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자고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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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자고 갈 거야
2022.09.13.
“간 이식을 받으면 살 수 있다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배 속에 싸늘한 바람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말을 잃어버린 수희를 지켜보던 승만이 걱정을 덜어 주기 위해 덧붙였다.
“지금 뇌사자 간 이식 기다리고 있어. 이식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을 거야.”
의사가 시한부 선고까지 내렸다면 승만의 상태는 이미 손쓸 수 없는 단계일 것이다.
장기 이식을 신청했다 하더라도 바로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6개월 안에 공여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6개월 안에 이식을 받지 못한다면요.”
나지막하게 가라앉는 수희의 목소리에 승만이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도 다른 곳에 전이는 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이대로 치료를 계속 받는다고 한다면 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
”이 아빠는 이대로 너랑 주형이 두고 눈 못 감아.”
그저 희망이 담긴 말일 뿐이었다. 아무리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공여자 없이는 살 방도가 없었다.
의사가 선고한 6개월이 지나면 기적이 아닌 이상 더는 삶을 연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이것 때문에 이제야 제 앞에 나타난 거예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자 쥐고 있던 서류 봉투가 구겨졌다.
어두워진 낯빛으로 수희를 보던 승만이 아래로 시선을 꺼트렸다.
“그래.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네 앞에 나타나기로 결심했다.”
“…….”
“지금이 아니라면 널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승만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죽을 날짜를 받아 놓으니 너희가 눈에 밟히더구나.”
승만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탁상용 액자로 눈길을 돌렸다.
초등학생인 수희와 주형이 서로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눈물이 눈앞을 가리자 승만이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리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너희라도 실컷 보고 떠나고 싶었어.”
“…….”
“그래서 이기적인 걸 알면서도 네 앞에 나타난 거야.”
승만이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희를 품에 안았다.
“미안하다. 너한테는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너까지 힘들게 만들어서.”
어렸을 때도 자신을 늘 보듬어 주던 승만이었다.
기억 속에 있는 승만의 품은 따듯하고 포근했는데, 지금 자신을 안는 승만은 뼈대가 느껴질 만큼 마른 가지처럼 딱딱하고 메말라 있었다.
승만의 품에서 떨어진 수희의 눈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언제부터 아팠던 거예요. 오래됐어요?”
“벌써 3년이나 지났구나. 암이 퍼지기 전에 절제술까지 했는데 소용이 없더구나.”
혼자서 그 긴 시간을 버텨 왔다고 생각하니 수희의 가슴이 욱신욱신 저렸다.
애란의 불륜만 아니었더라면 승만은 가정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승만은 혼자가 아닌 가족들의 곁에서 아픔을 이겨 냈을 것이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도 승만의 옆에 있어 주지 못한 게 너무나 미안했다.
“이제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저녁 먹자.”
생각에 잠겨 있던 수희가 돌아서는 승만을 보며 운을 뗐다.
“공여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아빠랑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이식이 더 어렵겠죠?”
승만이 자신에게 몸을 틀자 수희가 느지막이 말을 이었다.
“가족이면…… 간 이식에 더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수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승만이 처음으로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간 이식하게 되면 네 몸에 얼마나 큰 상처가 남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수희가 눈을 확 떴다.
화가 난 승만은 단단한 목소리로 수희에게 일러두었다.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마라.”
불같이 화를 냈는데도 불구하고 수희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이대로 지켜만 보라고요?”
“…….”
“그거 정말 잔인한 거잖아요. 나한테 못 할 짓 하는 거잖아요.”
“너한테 이런 짐 지우고 싶지 않아서 숨기고 싶었던 거야.”
그 누구보다 살고 싶은 건 승만일 것이다.
그런데도 승만은 끝까지 수희를 말리며, 절박한 자신의 마음을 숨겼다.
“너는 네 생각만 해. 아빠는 그거면 돼.”
돌아서는 승만이 거실 중심에 있는 식탁에 앉으며 수희를 불렀다.
“배고프겠다. 어서 먹자.”
애써 웃어 보이는 승만을 보고 수희는 더는 이 일에 대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곧게 세워 두었던 다리를 움직인 수희가 승만의 앞에 앉았다.
이미 식어 버린 퍽퍽한 김치볶음밥에 숟가락을 꽂아 퍼 올렸다.
밥알이 아닌 모래를 씹는 것처럼 입 안이 까슬거렸다.
승만은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깐 채 묵묵히 밥만 먹고 있는 수희를 바라봤다.
상념에 잠긴 듯 흐리멍덩해진 수희의 눈을 보고는 승만의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섰다.
***
승만의 작업실에서 택시를 타고 온 수희가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린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온몸의 진이 쭉 빠져 버렸다.
몇 시간 사이에 너무 커다란 일을 겪은 터라 얼른 올라가 자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잊고 있던 한 가지가 떠올랐다.
수희가 휴대폰을 꺼내는데, 마침 승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많이 바빴어?]
승만의 작업실에 도착해 연락한다는 게 정신이 없어 메시지 하나 보내지 못했다.
“미안해요. 연락한다는 게 깜빡 잊고 있었어요.”
[괜찮아. 너 기다리는 거야 내가 잘하는 거니까.]
수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린 시간이 16년이었다.
몇 시간쯤이야 승조에겐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르게 어지러웠던 마음속이 잠시나마 고요해졌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선 수희가 엘리베이터 안에 몸을 실었다.
“화 안 났어요? 내가 연락해 준다고 해 놓고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했잖아요.”
[날 잊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겠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거였는지는 들어 봐야 알겠지만.]
잠깐 잊고 있었다. 한승조라는 남자는 이렇게 가끔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묘하게 말투가 달라진 것 같았다.
화재 사고를 기점으로 건조하게 툭툭 던지는 말투는 어디 가고 건네는 말들이 부드럽기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면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별안간 그의 마음이 와닿아 가슴 언저리에 따뜻함이 몰려왔다.
“아빠를 만나고 왔어요.”
[만나서 이야기는 잘했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승조 씨 만나면 얘기할게요. 상의해야 할 것도 있고.”
오늘 있었던 일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다.
승조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매일 밤 걱정으로 잠 못 이룰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몸은 좀 어때요?”
엘리베이터가 수희의 집 층수에 멈춰 서자 밖으로 몸을 빼냈다.
복도로 두 발을 채 내딛기도 전에 승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얼마나 안 좋은데요?”
놀란 수희가 목소리를 높이자 휴대폰 밖으로 승조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내디딘 발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직접 확인해 줘.”
승조의 말소리가 휴대폰이 아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승조 씨.”
수희의 집 앞에 서 있던 승조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 냈다.
“어서 와.”
승조가 두 팔을 펼치자 그대로 정지해 있던 수희의 다리가 천천히 교차했다. 내딛는 발이 점차 빠르게 바닥을 밀어냈다.
너른 그의 품으로 폭삭 안기자 승조의 팔이 자연스레 수희의 허리에 감겼다.
포근한 그의 향기에 수희는 두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승만을 만나고 줄곧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제야 제대로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예요.”
“두 시간 정도.”
두 눈을 확 뜬 수희가 상체를 뒤로 뺐다.
“나한테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
“방금 했잖아.”
한 시간도 아니고 두 시간이나 집 밖에서 기다려 놓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태연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집 비밀번호라도 미리 알려 줄 걸 그랬다.
수희는 오랫동안 밖에서 기다렸을 그가 걱정돼 얼른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밖에서 기다리면 어떡해요. 차에서 기다리고 있지.”
“지금 나 혼나는 거야?”
쏟아지는 잔소리에 승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현관문을 연 수희가 뒤를 돌아 승조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승조 씨 걱정돼서 그러죠. 몸 안 좋다면서요.”
“그랬었지, 내가.”
승조가 수희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자 높은 눈높이에 수희의 턱 끝이 바짝 들어 올려졌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데요.”
현관문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자 문이 덜컥 닫혔다.
천장에 붙은 센서 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어느새 바짝 다가온 승조의 얼굴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거리를 좁혀 오자 수희가 뒤로 물러섰다.
그가 들어오자 좁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현관이 작게만 느껴졌다.
이미 등이 벽에 닿았는데도 승조는 더욱 가까이 수희에게 밀착했다.
그러고는 수희의 손을 잡고서 제 가슴께로 끌고 갔다.
손등을 꾹 누르는 승조의 손길에 손바닥 전체가 심장 박동으로 잔잔히 진동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장난스러운 어투를 듣고 나서야 수희는 그에게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프다는 거 거짓말이죠.”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가 손을 감싸 잡으며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고개를 서서히 기울이던 승조가 수희의 입술 앞에서 멈췄다.
“오늘은 속아 넘어가 줘.”
“…….”
“너 기다린다고 내가 많이 애가 탔거든.”
수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긴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냈다.
머리 위에 있는 센서 등이 때맞춰 꺼지고, 온기를 머금은 입술에 승조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수희의 입술을 삼키자 맞물린 입술 사이가 금세 들들 끓는 열로 끓어올랐다.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숨결에 들뜬 수희의 허리가 벽에 눌렸다.
병원에서 나눴던 키스의 유형과는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쉼 없이 몰아붙이며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만들었다.
조금은 불친절하고, 조금은 거친 키스가 어째서인지 수희를 더욱 자극했다.
아찔한 감각에 수희는 제 허리에 얹어진 승조의 다부진 팔을 붙잡았다.
높은 천장 위로 질척거리며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엉켜드는 숨결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더욱 강렬해지고 짙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의 팔을 붙잡고 있던 수희의 두 팔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몸이 틈 없이 맞닿자 옷을 입고 있음에도 그의 근육 진 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입 안을 가득 채운 그의 열기가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한 수희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럼에도 승조는 수희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도리어 좀 더 깊게 그녀를 취했다.
술을 마신 듯 머리가 어지럽고, 아랫배가 저릿하게 울렸다.
입고 있던 셔츠 안으로 승조의 손이 유연하게 흘러들어 왔다.
뽀얀 속살을 쓸어 올리는 손끝에 감겨 있던 수희의 눈이 뜨였다.
달아오른 시야 안으로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머릿속에 새빨간 불이 들어왔다. 지금 이 상황, 무척이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건지, 승조가 붙어 있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승조가 고개를 뒤로 밀어내자 머리 위의 등이 틱, 하고 불을 밝혔다.
“나 오늘 자고 갈 거야.”
저 말의 뜻을 알고 있기에 수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전처럼 손잡고 자자는 뜻 아냐.”
금방이라도 수희의 입술을 다시 삼킬 것처럼 승조는 여전히 거리를 벌리지 않고 있었다.
서로의 달뜬 숨소리가 깔리던 현관이 나직한 그의 목소리로 덮였다.
“지금 내가 그럴 자신이 없거든.”