?”
주방에서 통통통 재료를 써는 소리가 멈추더니 승만의 말이 넘어왔다.
“그럼. 드라마 작업 끝나면 책 읽는 게 유일한 낙이야.”
보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아 넣은 수희가 뒷걸음질 치다 책상에 다리를 부딪쳤다.
쿡 찔린 다리가 아려 와 몸을 트는데 책상 끝에 걸쳐져 있던 흰색 서류 봉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자연스레 바닥에 떨어진 서류 봉투로 시선이 내려앉았다.
허리를 숙인 수희가 의문의 서류 봉투를 들었다.
그대로 제자리에 올려 두려다 서류 봉투 위에 박혀 있는 글자에 움직임을 멈췄다.
‘서울양진병원.’
수희의 눈이 주방에 있는 승만에게로 향했다.
승만은 아무것도 모르고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래로 쏟아지는 바람에 뜯겨 있는 서류 봉투 입구 밖으로 종이들이 삐죽 나와 있었다.
의도치 않게 서류 봉투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종이의 윗부분을 읽게 됐다.
[간암 검진 결과 기록지]
굵게 적힌 글씨가 눈에 박히자, 수희가 종이를 밖으로 빼냈다.
위에 적힌 인적 정보는 승만의 것이 분명했다.
아래로 흘러내려 온 시선이 한 군데에 멈췄다.
[판정 및 권고]
사각형 칸 안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수희의 눈동자가 격하게 뒤흔들렸다.
[1. 간암 의심(정밀 검사 요망) 2. 기타 □기존 간암 환자]
경악을 금치 못한 수희의 눈앞이 새하얗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떨림을 주체할 수 없는 손끝에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버릴 것만 같았다.
수희는 안에 있던 다른 서류들도 전부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안에 들어 있는 서류들은 승만의 진단서와 최근 승만의 입원 기록들이었다.
[간암 3기로 진단되어 경동맥화색전술을 시행. 시술 후 경과는 좋은 편이나 완치는 어렵다고 판단됨.]
제대로 읽은 게 맞는데도 믿을 수가 없어 진단서에 박힌 글을 몇 번이나 읽었다.
덜덜 떨리던 팔이 결국엔 아래로 축 늘어져 버렸다.
너무나 허탈하고 허망해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수희야, 다 됐어. 어서 먹자.”
아무것도 모르는 승만은 식탁 위에 갓 만든 김치볶음밥을 올려 두었다.
대답 없이 책상 앞에 서 있는 수희를 보고 승만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수희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는 승만에게 돌아섰다.
“이거…… 정말 아빠 거 맞아요?”
새빨개진 수희의 두 눈이 진실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승만의 눈동자는 수희를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이걸 치워 둔다는 걸 잊었구나.”
승만이 서류 봉투를 가져가려 했지만, 수희는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숨기려 드는 승만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요. 이거 아빠 거 맞아요?”
승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불러오는 무언의 긍정에 수희는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정말…… 간암이에요?”
“…….”
“이거, 잘못된 거죠? 오진이죠? 그렇죠?”
아니라고 하길 바랐다. 아니, 그래야 했다.
더는 누군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벌어지는 승만의 입에서 절망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 살지 못한다더구나. 길어야 6개월.”
“…….”
“의사가 시술로 연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고.”
아아.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은데 눈물도 소리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1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승만이 왜 이제야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지 알 수 있었다.
전부 이것 때문이었다.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으니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한껏 눈썹을 일그러트린 수희가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방법이 없는 거예요?”
“…….”
“정말, 이대로 지켜만 봐야 하는 거예요?”
6개월 동안 서서히 생명의 불꽃을 잃어 가는 승만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
그 뒤엔 애란처럼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방법만 있다면 승만을 살리고 싶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 걸 지켜만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있어.”
일말의 희망이 피어오르자 수희가 승만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뭔데요, 그게?”
“간 이식.”
승만은 힘주어 강조했다.
“간 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다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